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정권과 싸운 '저항시인' 김지하 별세

선명수 기자 2022. 5. 8.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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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후엔 '변절' 논란도

[경향신문]

1970년대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五賊)’ 등의 저항시를 남긴 시인 김지하씨(본명 김영일)가 8일 별세했다. 향년 81세. 고인은 최근 1년간 투병생활을 하다 이날 오후 강원 원주시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토지문화재단 관계자가 전했다. 김 시인과 함께 살던 가족들이 임종을 지킨 것으로 전해졌다.

고인은 1970년대 사회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한 시와 민주화운동으로 독재정권에 맞서온 대표적인 저항시인이었다. 1990년대 이후 ‘변절’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1941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9년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한 뒤 이듬해 4·19혁명에 참가했고,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남쪽 학생 대표로 활동하면서 학생운동에 참여하다 도피생활을 했다.

민주화 활동으로 옥고…‘타는 목마름’ 없는 하늘로 떠나다
시집 <못난 시들>과 에세이집 <방콕의 네트워크>를 출간한 2009년 5월 김지하 시인이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문석 기자

민청학련 사건 연루 사형선고
개발독재 풍자시 ‘오적’ 유명

1980년대 생명사상에 심취도
칼럼 ‘죽음의 굿판’ 비판 받아

1964년 6월 ‘서울대학교 6·3 한일굴욕회담반대 학생총연합회’ 활동 일환으로 서울대 문리대에서 열린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의 조사를 쓰는 등 학생운동을 벌이다 체포돼 4개월간 수감 생활을 했다. 1966년 8월 7년여 만에 대학을 졸업했다.

고인은 졸업 후 1969년 시 전문 문예지 ‘시인’에 ‘황톳길’ ‘비’ 등 다섯 편의 시를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저항시인의 길을 걸었다. ‘지하’는 필명으로, ‘지하에서 활동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등단 이듬해 ‘사상계’에 권력층의 부정부패를 판소리 가락으로 풍자한 담시(譚詩) ‘오적’을 발표하며 이름을 알렸다. 이 시에 등장하는 ‘오적’이란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 등 다섯 가지 유형으로 개발독재 시대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이들을 을사오적에 빗대 비판한 정치시이자 풍자시였다. 이 시로 인해 ‘사상계’ 발행인과 편집인이 구속됐고 잡지는 정간됐다. 이 시를 실었던 당시 야당인 신민당의 기관지 ‘민주전선’ 편집인 역시 구속됐다. 박정희 정권은 이 시가 “북괴의 선전활동에 동조”한 것이라며 반공법 위반 혐의로 김 시인 역시 구속했지만, 국내외의 활발한 구명운동에 힘입어 한 달여 만에 석방됐다.

1970년 12월 첫 시집 <황토>를 출간했다. 이후에도 고인은 민주화운동 및 저항시 발표에 전념했다. 1975년 발표한 ‘타는 목마름으로’는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담은 1970년대의 기념비적 저항시로 꼽힌다.

김 시인은 민주화운동으로 도피생활을 거듭하던 중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체포돼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사형이 구형되자 장 폴 사르트르, 놈 촘스키 등 세계적 석학들이 석방을 요구하는 호소문에 서명하는 등 활발한 구명운동이 일었다. 1975년 2월 형집행정지 처분으로 약 10개월 만에 출옥했지만 출소 후 인혁당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폭로하는 칼럼을 발표했고, 다시 체포돼 수감됐다. 결국 약 7년간 수감생활을 한 끝에 1980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7년 가까이 옥살이를 하는 동안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는 ‘제3세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로터스상 특별상을 김 시인에게 수여했다. 1984년 사면 복권 후 그의 저작들도 해금되면서 1970년대 작품들이 다시 간행됐다.

1970년대 반독재 투쟁을 벌이며 저항시를 발표했던 고인은 1980년대 생명사상에 심취했고 그의 작품세계 역시 변화했다. 1986년 생명사상과 민족 서정을 결합한 시집 <애린>을 발표했고, 1988년 수운 최제우의 삶과 죽음을 다룬 장시 ‘이 가문 날에 비구름’을 펴냈다. 1990년대 이후 펴낸 시집 <중심의 괴로움>(1994)과 <화개>(2002), 회고록 <흰 그늘의 길>(2003) 등도 작품세계 변화를 보여주는 저작들이다.

1990년대 초반 김 시인이 조선일보에 게재한 칼럼으로 ‘변절 논란’을 빚기도 했다. 김 시인은 1991년 명지대 학생이던 강경대군 치사 사건 이후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대학생들의 분신 자살이 이어지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제목의 칼럼을 써 거센 비판을 받았다. 이 일로 그의 구명운동이 계기가 돼 결성됐던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에서도 제명됐다. 10년 뒤 ‘실천문학’ 여름호 대담에서 칼럼과 관련해 사과의 뜻을 표명했으나 이후에도 민주화운동에 함께했던 문학계 인사 등을 매도하고 비판하는 등 혼란스러운 행보를 보였다. 고인은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를 공개 지지하기도 했다. 2018년 시집 <흰 그늘>과 산문집 <우주생명학>을 마지막으로 절필을 선언했다.

고인은 1973년 소설가 박경리의 딸 김영주씨와 결혼했으며, 유족으로는 아들 김원보(작가)·김세희(토지문화재단 이사장 겸 토지문화관 관장)씨 등이 있다. 빈소는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될 예정이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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