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멸의 슬픔을 껴안는 성숙한 시선

이태민 기자 2022. 5. 9.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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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308쪽 / 1만 4000원)
한층 깊어진 사유·날렵하고 지적인 문장 선사
'살인자의 기억법' 이후 9년만의 장편소설

소설가 김영하가 '살인자의 기억법' 이후 9년 만에 장편소설로 돌아왔다.

그리 머지 않은 미래에 별안간 삶이 송두리째 뒤흔들린 한 소년의 여정을 좇는다. 유명한 IT 기업의 연구원인 아버지와 쾌적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던 철이는 어느날 갑자기 수용소로 끌려가 난생처음 날것의 감정으로 가득한 혼돈의 세계에 맞닥뜨리게 되면서 정신적, 신체적 위기에 직면한다. 동시에 자신처럼 사회에서 배제된 자들을 만나 처음으로 생생한 소속감을 느끼고 따뜻한 우정도 싹틔운다. 철이는 그들과 함께 수용소를 탈출하여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떠나지만 그 여정에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게 자신의 존재에 대해 품기 시작한 의문은 나날이 커진다. "나는 정말 아빠가 정교하게 만들어낸 피그말리온이었을까?"

이 작품은 그의 이전 문학 세계와도 연결 지점이 있다. '작별인사' 속 인물이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는 명제를 두고 논쟁하는 장면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메시지와 닿아있다. '나는 내가 알던 내가 맞는가'를 자문하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주인공의 모습은 '빛의 제국'의 기영, '살인자의 기억법'의 병수를 떠올리게 한다.

저자는 코로나19 시국이 끝날 무렵에서야 이 책을 완성했다. 디스토피아적 미래가 도래한 것처럼 세상이 바뀌자 작가는 고쳐쓰기를 반복했고 점점 전에 발표된 책과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분량은 420매에서 800매로 늘었고, 주제도 달라졌다. 질문의 방향 역시 달라졌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가르는 경계는 어디인가'를 묻던 소설은 '삶이란 과연 계속될 가치가 있는 것인가?', '세상에 만연한 고통을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을 것인가', '어쩔 수 없이 태어났다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로 바뀌었다. 팬데믹이 수정에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고, 원안에 담긴 어떤 맹아가 오랜 개작을 거치며 발아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에 대해 작가는 "탈고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고를 다시 읽어봤을 때, 이제야 비로소 애초에 내가 쓰려고 했던 어떤 것이 제대로, 남김 없이 다 흘러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저자가 주로 다뤄온 '기억, 정체성, 죽음'이란 소재는 이 책에서 근미래를 배경으로 새롭게 직조된다. 달라진 것은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 반드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죽음의 문제'로 더 깊이 경사됐단 것이다. 원고에서 핵심 주제였던 정체성의 문제는 수정을 거치며 비중이 현저히 줄었다. 대신 태어남과 죽음, 만남과 이별의 변증법이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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