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건국신화 다시 읽기(2)

임기환 2022. 5. 5.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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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148] 현재 전하고 있는 고구려 건국신화 중에서 414년에 건립된 광개토왕비문의 것을 제외하고 가장 이른 시기 자료는 중국 역사서 <위서(魏書)> 고려전에 기록된 건국신화다. <위서>는 북제(北齊) 때에 위수(魏收)라는 인물이 554년에 편찬한 역사서로서, 열전 고구려전에는 그 이전의 역사서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자료가 많이 들어있다. 고구려 건국신화 및 관등, 영역 관련 기술이 대표적이다. 아마도 435년 고구려에 방문한 이오(李敖)라는 북위 사신이 수집한 자료에 근거하였다고 추정한다.

그렇다면 광개토왕비문에 기록된 건국신화와 불과 20여 년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시점이다. 따라서 나름 풍부한 내용을 전하고 있는 <위서>의 건국신화는 매우 간략하게 기록한 광개토왕비문의 건국신화를 보완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그래서 독자들께는 다소 낯설 수 있지만, 고구려 건국신화를 이해하는 데에는 빼놓을 수 없는 자료이기 때문에, 다소 장황하더라도 그대로 인용해 본다. 처음 접하시는 분은 찬찬히 읽어보시는 게 좋을 듯하다.

(1) 고구려는 부여(夫餘)에서 나왔다. 스스로 말하기를 선조는 주몽(朱蒙)이라고 하였다.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녀(河伯女)인데, 부여왕에 의해 방안에 갇히게 되었다. 햇빛이 비치자 몸을 피하였지만 햇빛이 따라왔다. 얼마 후 잉태하여 알을 하나 낳았는데, 크기가 닷 되들이 만하였다. 부여왕이 그 알을 버려 개에게 주었으나 먹지 않았고, 돼지에게 주었으나 먹지 않았다. 길에다 버렸으나 소와 말들이 피하였다. 들에 버리자 새들이 깃털로 그 알을 감싸주었다. 부여왕이 그 알을 쪼개려 하였으나 깨뜨릴 수 없어, 마침내 그 어미에게 돌려주었다. 어미는 물건으로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다. 드디어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다. 그가 자라자 이름을 주몽이라고 하였는데, 부여 말로 주몽이란 활을 잘 쏜다는 뜻이다.

(2) 부여인들이 주몽은 사람의 소생이 아니고 장차 딴 뜻을 품을 것이라며 그를 없애고자 청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 그에게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은 매양 몰래 시험하여 좋은 말과 나쁜 말이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준마는 먹이를 줄여 마르게 하고, 둔한 말은 잘 길러 살찌게 하였다. 부여왕이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마른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그 뒤에 들에서 사냥할 때 주몽에게는 활을 잘 쏜다고 하여 한 개의 화살만 주었다. 그러나 주몽은 비록 화살은 적었지만 잡은 짐승은 매우 많았다. 부여의 신하들이 또 주몽을 죽이려고 하자 주몽 어머니가 알아차렸다. 그녀는 주몽에게 말하기를 "나라에서 너를 해치려 한다. 너에게는 재주와 지략이 있으니 사방 멀리 떠나거라" 하였다.

(3) 주몽은 오인(烏引)·오위(烏違) 등 두 사람과 함께 부여를 떠나 동남쪽으로 도망하였다. 도중에 큰 강을 만났는데, 건너려 해도 다리가 없었다. 부여인들의 추격은 매우 급박하였다. 주몽이 물에 고하기를 "나는 태양의 아들[日子]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하는데 추격하는 병사가 거의 쫓아오니, 어찌하면 건널 수 있을까?"라고 하였다. 이때 물고기와 자라가 함께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주몽이 건넌 뒤 물고기와 자라는 금방 흩어져 추격하는 기병들은 건너지 못하였다.

(4) 주몽이 보술수(普述水)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났다. 한 사람은 삼베옷(麻衣)을 입고, 한 사람은 중옷(納衣)을 입고, 한 사람은 마름옷(水藻衣)를 입고 있었다. 주몽은 그들과 더불어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러 그곳에 거주하였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고 하고 이로 인해 성(姓)을 삼았다. ,

