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적'에 가려진 김지하 詩 '줄탁'과 '척분'

김유태 2022. 5. 9.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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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지하 시인 별세 소식에
생명 사상·자기 반성 담은 시
문인·독자, 재조명하며 애도
김훈 "고귀한 투쟁 기억을"
이문열 "잔 부딪히던 날 추억"
9일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에 마련된 김지하 시인 빈소의 영정사진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김지하 시인이 지난 8일 별세하자 문인과 독자의 추모 열기가 뜨거워지고 있다. 시로 사회의 정의를 도모했던 고인의 뜻을 기리는 마음이 너나없이 모이고 있어서다. 독자들은 '타는 목마름으로'와 '오적(五賊)'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고인의 시세계를 재조명하며 애도를 더하고 있다.

소설가 김훈은 9일 매일경제신문과 통화에서 고인의 시 가운데 꼭 읽어야 할 시로 1987년 출간된 시집 '애린'에 질린 '줄탁(啄)'을 꼽았다. 이에 대해 김훈 작가는 "생명의 태어남을 노래한 짧은 시로, 비극적인 시대에 대한 정직한 메시지"라고 평했다. 줄탁은 불교 용어로, 달걀이 부화하려 할 때 알에서 나는 소리()와 어미닭이 그 소리를 듣고 껍데기를 쪼아 깨뜨리는 것(啄)을 의미한다.

'저녁 몸속에/새파란 별이 뜬다/회음부에 뜬다/가슴 복판에 배꼽에/뇌 속에서도 뜬다//내가 타 죽은/ 나무가 내 속에 자란다/나는 죽어서/나무 위에/조각달로 뜬다//사랑이여/탄생의 미묘한 때를 알려다오//껍질 깨고 나가리/박차고 나가/우주가 되리/부활하리'. (시 '줄탁' 전문)

한 세계가 태어나려면 죽음과 삶이 동시적으로 필요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김훈 작가는 "시의 이름으로 박정희 독재와 싸웠던 고귀한 투쟁, 짓밟혀 있거나 투항해 있었던 시대에 자유와 생명을 갈망했던 정신을 기억해야 한다"면서 "말년에 그가 보여준 파행 때문에 시대로부터 소외 당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정신사적으로 그의 삶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김지하의 생명사상을 말해주는 또 다른 대표작은 역시 '애린'에 실린 시 '척분(滌焚·불사른 것을 씻어냄)'으로 '스물이면/혹/나 또한 잘못 갔으리/품안에 와 있으라/옛 휘파람 불어주리니, 모란 위 사경(四更) 첫이슬 받으라/수이/삼도천(三途川) 건너라'라는 짧은 시다. 온라인 상에선 이 시를 올리며 고인의 폭넓은 생명사상을 기리는 이들이 다수다.

정과리 문학평론가는 "김지하 시인의 생명사상은 민족문학으로부터의 변절이 아니라 민족주의의 비판적 확대"라며 "시 '척분'은 고난과 궁핍으로부터 솟아난 한의 미학을 기저에 두고 그 안에서 자신의 슬픔과 상처를 반성적으로 돌아보는 시로, 1980년대 후반기 그의 사상이 집약적으로 녹아 있어 주목할 만하다"고 설명했다.

소설가 이문열은 고인의 별세 소식에 오래 전 추억을 털어놨다. 이문열 작가는 "1980년대 초반 '황제를 위하여'를 내고 얼마 되지 않아 술집 주인을 통해 나를 부르셔서 술집에서 길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당시 나는 보수 반동으로 찍혀 있었는데, 고인은 동석자 질타에도 아랑곳없이 '얘 무시하지 마라'며 좋게 봐주셨다. 세인들에겐 다른 길을 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고인은 그런 성품을 가지셨던 분"이라며 "이후 2000년께 독일에서 뵌 게 마지막이었다. 동행과 부축이 필요할 정도로 쇠약해지신 상태였는데, 고인의 별세 소식을 들으니 오래 전 뜨겁게 잔을 부딪쳤던 기억이 난다. 애도라는 단어 외에 다른 표현이 어렵다"고 말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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