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일지' 손석구, '구씨'에서 '구자경'으로 돌아가나? [김재동의 나무와 숲]

김재동 2022. 5. 9.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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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EN=김재동 객원기자] 8일 방송된 JTBC 토일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10회는 4.594%(닐슨코리아)를 기록했다. 기존 자체 최고 시청률 8회(3.876%)보다 약 0.7%포인트 높은 수치다. 9회부터 드러나기 시작한 구씨(손석구 분)의 과거가 견인 요인으로 보인다.

9회에서 구씨는 생경한 경험을 했다. “씽크대 만들어서 외제차 타고 골프 치는 사람들도 있어. 나야 빚 갚는데 다 썼지만. 그래도 이거 해서 집도 지키고 땅도 지켰어. 열심히 하면 먹구 살만 햐.” 하루종일 한마디도 안하기 일쑤인 염제호(천호진 분)가 뜻밖에 긴 사설을 늘어놓았다.

구씨(손석구 분)는 의아했다. 겉보기에도 건달기 물씬한 백사장과 만난 모습을 봐서 그런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염미정(김지원 분)이 자신과 사귄다고 고백했기 때문이었다.

자신과의 교제를 스스럼없이 고백한 염미정뿐 아니다. 이 가족 모두가 점점 재미있다. 겉보기 영락없는 알콜중독에 근본없는 떠돌이다. 백사장을 봤으니 염제호만은 자신의 과거를 대충 눈치챘을 법도 하다. 금지옥엽까지는 아니더라도 멀쩡한 딸내미가 그런 치와 사귄다는데 아무도 쌍지팡이를 들지 않는다. 엄마인 곽혜숙(이경성 분)마저 싫은 내색을 안한다.

미정의 언니 기정(이엘 분)만은 떨떠름해 하지만 그저 그정도, 적나라한 거부감은 드러내지 않는다. 미정의 오빠 염창희(이민기 분)는 아예 대놓고 딸랑거린다. 그 모습이 귀찮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다.

특히 자신에게 추앙을 강요했던 미정을 보면 쫄린다. 그래서 짜증난다. 근데 또 기다려진다. 이 땅 산포에선 구씨가 이방인이지만 구씨에겐 미정이 이방인이다. 미정은 그가 아는 모든 여자들, 수박 겉핥는 수다에 몰두하고 그런 지겨운 이야기를 정성스럽고도 지겹게 반복해 남자로 하여금 지겨워 죽게 만드는 여자들과 판이하다.

그녀는 개구리 터져 죽은 얘기를 정성스럽게 하고, 달려드는 들개를 향해 핸드백이며 돌을 집어던지면서 개 소리를 압도하는 포효를 질러 꼬리를 말게 만드는 여자다. 그러면서도 사람하고 끝장보는 일, 얼굴 붉히는 일은 언감생심, 돈 떼먹은 전 남친 빚도 대신 갚아주고 만다.

그래서 말해주었다. “넌 상황을 자꾸 크게 만들어. 오늘은 팔뚝 하나 물어뜯기고 내일은 코 깨지고 불행은 그렇게 잘게잘게 부셔서 맞아야 되는데 자꾸 막아서 크게 만들어. 난 네가 막을 때마다 무서워. 더 커졌다. 얼마나 큰 게 올까?.. 너는 본능을 죽여야 돼. 본능이 살아있는 여자는 무서워... 너 무서워.”

그렇게 미정에게 퍼부어준 구씨는 평상에 몸을 눕힌다. 투명한 별들이 무수히 망막으로 쏟아져 내린다. 그 모습을 보며 한 마디 덧붙인다. “이런 데서 사는 한 넌 본능을 못죽여.”

구씨가 무서워하는 미정의 본능은 늦여름밤 쏟아지는 별빛처럼 투명하고 성결하다. 15년을 지하에서 협잡과 음모와 술취한 이들의 광기에 시달린 구씨로서는 면역력이 없을 수밖에 없다. 면역력이 없으니 두렵다. ‘가까이 해도 되나?’ 싶은 주저감에 “칼이 옆구리에 들어와도..” “같이 살던 여자한테 자살절벽 얘기를 해줬어. 죽으라고” 등 기회 있을 때 빨리 도망가라는 사인을 줄기차게 내보이지만 이 여자 도통 물러설 기미가 없다.

