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 어서 오라

한겨레 2022. 5. 9.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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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회원들이 지난 3일 오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회에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숨&결] 정민석 | 인권재단 사람 사무처장

“자신을 표현하는 나무 주변에 우리가 만날 ‘돌봄 대상자’를 표현해볼까요?”

강사의 요청에 교육 참여자들은 저마다 깊은 고민을 하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각양각색의 꽃을 그리는 이도 있었고, 누군가 잠시 쉬어 가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나무 그늘 아래 평상을 표현한 이도 있었다. 나무 주변에 구름이나 개울을 그리며 평화로운 일상을 꿈꾸기도 하고, 나무 기둥을 튼튼하게 그리면서 ‘안정감’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말한 이도 있었다.

‘감염인이 감염인에게, 서로 돌봄’ 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된 교육 프로그램에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인 12명이 돌봄활동가가 되기 위해 매주 모이고 있다. 평균 나이 50대가 훌쩍 넘은 참여자들은 동료 감염인을 돕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기 위해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다. 크고 투박한 손에 쥐어진 색연필이 어색하기만 하다. 하지만 이들은 나무를 그리고 꽃을 그리고 구름과 개울을 그리며 자신이 경험해왔던 차별을 떠올렸고, 그 경험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자신들이 꿈꿨던 평화로움과 안정감을 표현했다.

에이치아이브이 감염인 서로 돌봄 사업은 사실 참여자들의 선의로만 채워진 착한 프로그램이 아니다. 차별과 낙인으로 스스로 고립된 삶을 택한 감염인의 존엄이 방치되고 하찮게 여겨져 왔기 때문에, 진료 입원 요양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차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없어, 막막한 그 순간 우리끼리라도 서로 돌보며 살아가자는 마음으로 기획됐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지난 15년 동안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사회적 약자인 에이치아이브이 감염인들은 생존을 위한 돌봄을 스스로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지금 국회 앞에서 미류와 종걸, 2명의 인권활동가가 한달째 단식을 이어가며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다.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도 꿈쩍하지 않았기에 인권활동가들은 밥을 굶는 극단의 방식을 택해서라도 차별금지법 제정의 필요를 말하고 있다. 누구나 평등해야 한다는 당연한 요구가, 혼자 남겨두지 않겠다는 약속이, 곡기를 끊어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현실이 참담하기도 하고, 이들이 점점 말라가는 모습만큼 애가 타는 시간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10만명 국민동의 청원은 심사기간이 2024년 5월로 연기됐고, 아직 일정도 정하지 않은 공청회를 개최하겠다는 게 국회가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한 유일한 활동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사회적 합의 운운하며 제 역할을 다하지 않고 혐오를 방치한 결과,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이 아픔을 고스란히 감내하고 있다.

더는 사회적 합의를 핑계 댈 수도 없다. 최근 한국갤럽 조사에서 차별금지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의견은 57%로 조사되었다. 퇴임을 앞둔 대통령의 국정수행 긍정평가(45%)보다, 취임을 앞둔 대통령 당선자 직무수행 긍정평가(41%)보다도 높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의뢰한 리얼미터 조사에서도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67.2%로 나타났다. 지난 8일 발표된 국가인권위원장 성명에 담겨 있듯이 “평등법 제정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와 사회적 합의는 이미 충분히 확인되고 있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어떤 풍파에도 꽃과 나무가 꺾이지 않고 서로 의존하며 살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줄 수 있을 것이다. 차별을 감내하는 삶이 아니라, 꽃으로서 충분히 빛나고 아름다울 수 있게 밑거름이 되어줄 것이다. 고립을 선택하는 삶이 아니라 관계를 형성해가는 삶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차별금지법이 나무라면, 그 나무 곁에서 일상의 평화로움과 안정감을 느꼈으면 좋겠다.

지금, 국회 앞에는 평등을 위해 목숨을 건 인권활동가들이 있다. 출발선에도 제대로 서보지 못한 이들의 곁에서 목소리가 되어주고, 평등의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단식 중인 인권활동가 미류의 말을 마지막으로 옮겨본다. “평등은 밥이다. 평등의 봄 어서 오라!” 절박하고 결연한 마음으로 함께 외친다. 차별금지법 제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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