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9할을 배우로..故 강수연, 가장 반짝이는 별 [이슈&톡]

김지현 기자 2022. 5. 9.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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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브이데일리 김지현 기자] 한국 영화사에 족적을 남기고 떠난 이들이 모여 별이 된 곳이 있다면, 故(고) 강수연은 가장 높고 반짝이는 별일 것이다. 1969년 네 살에 데뷔, 인생의 9할을 배우라는 타이틀로 살았던 그. 비록 ‘할머니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았지만 우리는 안다. 그가 얼마나 아름다웠으며 치열했고, 위대한 여배우였는지를.

강수연이 지난 7일 오후 별세했다. 향년 55세. 빈소는 8일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그를 사랑했던 이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 영정 속 고인의 아름다움이 생생하게 다가와 더욱 허탈하다. 다시 봐도 타고난 배우의 얼굴 그 자체다. 강렬하고 호소력 짙은 깊은 눈매, 곧고 작은 입술. 여전히 아우라가 빛나는 여배우의 얼굴이다. 영정에서 생전 고인이 남겼던 필모그라피가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친다.

고인의 필모는 기쁨과 슬픔, 꿈과 영예가 교차했다.1970년 유신시대, 고 강수연은 암흑기를 맞은 한국 영화계에 ‘아역배우’라는 타이틀로 작은 발을 디뎠다. 매니지먼트 시스템은커녕 창작의 자유조자 없던 시절이다. 배우의 입지가 지금과는 전혀 달랐던 그 시절 여배우에게, 아역배우에게 가해졌을 혹독한 시련들을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인은 거친 황무지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꽃을 피워냈다.

고 강수연의 필모를 좇으면 한국 영화사를 넘어, 애처로운 한국사가 보인다. 고인의 공식 데뷔작은 동양방송 ‘똘똘이의 모험’(1971)으로 아이들이 새총으로 간첩을 잡는다는 내용의 드라마다. 강수연은 고사리 손으로 열심히 새총을 쏘며 간첩을 잡는 아이들 중 한 명으로 출연했다. 당시 표현의 자유를 억압받았던 한국 영화계가 주로 내놓은 작품들은 신파극이다. 강수연은 ‘어딘가에 엄마가’(1978), ‘하늘나라에서 온 편지’(1979) 등에 출연하며 관객들의 눈시울을 자극하는 역할을 했다.



어른들이 써준 극본에 충실했지만 아이는 영민했다. 여배우의 역할이 정통 캐릭터를 수호하거나 단순한 부속품마냥 취급되던 시절, 고 강수연은 아역배우에서 안정적인 청소년 연기자를 거쳐 성인 배우로 잡리 잡는데 성공한다. 타고난 배우의 얼굴과 연기력을 갖춘 강수연이라는 히로인은 당시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던 천재 감독들이 꿈꾸던 뮤즈의 전형이었다. 전작이 크게 흥행하며 모든 여배우들이 합류하길 꿈꿨던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2’(1985)은 강수연의 몫이었다. 배우 박중훈과 함께 한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1987)는 고인을 당대 최고의 명실상부 청춘 스타로 만들어 준 작품이다.

강수연이 빛나는 이유는 스타의 자리에만 연연하지 앉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여배우, 섹시 여배우라는 타이틀 유지하길 원했던 대중의 기대에 자신을 가두며 소모시키지 않았다. 연기에 목말랐던 강수연의 꿈에 날개를 달아 준 건 임권택 감독이다. 80년대 후반 연출력이 정점에 달했던 임 감독은 강수연을 자신의 페르소나로 삼았다.

1987년 ‘씨받이’가 개봉됐지만 한국 관객들은 파격적인 이 작품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진가는 해외 평단을 통해 발휘되기 시작했다. 강수연이 베니스국제영화제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이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충격에 가까운 일이었다. 한국 영화가 본선에 진출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인데 트로피까지 거머쥔 것이다. ‘동아시아 여배우 최초’였으니 해당 수상이 영화계에 어떤 센세이션을 일으켰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월드스타’라는 칭호도 이 때부터 시작됐지만 강수연은 안주하지 않았다. 1989년 작 ‘아제 아제 바라아제’에서 보여준 강수연의 도전은 ‘씨받이’ 만큼 강렬했다. 동시대에 활동한 여배우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삭발을 시도하며 비구니 역에 도전했다. 당시 관객들이 고인에게 원했던 이미지는 주로 섹시, 노출의 이미지였지만 여기서 또 한번 완벽히 비켜간 것이다.

90년대 여성 영화가 전무하던 시기, 강수연은 그 안에서도 홀로 빛났다. ‘베를린 리포트’(1991), ‘경마장 가는 길’(1991), '그대안의 블루'(1992), 출연하며 여성 영화, 여성 캐릭터가 펼칠 수 있는 기존의 한계를 깨고 영역을 넓혀갔다.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에서 “언제부터 형사 검사가 내 아랫도리를 관리한거야?"라고 외치던 강수연의 모습은 신선한 여전히 눈 앞에 선하다.

특히 '베를린 리포트'를 통해서는 한국 여배우 최초로 억대 출연료를 받았다. 여전히 잔재하는 현상이지만 남자주인공 보다 덜 받아야 하는 여배우 출연료의 불문율을 일찌감치 깬 주인공이 바로 고 강수연이다. 여성을 내서워 영화가 제작될 수 있고, 상업적인 성공 역시 거둘 수 있다는 사례를 그 누구 보다 많이 남겼다. 후배 여배우들이 강수연을 로망으로 꿈꾸는 이유다.

한 시대를 풍미한 강수연은 2000년대부터 작품 출연을 자제했다.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주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한국 영화를 지켰다. 하지만 ‘다이빙 벨’ 파문을 겪었던 부산국제영화제 공동집행위원장(2015)을 맡으면서 여러 부침을 겪은 것으로 전해진다. 최근에는 연상호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정이’를 통해 현 세대와 만날 계획이었지만 본격적인 소통을 눈 앞에 두고 먼 곳으로 떠났다.

“우리가 가오가 없지 돈이 없냐”. 생전 고인의 즐겨하던 말이 다시 회자 중이다. 영화 '베테랑'의 모티브가 돼 이제 흔한 농담으로 쓰이는 말이지만, 고인의 인생을 돌이켜보니 꽤 무게가 있는 말이다. 고 강수연의 인생이 그랬다. 인기, 명예에 연연하기 보다 늘 새로운 도전을 꿈꿨던 자존심 있는 고집이, 영화에 대한 사랑이 느껴지는 말 아닌가. 그 모든 것이 고인이 남긴 필모 안에 담겨있다.


[티브이데일리 김지현 기자 news@tv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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