“병신 누가 다이아몬드 달래? 들개한테 팔뚝 물어뜯길 각오하는 놈이 그 팔로 여자 안는 건 힘들어? 어금니 꽉 깨물고 고통을 견디는 건 있어 보이고 여자랑 알콩달콩 즐겁게 사는 건 시시한가 보지? 뭐가 더 어려운 건데 들개한테 팔뚝 물리고 코 깨지는 거랑 좋아하는 여자 편하게 해주는 거랑 뭐가 더 어려운 건데. 나보고 꿔간 돈도 못받아내는 등신 취급하더니 지는..”

헛웃음이 나온다. 아니 헛웃음이 아니다. ‘저 여자가 내게 곁을 주는구나! 밀어내는 나를 잡아 끄는구나!’ 싶은 안도의 웃음이다.

정성스런 문자도 당도한다. “이름이 뭐든 세상 사람들이 다 욕하는 범죄자여도, 외계인여도 상관없다고 했잖아. 그게 뭐? 난 아직도 당신이 괜찮아요. 그러니까 더 가요. 더 가봐요. 아침바람이 차졌단 말예요”

잊었다. 계절이 가면, 가을·겨울 지나 새봄이 오면 미정과 구씨는 다른 사람이 되어있기로 했었다. 그러자면 얼쩡대는 과거의 그림자를 한동안 치워야 한다. 구씨는 트럭을 몰고 옛 사업장을 찾아 백사장을 만나 경고한다.

“내가 요즘 싱크대도 만들어야 되고 좀 바빠. 내가 결정나면 올게. 싱크대가 좋다. 이 세계 접을란다. 아니면 아무래도 이세계 내가 다 씹어먹어야겠다. 둘 중에 하난데 내가 결정 갖고 올테니까 기다려. 자꾸 알짱대면서 열받게 하면 내가 이 세계에서 말뚝 박는 거니까. 조용히 기다리라구.”

백사장은 감히 발작을 하지 못한다. 그 휘하들은 존경과 두려움을 담아 구씨를 배웅한다. 구씨는 본인 말대로 ‘진짜 무서운 놈’이었다.

자유로운 영혼 지현아(전혜진 분)의 말처럼 사랑하지 못할 이유 1000가지를 대라면 대고 사랑할 이유 1000가지를 대라면 댈 수 있는 게 사람이다.

구씨는 결정을 유보 중이다. ‘낯선 여자’ 염미정을 사랑할 작정을 하고 말까? 그래서 말 없어 편한 염제호와 자신이 건넨 외제차를 광적으로 영접한 염창희 등과 어울렁더울렁 한타령으로 살아볼까? 그렇게 여름은 갔다.

가을. 철새를 쫓아 빈 들을 달리는 구씨와 미정의 만면엔 웃음이 가득하다. 그들은 사랑을 하기로 작정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2022년 새해 첫 날. 클럽을 나선 구씨는 혼자다. 그 귓전으로 염미정의 독백이 들린다. “개새끼, 개새끼, 내가 만났던 놈들은 다 개새끼!”

눈내리는 새벽길을 걷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구씨, 구자경으로 돌아온 그의 무표정한 얼굴엔 무리에서 떨려난 짐승의 외로움이 배어있다.

10화의 말미를 봤을 때 결국 백사장이 실수했나 보다. 산포에 정착하기로 작정한 구씨를 자극한 모양이다. 얼쩡대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구씨의 주변 염미정과 그 가족들을 위협이라도 했나? 기어코 구씨를 긁어서 ‘구자경’이란 부스럼을 만들고야 만 모양새다.

그래서 구씨는 결국 과거의 구자경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한 걸까? 구씨를 통해 해방을 꿈꿨던 미정의 바람도 무산되고 말까? ‘나의 해방일지’ 흡인력 있는 드라마임엔 틀림없다.

/zaitung@osen.co.kr

[사진]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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