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란..함께 시간을 보내고 감정을 나누며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는 것[김유진의 구체적인 어린이⑤]

김유진 2022. 5. 9.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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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의 가족이 되려면

[경향신문]

<비밀 소원>의 삽화. 사계절 제공
혈연으로 이뤄진 가족이어도 ‘안온한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하는 현실
어린이의 성장을 응원하고 존재 자체를 수용하며 돌봐주는
‘정상’ 범주 밖의 ‘진짜 가족’이 있다

가족이 필요한 진짜 이유

어린이에게는 가족이 필요하다. 대부분 어린이는 가족 안에서 돌봄을 받으며 성장한다. 가족이라는 사회가 어린이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가르친다. 가족은 온갖 형태의 돌봄을 직접 제공하거나 연결하며, 한 어린이가 어른이 되어 독립적으로 생활하기까지 도와준다. 가족은 어린이의 양육에 있어 가장 소중한 사회다.

<일요일의 아이>(구드룬 멥스·비룡소·2006)는 고아원에 사는 주인공이 새 가족을 찾는 이야기로, 어린이에게 가족이 지닌 의미를 보여준다. 주인공은 일요일에 태어난 자신을 ‘일요일의 아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일요일의 아이에게는 늘 행운이 따른다는 이야기를 믿지는 않는다. 고아원의 다른 아이들은 결연된 ‘주말 부모’가 있어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교외로 소풍을 나가 신나게 놀다 돌아오지만 자기에게는 아직 ‘주말 부모’가 없어서다. 일요일의 아이에게 일요일은 학교에 가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 만큼 오히려 외롭고 쓸쓸해지는 날이다.

그러던 중 일요일의 아이에게도 드디어 주말 부모가 생긴다. 주말 부모, 정확히 말하면 비혼의 주말 엄마인 울라는 다른 주말 부모들처럼 자동차나 멋진 집도 없는 가난한 작가이다. 잠시 기대가 무너졌지만 곧 일요일의 아이는 활기찬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울라를 좋아하게 된다. 작은 실수를 두고도 혼날 일을 걱정하거나, 앞으로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아 할 거라고 불안해하던 마음은 어느새 사라졌다. 별것 아닌 말도 가리고 조심하느라 늘 입안에서만 맴돌던 말들이 어느 날 여과 없이 툭, 하고 튀어 나왔을 때 아이는 생각한다. “그때 갑자기 내가 처음으로 아줌마한테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를 했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기가 이렇게 쉬운 걸 왜 못했을까.”(<일요일의 아이> 108쪽)

이제 일요일의 아이는 일요일에 태어났어도 행운이라곤 찾아오지 않는 아이에서, 일요일마다 엄마가 생겨 행복한 아이가 된다. 울라는 아이가 으레 상상했듯 부자도 아니고, 아늑한 집에서 손수 만든 음식을 챙겨주지도 못하지만 어린이를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며 마음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일요일의 아이는 사랑받으려면 잘 보여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조건 없이 사랑받고 사랑하는 관계를 신뢰하게 된다. 울라를 만나고서부터 책장 가득 넘실대는 아이의 기쁨을 보고 있으면 어린이에게 가족이 필요한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다.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에게 오롯이 관심을 쏟고 감정을 나누는 것, 일요일의 아이는 부모라는 이름에서 바로 그걸 애타게 갈망했다.

“이제 나는 울라 아줌마가 나랑같이 뭘 하기를 바란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도 그러고 싶다. 배가 간질거린다. 여름이 지나도 우리는 계속 함께 뭔가를 할 것이다.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나도……. 배가 점점 더 간지러웠다. 그리고 간지러움이 목으로 올라왔다. 하지만 목을 타고 밖으로 나오려고 하는 건 전처럼 설탕 넣은 차가 아니라 기쁨이었다. 나의 울라 아줌마, 내 주말 엄마, 울라 아줌마는 일요일에는 앞으로 영원히 나만의 울라 아줌마일 것이다.”(<일요일의 아이> 119~120쪽)

일요일의 아이 구드룬 멥스 지음 | 김라합 옮김 | 비룡소 | 2006

‘사랑’에 대한 갈망,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

<일요일의 아이>는 가족이 없는 어린이가 가족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보여주며, 어린이에게 가족이 필요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랑’에 대한 갈망과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 동전의 양면 같은 두 마음은 어린이의 마음 깊숙이 자리한다. 동전의 양면을 두고 따질 필요는 없을 듯하지만 아마도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이 더 먼저이고, 더 강렬하지 않을까 싶다. 유기 불안은 가족이라는 이름의 타인에게 전적으로 생존을 의지해야 하는 어린이들의 존재적 본능 같다.

