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철 칼럼] 독선 경쟁과 '0.73%의 저주'
[경향신문]
‘덜 악한 놈을 찍어야 한다.’ 한국 선거를 지배해온 차악론이다. 이에 따르면 정의당과 같은 진보정당은 영원히 지지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아주 싫어한다. 하지만 굳이 비교를 한다면, 1987년 민주화를 기준으로, 민주당에서 더불어민주당으로 이어져온 ‘자유주의정당’이 문제가 많지만 그래도 민정당으로부터 국민의힘으로 이어져온 ‘냉전적 보수정당’보다는 나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세력이 냉전적 보수세력보다 못한 것이 있다. 그것은 자기혁신이다. 2002년 노무현 정부 초기 이회창 후보의 불법 대선 정치자금인 ‘차떼기 사건’이 터지자, 보수세력은 당을 천막당사로 옮기는 극약처방으로 자기혁신의 모습을 보여줬고 2007년 대선에서 승리했다. 2012년 대선에서도 박근혜는 김종인을 영입해 ‘경제민주화’라는 진보적 선거공약을 제시해 승리했다. 2017년 보수세력은 박근혜가 탄핵을 당하는 등 치명타를 맞고 당분간 재기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내로남불’ 등으로 촛불을 다 말아먹은 데다가 파격적으로 30대 원외 정치인인 이준석을 당대표로 선출하고, 박근혜·이명박 사법처리의 주역인 ‘철천지원수’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대선 후보로 뽑아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5년 만에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자유주의세력은 민주화세력이라는 오만 때문인지 자기혁신에 인색하고 혁신하는 척도 못한다. 이들이 마지막으로 가시적인 자기혁신으로 승리한 것은 2002년 대선이다. 보수세력의 이회창 후보가 압도적으로 앞서자, 민주당은 당원만이 아니라 일반국민도 경선에 참여하는 국민참여경선제를 도입해 노무현 바람을 일으켰고 정몽준과 후보 단일화로 대선에서 승리했다. 이후 의미 있는 혁신노력은 사라졌다. 2007년 대선에서 민주화 이후 최대 표차로 패배했고 이어진 총선에서도 참패했지만, 제대로 된 혁신은 없었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은 역설적으로 혁신을 가로막았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에 따른 분노와 동정심으로 별 혁신노력 없이 자유주의세력은 인기를 회복해 2010년 지방선거와 2012년 총선에서 선전했다. 자유주의세력은 이 같은 현실에 안주했다. 그 결과, 2012년 대선에서 패배했다. 노 전 대통령 비극에 따른 지지율 상승은 ‘축복을 가장한 저주’였던 셈이다. 2016년 총선 당시 ‘안철수 바람’ 등으로 위기에 처하자 김종인을 당 비대위 대표로 영입해 총선에서 예상 밖의 승리를 하기도 했지만, 이후 제대로 된 혁신은 사라졌다. 사실 최순실 게이트와 박근혜 탄핵이 없었다면, 2017년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승리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았다.
이번 대선 패배 후에도 비슷한 흐름이 계속되고 있다. 젊은 여성운동가인 박지현 여성위원회 부위원장을 비대위 공동위원장으로 영입하는 등 일부 혁신의 모습을 보여줬지만 이는 본질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0.73%밖에 지지 않았으니 잘 싸운 것이라는 ‘졌잘싸’가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것 같다. 왜 선거에서 졌는가 하는 냉정한 반성과 혁신, 나아가 대선에서 약속한 승자독식 정치제도의 개혁이라는 정치교체보다는 ‘검수완박’에 올인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 조국사태 등을 통해 더불어민주당이 겪은 ‘검찰 트라우마’는 이해하며, 검찰개혁이 필요하다는 데에 동의한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이를 위해 난리를 치며 만든 공수처는 기대 이하다. 아무리 이해를 해주려 해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지난 5년간 가만히 있다가 대선에서 패배했다고 이 같은 중대사항을 충분한 논의 없이 군사작전식으로 개정하는 한심한 작태이다. 대선에서 졌기 때문에 검수완박이 급해진 것이지, 이재명 후보가 이겼으면 검수완박을 강행하지 않았을 것이 뻔하다. 윤석열같이 살아 있는 권력에 칼을 들이대는 검찰총장을 임명하는 자충수를 두지 않는 한, 이재명 대통령하에서 ‘검찰은 나의 칼’이기에 검수완박이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의 ‘독선의 정치’를 보고 있으면 한숨밖에 안 나오고, 앞으로 5년이 정말 걱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의힘 지지율과 더불어민주당 지지율 간의 격차가 더 벌어지는 것 같다. 더불어민주당이 반성과 혁신이 아니라 자폐정치, 트라우마의 정치에 의해 또 다른 ‘독선의 정치’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0.73%밖에 지지 않은 것이 저주가 되고 있다. 여야의 ‘혁신 경쟁’이 아니라 ‘독선 경쟁’이다. 여야 모두 상대방의 독선으로 지지율이 올라 혁신을 하지 않아도 되는 ‘독선의 악순환’이 걱정이다.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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