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등대가 말했다.. "당신, 부디 무사히 지나가시라"
<8>소설가 김인숙
대한제국 때 세워진 호미곶등대
"멈추라는 경고 아닌 간절한 기도
검은 바다 표면 쓰다듬듯 밝혀"
위로 가며 좁아지는 외관도 일품
밤의 등대에 갔다. 등대에 간다는 것은 등대를 바라보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등대가 보는 곳을 같이 보기 위해서일까 궁금해하며. 등대에 불이 켜지는 순간 알았다. 등대에 간다는 것은 등대의 불빛이 닿는 곳을 보는 것인데, 그러한데, 그 먼 불빛의 끝은 잡을 수도 닿을 수도 없는 곳이라는 것을.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등대로’에서 렘지씨와 그의 아들 제임스가 등대에 이르기까지는 10년이 걸린다. 그동안 누군가는 죽고, 집은 허물어지고, 세계는 전쟁을 겪었다. 그토록 많은 소멸을 뒤로한 채 마침내 등대에 이른 렘지씨가 하는 말 “우리는 죽었노라. 제각기 홀로.”
에드거 앨런 포도 ‘등대’라는 소설을 남겼다. 일기식으로 기록된 이 소설의 나흘째 일기는 공백이다. 작가는 소설을 죽을 때까지 끝맺지 못했다. 혹은 안 했다.
닿을 수 없는 것의 이미지, 문학 작품 속의 등대는 그러하다. 그러나 나는 밤의 등대에 이르렀고, 거의 수직으로 솟은 여섯 층 108계단을 올라 등대가 보는 것을 같이 보았다. 등대의 불빛이 규칙적으로 검은 바다의 표면을 쓰다듬듯 밝힌다. 배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바다에서 솟아오른 손이 빛에 드러났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잠기곤 한다. ‘상생의 손’이라 이름 붙은 이 거대한 조형물은 뭔가를 권하는 손으로도 보이고 반면 뭔가를 거머쥐려는 손으로도 보인다. 그 손을 바라보는 마음에 따라 그러할 것인데, 밤의 등대에 오른 내 마음은 문득 애잔하기도 까닭 없이 서럽기도 하여 그 손이 거머쥐려는 손으로 보인다. 밤이 지나면 달라져 있을까.
호미곶 등대의 첫인상은 아름다움이다. 위로 가면서 부드럽게 좁아지는 등대의 선은 모서리의 예각과 만나 그 부드러움이 더욱 강조된다. 그 부드러움을 온통 흰색이 감싸고 있다. 하얀 등대 위에서 쏟아져 나오는 불빛은 뜻밖에 눈을 찌르듯 강렬하지도 않고, 살이 델 듯 뜨겁지도 않다. 그토록 큰 렌즈로 그토록 먼 바다를 비추는데, 시작부터 끝까지 은은하기만 하다. 등대의 불빛은 멈추라고 경고하는 불빛이 아니다. 지나가라고 비추는 불빛이다. 무사히 잘 지나가라고.
등대에서 보내는 내 하룻밤도 그렇게 지나간다. 등대의 불빛은 네 줄기였다가 세 줄기로 바뀌고 다시 네 줄기로 돌아온다. 그렇게 끝없이 반복된다. 불빛이 인가 쪽으로 향하면 꺼졌다가 바다 쪽으로 돌아와 다시 켜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등대 마을 사람들의 밤 역시 잘 지나간다.
밤은 정적 속에서 흐른다. 파도 소리 들리는 정적은 아무 소리 없는 고요보다 훨씬 깊다. 기도 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등대의 선이 기도하는 손처럼 생겨서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그 손끝에 올라 서서 고작 잘 지나가기를 기도하고 있으나,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간절한 기도가 잘 지나가기를 바라는 일이라는 것도 안다.
밤이 지나도 달라진 것은 없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등대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등대의 내부를 둘러볼 여유가 생긴다. 가파른 계단을, 나는 올라갈 때와는 다르게 가파르지 않게 내려온다. 청동 장식의 계단, 세월을 고스란히 묻힌 나무 바닥, 창문 틀과 틈새 하나까지 전부 바라본다. 이 등대는 온 정성을 다해 만들어진 게 틀림없다. 등대 안이 이렇게까지 아름다울 일인가 여기는 순간, 이 등대가 올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내려오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거라는 걸 알겠다. 잘 내려가라고 말이다.
1908년에 세워진 이 등대는 역사를 품고 있다. 그간 호미곶 앞바다에서 침몰한 일본 배에 대한 보상으로 세워졌다고 알려져 왔으나, 최근에는 대한제국 정부가 독자적으로 건립을 추진했다는 사료가 발견됐다. 등대에는 대한제국의 상징인 오얏 꽃 무늬가 층마다 그려져 있다. 제국은 소멸했고 그 후의 역사는 슬픔으로 가득 찼으나, 등대의 꽃은 100년 이상을 살아남아 이제는 아름다워졌다. 호미곶 등대의 불빛에서는 오얏 꽃이 같이 비칠 터이니 이 등대가 비추는 것은 역사이기도 하다.
등대를 나서며 등대의 문을 한번 더 바라본다. 초록색 작은 현판에 쓰인 글씨는 거두절미 ‘등탑’. 새벽의 등탑을 떠난다. 잘 지나간 하룻밤은 잘 지나갈 또 다른 날의 시작이기도 할 터이니, 그러할 터이니, 여기며. /김인숙 소설가
☞소설가 김인숙은?
1983년 약관의 나이 스무 살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했다. 등단작은 단편소설 ‘상실의 계절’. 대산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오영수문학상 등을 받았다. 2010년에 동인문학상을 받았고, 2019년 동인상 종신 심사위원이 됐다. ‘79~80 겨울에서 봄 사이’ ‘먼 길’ 등 여러 장편과 소설집을 활발히 써왔다.
◇호미곶 등대는…
해돋이 명소로 알려진 한반도 최동단 경북 포항 호미곶에 자리 잡은 이 등대는 1908년 12월 20일 첫 점등 후 110년 넘게 바닷길을 밝혀왔다. 역사적·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항로표지협회 ‘올해의 세계등대유산’으로 선정됐다. 아시아 최초다.
26.4m 높이 6층 구조로, 대한제국 왕실이 고용한 영국인 등대 건축가 존 레지널드 하딩이 설계했고, 올라갈수록 날렵하게 비상하는 형태의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을 살렸다. 붉은 벽돌로 쌓아 올렸지만 콘크리트와 석회로 마감해 외관은 순백색이다. 날씨가 좋을 땐 일몰이나 일출색이 등대 외벽을 도화지처럼 물들인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1층부터 6층까지 각 천장에 새겨진 오얏 꽃 무늬다. 대한제국의 상징인 오얏 꽃을 감상하며 등탑 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게 한 108계단 층계는 불교 ‘108배’에서 땄다. 계단 반대쪽 벽면 속에는 ‘추 통로’가 숨어 있다. 지금은 전자식이지만, 과거엔 등탑 조명에 밧줄로 연결한 무거운 추를 이 통로로 1층까지 늘어뜨렸다. 그 속도에 따라 천천히 불빛이 돌게 한 것이다. /윤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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