인간 무의식에 자리 잡은 유기 불안을 잘 보여주는 서양 민담이 ‘헨젤과 그레텔’이다. 어린이의 유기 불안은 <일요일의 아이> 같은 유사 가족이나, ‘헨젤과 그레텔’처럼 계모로 구성된 가족 형태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헨젤과 그레텔’은 계모와 자녀의 이야기라기보다 부모 혹은 가족과 어린이의 이야기다. 실제로 잭 자이프스를 비롯한 민담학자들은 ‘헨젤과 그레텔’의 1810년 초고본에서는 원래 ‘친모’였다가 1857년 최종본에서 ‘계모’로 수정된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수정된 이유에 대해선 어린이 독자의 심리적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서라고 해석한다. 친모가 유기한다는 모티브는 끔찍하니 그걸 계모에게로 전가하고, 친부는 매우 유약한 캐릭터로 만들어 면죄부를 준 것이다.(김환희·<옛이야기와 어린이책>·302~304쪽 참조)

사실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가 겨누는 핵심은 ‘계모냐 친모냐’가 아닌, 어린이를 유기하는 사회 현실이다. 민담학자들이 이 민담을 어린이 심리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이유가 있다. 아동 유기, 유괴, 학대, 굶주림이 일어나는 현실에서 불안과 공포를 안고 살아가는 어린이들에게 위기 대처 능력 내지 생존 법칙을 가르쳐준다는 설명이다. 그러한 현실은 민담이 기록된 200여년 전은 물론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혈연 가족이라 해서 어린이에게 심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항상 든든하고 안온한 울타리가 되어주지는 못한다. 슬프고 처참한 현실을 살아가는 어린이들이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바니의 유령 마거릿 마이 지음 | 햇살과 나무꾼 옮김 | 비룡소 | 2007

가족 안에 머물 자리

<바니의 유령>(마거릿 마이·비룡소·2007)에는 어린이가 가족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겪으며 자신의 유기 불안을 자연스레 떨쳐내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주인공 바니는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가는 길에 문득 푸른 벨벳 옷을 입은 유령 소년을 만난다. 유령이 바니의 원래 이름인 ‘바너비’를 부르며 “바너비는 죽었어! 나는 너무 외로워질 거야”라고 외쳐대니 바니는 이를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견처럼 느끼며 극심한 공포에 떤다.

하지만 바니는 가족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혼자 끙끙대기만 한다. 가족 가운데 자신을 가장 사랑해주는 새엄마는 임신한 상태였고, “아기를 가진 사람들은 단순하고 행복하게 생활해야 하며, 자기 아이가 유령을 본다거나 혹시 정신이 나갔을지도 모른다며 불안해하면 안 된다”(<바니의 유령> 62쪽)고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사랑하는 새엄마의 안위를 염려하는 마음에는 친모가 자기를 낳으며 돌아가셨듯 또다시 엄마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깔려 있다.

바니는 자꾸 유령이 보이는 것만도 무서울 지경인데 자신의 죽음과 새엄마의 부재까지 두려워지는 상황으로 빠져든다.

유령이라는 환상 세계가 불러낸 바니의 공포는, 현실 세계에서 있는 그대로의 내가 가족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겹친다. 유령은 “우리 같은 사람들은 가족 안에 머물 자리가 없어”(<바니의 유령> 60쪽)라며 계속 바니를 겁주고, 바니를 가족에게서 떼어내 마법사들의 세계로 데려가려고 한다. 바니는 마음에서 계속 일어나는 이 질문으로 불안했을 것 같다. 유령은 내가 남들과 다르다고 하는데, 유령의 말이 사실이라면 과연 나는 지금처럼 가족 안에서 계속 사랑받고 수용될 수 있을까.

바니에게 유령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결국 가족들이 알게 되면서부터 바니의 공포는 바니 집안의 비밀과 함께 풀린다. 유령은 집안의 마법사 콜 할아버지가 보낸 형상이었다. 어린 시절 콜 할아버지는 마법을 지녔다는 이유로 증조할머니에게 거부당했고 집에서 쫓겨나 죽은 사람인 양 지내왔다. 그는 다른 가족 몰래 유일하게 연락하던 형제인 바너비 할아버지가 죽고 완전히 혼자가 되자 집안에서 유일하게 마법을 지녔다고 생각한 바니를 억지로 데려가려고 했던 것이다.

콜 할아버지를 가족 밖으로 내쫓은 증조할머니의 태도는 가족의 비밀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여러 인물의 목소리로 한결같이 비판된다. “곧게 자라는 장미를 키우듯 우리를 가지 치며 다듬었고, 결국 우리는 하나같이 반듯하고 곧게 살아갔단다”(<바니의 유령> 98쪽), “특별한 천성을 억누를 것을 강요하고 어떻게든 그 특성을 부수려고 하는 가정”(<바니의 유령> 148쪽), “마법을 인생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자신만의 특별한 개성을 파괴하기 시작했어요. 주위의 사물에 거짓 질서를 부여하고요. 정돈하고 정돈하고 또 정돈해서 자유로운 놀이들을 모조리 할머니만의 체스 게임으로 바꾸었어요.”(<바니의 유령> 175쪽)

바니를 절대로 콜 할아버지처럼 쫓겨나도록 두지 않고 바니의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겠다고 반복하며 신뢰를 주려는 듯하다. 즉 이 동화에서 ‘마법’이란 어린이 저마다의 개성을 상징한다. 그 개성이 어떠하든 가족은 어린이의 존재 자체를 수용해야 하며, 그에 대한 믿음을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어린이를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이라고.