(5) 처음에 주몽이 부여에 있었을 때 부인이 임신 중이었다. 주몽이 떠난 뒤 아들을 낳으니, 처음에 이름을 여해(閭諧)라고 하였다. 자라서 주몽이 왕이 되었음을 알고, 그의 어머니와 함께 도망왔다. 그의 이름을 여달(閭達)이라 부르고, 나라의 일을 맡겼다. 주몽이 죽자 여달이 왕이 되었다. 여달이 죽자 아들 여율(如栗)이 뒤를 이었고, 여율이 죽자 아들 막래(莫來)가 왕이 되었다. 막래가 부여를 정벌하여 부여가 크게 패배하여 마침내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위 인용문을 읽어보신 분들은 매우 낯익은 내용이라고 생각하실 게다. 우리가 흔히 접하게 되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주몽 건국신화와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다. 사실 <위서> 고구려전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두 건국 전승 기사를 비교해 보면 문장까지 일치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아마도 고구려본기를 편찬할 때에 <위서>의 건국전승 기사를 주되게 많이 참조하였던 게 아닌가 싶다.

물론 고구려본기에 수록된 전승은 <구삼국사> 등 다른 자료에 의해 보충된 내용이 많아서 훨씬 풍부하다. 예를 들어 위 <위서>의 전승에는 보이지 않지만, 고구려본기의 전승에는 첫머리에 해부루와 금와왕 등 동부여 관련 전승을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구삼국사>에 의거한 것이다. 여기서 <구삼국사>라는 역사서는 이규보가 지은 서사시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를 가리킨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아서, <동명왕편>에 인용된 부분만으로 그 책의 성격을 대략 짐작할 뿐이다.

또 고구려본기의 전승에는 하백녀 유화가 금와왕과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구삼국사>에도 보이지 않는 내용이라 아마도 다른 기록에 의거한 듯하다. 위 <위서>의 전승에서는 유화라는 이름은 물론 금와왕이나 해모수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고, 단지 하백녀, 부여왕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고구려본기의 전승에는 주몽의 라이벌 격인 인물로 금와왕의 큰아들 대소가 등장하는데, 위 <위서>의 전승에는 단지 부여인이라고만 기술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고구려본기의 전승은 금와왕, 하백녀 유화, 주몽, 대소 등 등장인물의 이름이 나타나고 이에 따라 개개인의 캐릭터가 나름 부각되고 있어, 상대적으로 건조한 <위서>의 전승과 비교된다. 두 기록 사이에 상당수 문장이 일치하고 내용 구성이 유사하더라도, 등장인물의 이름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내러티브로서 차이가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야기성이 풍부한 고구려본기의 전승이 <위서>의 전승보다 후대에 나타났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북위 사신 이오(李敖)가 풍부한 내용의 전승을 간략하게 기록하였을 수도 있고, 혹은 <위서> 편찬자인 위수(魏收)가 여러 인명을 생략하고 주몽만 부각시켜 정리하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위 전승에서 주몽이 부여에서 탈출할 때 함께한 인물인 오인(烏引)·오위(烏違)라는 이름을 기록한 것으로 보아, 전승 상에서 주요한 등장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하백녀, 부여왕 등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생략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위서>의 건국신화는 아마도 장수왕대에 유통되던 전승이 북위에 전달되어 <위서>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광개토왕비문>의 전승과 같은 시기라는 점을 고려하면, 비문에서 매우 축약한 건국전승의 원형에 가까운 자료로 볼 수 있다.

그러면 광개토왕비문의 전승과 위 <위서>의 전승을 비교하면서, 주몽신화의 기본 골격을 살펴보자. 우선 지난 회에 인용했던 광개토왕비문의 내용을 다시 환기해보자. 즉 "시조 추모왕이 북부여에서 나왔는데, 천제(天帝)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딸[河伯女郞]로서 알에서 태어났으며, (중략) 남쪽으로 내려올 때 엄리대수(奄利大水)를 만났으나 (중략) 갈대와 거북이 다리를 만들어 건너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즉 짤막한 문장이지만 주몽신화의 핵심 요소가 모두 담겨 있으니, 위 <위서>의 인용문과 비교해 보시기 바란다.

부여의 중심지로 비정되는 중국 길림시 송화강 풍경. 주몽이 부여를 탈출하여 건넜다는 엄리대수는 송화강 지류쯤 될지 모르겠다. /사진=바이두

가장 이른 시기의 전승을 전하고 있는 이 두 기록을 통해 주몽신화에서 핵심적인 모티브를 찾아보면, 우선 천제[日子]와 하백녀의 혈통이라는 점, 알에서 태어난 난생이라는 점, 남하할 때 엄리대수[大水]를 만나 신이한 혈통으로서의 권능을 발휘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모티브와 관련하여 부여의 동명(東明)신화가 주목된다.

가장 이른 시기의 중국 측 문헌인 <논형(論衡)> 길험편(吉驗編)에 수록되어 있는 동명신화를 인용해 보겠다. 앞서 주몽신화의 내용과 비교하면서 읽어보시기 바란다.

