[세상읽기] 차별의 진화, 미시동기와 거시행동
[경향신문]
1.6킬로미터. 출퇴근 거리로는 아주 이상적이다. 그러나 초등학생의 등굣길로는 너무 멀다. 학교가 하나밖에 없다면, 어쩔 도리가 없다. 하지만 가까운 학교가 있다면, 굳이 ‘머나먼’ 등굣길을 택할 이유가 없다. 초등학교 배정의 제1원칙은 바로 근접성이다.
1951년, 캔자스주 토피카시에 살던 올리브 브라운도 생각이 같았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던 딸, 린다는 가까운 섬너 초등학교를 두고 한참 떨어진 먼로 초등학교에 걸어가야 했다. 전학을 원했지만, 교육위원회는 허락하지 않았다. 섬너는 백인 전용 초등학교였고, 린다는 흑인이었다.
남북 전쟁 후, 백인과 흑인은 ‘평등’한 기회를 얻었다. 최소한 법적으로는 말이다. 노예제는 폐지되었다. 어떤 이는 흑인을 아프리카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했지만, 이미 수백년이나 미국에서 살아온 터였다. 불가능했다. 대신 백인과 흑인이 ‘따로, 하지만 똑같이’ 살아가면 된다고 했다. 미국은 충분히 넓다는 것이다.
분리 평등 정책은 수많은 집단 갈등에 단골 처방법이다. 이래저래 싸우지 말고 각자 행복하게 살면 될 것 아닌가? 멋진 시설을 만들어 줄 테니, 장애인은 거기 모여 살면 그만이다. 빈자와 부자는 서로 불편하니, 따로 살자. 굳이 섞여야 할 이유가 뭔가? 매일 주차장에서 자동차 배기량을 견주며 분란만 날 테다.
그러나 미국 대법원은 뜻밖의 판결을 내렸다. 1954년, ‘공교육에 있어서 분리 평등의 원칙은 불가능하다. 분리된 교육 시설은 그 자체로 불평등하다’라고 판시했다. 린다를 포함해서 수많은 흑인이 환호했다. 인종 분리 정책은 불법이 되었다.
벌써 반세기가 흘렀다. 이제 흑인과 백인은 서로 어울려서 잘 살고 있을까? 아니다. 흑인 거주지와 백인 거주지는 마치 누군가 금이라도 그어 둔 것처럼 분명하게 나뉜다. 아시아인 거주지도 마찬가지다. 인종분리법은 폐지되었지만, 여전히 그들은 분리되어 살아간다.
신입생 개강파티를 생각해보자. 남녀가 맥주잔을 들고 서로 자유롭게 왕래한다. 괜찮은 이성을 만날까 싶어 마음도 설렌다. 한참 왔다 갔다 하는데, 주변에 남자가 너무 많은 것을 깨달은 영희. 조금 민망해져서 여자들이 많은 곳으로 자리를 옮긴다. 반대로 주변에 여자가 너무 많은 것을 알아차린 철수. 불편한 마음이 들어 얼른 이동한다. 한 시간 후. 파티장의 한쪽엔 남자만, 다른 쪽엔 여자만 득실거린다.
경제학자 토머스 셸링은 개별 행위자의 ‘작고 무해한’ 동기가, 집단 수준에서 의도치 않은 ‘크고 유해한’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밝혔다. 게임 이론과 행위자 기반 모델링의 초석을 닦은 학자다. 1970년대에는 컴퓨터 성능이 영 시원찮아서, 셸링은 모눈종이를 이용했다. 한 칸 한 칸 칠을 해가며 모델링을 했다. 생고생을 인정받았는지, 2005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다시 파티 이야기. 신입생(행위자)은 이성을 만나고 싶다. 다만 주변에 이성이 너무 많으면 불편하다(미시동기). 작은 동기가 뜻밖의 거대한 창발적 행동을 낳았다(거시행동). 누구도 원하지 않는 형태의 남녀 분리형 개강파티다. 수많은 분리와 차별이 대개 이런 식이다. 눈을 부라리며 차별에 앞장서는 악당은 드물다. 작고 무해한 동기가 만든, 크고 유해한 결과다. 여전히 흑인과 백인은 따로 분리되어 살아간다.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이 상당하다. 찬성하는 이의 주장이나 반대하는 이의 우려를 들어보면, 모두 고개가 끄덕여진다. 단언컨대 차별금지법의 유무와 상관없이 차별은 지속될 것이다. 무리 행동은 반드시 차별을 낳는다. 인간 무리의 어두운 속성이다. 입법으로 간단히 해결되긴 어렵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여덟 살 린다가 더 가까운 초등학교에 갈 기회를 빼앗으면 곤란하다. 지금 우리 주변에도 제2, 제3의 린다가 많다.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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