새엄마와 가짜 누이가 만든 진짜 가족

콜 할아버지가 바니를 억지로 데려가려 할 때 가족의 이름으로 적극 막아선 사람은 바니의 새엄마다. 마법사의 능력이 혈연으로 계승되는 태생적 성격인 데 비해 새엄마가 주장하는 가족의 핵심은 그와 다른 의미다.

“바니는 제 아들이에요. 우리 식구들은 서로에게 속해 있어요. 아니, 서로 잘 어울리고 있죠. 전 지금까지 일 년간 바니를 키웠어요. 셔츠를 다려주고, 도시락을 싸주고, 이야기를 들려주었죠. 바니가 입고 있는 잠옷도 만들어주었지만, 할아버진 지난주까지만 해도 죽은 줄만 알았던 분이에요. 어쨌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니가 우리랑 살고 싶어 하지 할아버지와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중요한 건 바로 그거예요.”(<바니의 유령> 158~159쪽)

새엄마는 가족을 구성하는 핵심이 혈연이 아닌 돌봄에 있다고 한다. ‘돌봐주는 게 가족이다. 가족을 선택하는 데는 어린이 본인의 의지가 중요하다.’ 가족의 비밀이 유령과 마법사의 판타지로 알 듯 말 듯 흥미롭게 흐르다가 마지막에 이르는 자리가 무척이나 통쾌하다. 새로운 가족 개념은 바니의 누나인 타비사가 “가족이란 다 우연히 만난 거예요”(32쪽)라고 말하는 데서도 드러난다.

신비로운 그녀, 아버지의 딸 E L 코닉스버그 지음 | 이보미 옮김 | 문학과 지성사 | 2014

<신비로운 그녀, 아버지의 딸>(E L 코닉스버그·문학과 지성사·2014)이 말하는 가족도 비슷하다.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하이디의 발달장애를 수용하며 교육한 사람은 부모가 아닌 가짜 누이 캐롤라인이었다. 캐롤라인은 17년 전 납치되어 행방불명되었다가 가족 앞에 갑자기 나타나며 엄청난 재산의 상속자가 된다. 소설은 내내 캐롤라인이 진짜 상속자인지 사기꾼인지를 좇다가 결말에 가서는 지금까지 서사를 스스로 배반한다. 캐롤라인이 친딸인지 여부보다 하이디의 성장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관계인지 여부로 진정한 가족인지를 판가름한다. 자신의 정체가 담긴 서류를 앞에 두고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게 더 중요한지, 아니면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아는 게 더 중요한지”(<신비로운 그녀, 아버지의 딸> 169쪽) 알아서 결정하라는 캐롤라인의 당당함은, 오직 혈연만이 가족을 이루는 요소가 아니라는 걸 분명히 말한다.

비밀 소원 김다노 지음 | 이윤희 그림 | 사계절 | 2020

지금까지 살펴본 동화들은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에 출간됐으면서도 오히려 지금 우리 동화들보다 가족의 의미를 좀 더 다양하게 탐색한다. 우리 동화는 여전히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어서 다양한 가족의 모습을 만나보기 힘든 점이 있다. 한부모 가족, 조손 가족, 다문화 가족, 이민 가족의 어린이는 대개 결핍을 겪는 인물로만 등장하며 편견을 강화하기도 한다. 그중 <비밀 소원>(김다노·사계절·2020)은 부모님이 별거를 시작한 이랑과,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신 후 외할머니, 비혼 이모와 사는 미래의 가족을 편견 없이 그려내어 돋보인다. 어떤 가족 형태로 지내든 각자 행복하기를, 새로 구성된 가족이 잘 살기를 바라는 이랑과 미래의 소원은 ‘정상가족’의 굴레를 벗어나야 비로소 꿈꿀 수 있는 희망을 어린이 독자에게 안겨준다.

■김유진



아동문학평론가·동시인. 동시집 <나는 보라> <뽀뽀의 힘>, 청소년시집 <그때부터 사랑>, 아동문학평론집 <언젠가는 어린이가 되겠지>를 출간했고, ‘토닥토닥 잠자리 그림책’ 시리즈를 썼다.

아동문학 작품 속에서 어른과 어린이가 좀 더 자주 만나고, 좀 더 가깝게 이어지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란다.

김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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