(가) 북쪽 오랑캐[北夷] 탁리국왕의 시녀가 임신하였다. 그래서 왕이 그녀를 죽이고자 하였다. 시녀가 말하기를 "달걀 같은 기운이 하늘로부터 저에게 내려와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나) 그 후에 아들을 낳았는데, 왕이 돼지우리에 버렸으나, 돼지들이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구간으로 옮겨 말에 깔려 죽게 했으나, 말도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다. 왕은 하늘의 아들이 아닐까 의심하여 어미에게 아이를 거두어 종처럼 천하게 기르도록 하였다. 이름을 동명(東明)이라고 하고, 말을 기르게 명하였다. 동명은 활을 잘 쏘았는데, 왕은 동명에게 나라를 빼앗길까 봐 두려워하여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다) '동명'이 달아나 남쪽으로 엄호수에 이르렀다. 활로 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이내 흩어져서, 쫓던 병사들은 건널 수가 없었다. 동명은 도읍을 정하고 부여의 왕이 되었다. 그런 까닭에 북쪽 오랑캐 땅[北夷]에 부여국이 생겨났다.

<논형>은 중국 후한(後漢) 때 사상가 왕충(王充)의 저서로서, 여기에 실린 동명신화는 늦어도 1세기 말 무렵에는 채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국지> 부여전에도 동명신화가 전하는데, 내용상 위의 인용문과 거의 같다. 탁리국과 엄호수 등 국명과 지명이 다소 다른데, 그것도 거의 비슷한 글자라서 동일한 자료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 동명신화를 <위서>의 주몽신화와 비교하면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녀인데, 동명의 어머니는 탁리국왕의 시녀라는 점, 주몽은 난생(卵生)이지만 동명은 태생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동명신화에서 "달걀 같은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점에서 주몽신화의 태양과 난생적 요소가 함께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이 외에는 이야기의 서사 구조와 내용 요소는 판에 박은 듯 동일하다. 말과 돼지가 동명을 보호했다거나, 활을 잘 쏘았다는 능력, 남하 때 엄호수에서 자라와 거북이 다리를 만들었다는 점 등은 같은 이야기이다. 두 전승을 전하는 기록의 시기 차이를 고려하면 고구려 주몽신화가 부여 동명신화를 베꼈다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다만 신화의 내러티브라는 측면에서 보면 후대에 등장한 주몽신화가 동명신화보다 훨씬 다채롭고 풍부한 이야기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진전된 형태임은 분명하다

이처럼 유사한 주몽신화와 동명신화의 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4세기 무렵에 고구려가 동명신화를 차용하여 자신의 시조 주몽신화를 구성했다는 견해이다. 다른 하나는 동명신화는 부여족들 사이에 공유되는 공통 신화로서 고구려 왕실 역시 부여족의 일파이기 때문에 동명신화와 같은 시조 신화가 일찍부터 형성되었다는 견해이다. 이 두 견해는 주몽신화의 형성 시점이나 과정에서 큰 차이가 있다.

어느 견해가 옳다고 단정하기 어렵지만, 필자는 후자 견해에 동의한다. 왜냐하면 시조 건국신화는 왕실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한참 뒤인 4세기에 성립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또한 고구려에서는 3세기 중반에 제천의례로서 동맹(東盟)제를 지냈는데, 이 동맹은 시조인 동명(東明)과 통한다. 아마도 동맹제 때에 동명 건국신화가 재현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주몽의 탄생부터 남하까지의 과정을 담은 이야기가 부여족들이 갖고 있는 동명신화의 모티브에서 유래된 것이라면, 적어도 주몽 전승에서 고구려 건국 이전에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해봐야 부여족의 일파가 고구려 지역으로 남하했다는 사실 정도일 뿐이다.

그런데 건국신화나 시조전승은 역사적 '사실'을 내세우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건국의 정당성을 위해 훨씬 신비스럽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점점 더 풍성하게 꾸미게 마련이다. 광개토왕비문과 <위서>의 주몽 건국신화가 원형에 가까운 것이라고 한다면, 해모수설화나 해부루설화가 추가된 주몽신화는 좀 더 후대에 신화를 더 신화답게 만드는 과정에서 나타났을 것이다.

고구려가 성장하고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건국신화도 점점 풍부해지고 화려한 내러티브를 갖추게 된다. 이는 천손(天孫)이 다스리는 국가라는 자부심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국신화도 고정된 모습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변해가는 양상을 읽어내야 고구려인의 심성에 좀 더 다가가게 된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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