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흑인 여배우는 왜 삭발할 수밖에 없었나

임지영 기자 2022. 4. 18.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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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흑인 여자는 생머리로 남 앞에 서느니 벌거벗고 거리를 뛰는 편을 택할 것이다. 생머리로 돌아다니는 것은 프로답지 못하고, 세련되지 않고, 어찌 됐건 빌어먹을 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3월27일 배우 제이다 핑킷 스미스가 아카데미 시상식 후 열린 파티에 참석하고 있다. 남편 윌 스미스는 아카데미 시상식 도중 아내의 삭발 머리를 농담 소재로 삼은 크리스 록의 뺨을 때렸다.ⓒREUTERS

2022년 아카데미 시상식은 3관왕의 〈코다〉보다 ‘윌 스미스의 주먹’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그가 아내의 삭발 머리를 농담의 소재로 삼은 코미디언 크리스 록의 뺨을 때린 데 대한 여파가 이어지고 있다. 부적절한 행동에 대해 견해가 엇갈리지만 여기서는 농담의 대상이 된 배우 제이다 핑킷 스미스에 관해 다뤄보려고 한다. 흑인과 흑인 여성의 모발, 그리고 농담의 맥락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제이다 핑킷 스미스는 2018년 ‘페이스북 와치’ 토크쇼에서 탈모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처음에는 끔찍했다. 어느 날 샤워를 하다 손에 머리카락이 한 움큼 남아 있었는데, 내가 대머리가 되는 건가? 생각했다.” 지난해 12월에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삭발을 결정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머리를 손으로 짚으며 더는 숨기기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배우이자 여성으로서 쉽지 않은 결정을 공개한 데 대해 지지를 받았다.

많은 흑인 여성이 탈모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타고난 곱슬머리를 ‘보기 좋게’ 만들기 위해 어릴 때부터 화학제품을 활용해 매끄럽게 펴거나, 땋은 머리를 하거나, 본드로 가발을 이어 붙이는 등 장시간 머리카락에 부담을 주는 일상을 영위하기 때문이다. 나이지리아 출신의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가 쓴 소설 〈아메리카나〉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어떤 흑인 여자들은 생머리로 남 앞에 서느니 차라리 벌거벗고 거리를 뛰는 편을 택할 것이다. 생머리로 돌아다니는 것은 프로답지 못하고, 세련되지 않고, 뭐 어찌 됐건 빌어먹을 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3월18일 미국 연방 하원은 개인의 모발이나 헤어스타일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자연 모발을 존중하는 열린 세상 만들기’ 법안으로 크라운(CROWN)이라는 약자로도 부른다. 헤어스타일로 인해 취업과 교육의 기회를 제한당하는 일을 막기 위해 만들었다. 주로 흑인들에게 벌어졌던 일이다. 앞서 2019년 캘리포니아주에서 처음으로 크라운법이 만들어졌다.

같은 해 뉴욕시도 헤어스타일로 차별할 경우 25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당시 뉴욕시 인권위원회는 헤어스타일에 대한 편견이 흑인들로 하여금 머리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게 한다고 밝혔다. 과도한 머리 시술이 탈모를 일으키고, 두피에 손상을 입힐 뿐 아니라 자궁섬유낭종 등 흑인 여성의 건강 문제로까지 이어진다고 지적했다.

법안 제정의 배경에는 건강 문제뿐만 아니라 모발을 둘러싼 일상적 차별이 있다. 흑인의 대표적 헤어스타일로는 여러 가닥의 머리카락을 촘촘하게 땋은 콘로, 풍성하고 둥근 곱슬머리를 그대로 노출하는 아프로, 레게 머리라고도 불리는 드레드록 등이 있다. 드레드록의 어원 자체가 노예제 당시 흑인의 머리가 ‘끔찍하다(dreadful)’고 한 데서 비롯됐다고 알려져 있다. 차별은 직장과 학교, 경기장을 가리지 않는다. 2010년 체스터티 존스라는 여성은 한 회사의 면접에서 땋은 머리카락을 자르면 채용하겠다는 말을 들었다. 미국 고용평등위원회(EEOC)가 그를 대신해 회사에 소송을 걸었지만 패소했다. 하나의 사례일 뿐 흑인 노동자들이 머리카락에 대한 차별을 주장하며 제기한 소송이 수십 년간 이어졌다.

원래의 곱슬머리 공개한 미셸 오바마

2018년 8월 플로리다주에서 드레드록 머리로 등교한 학생이 귀가 조치를 당했고, 2019년 뉴저지에서는 레슬링 경기를 앞두고 한 고등학생의 머리카락이 잘려나갔다. 백인 심판에게 가위질당하는 영상이 공개되자 인종차별 논란이 일었다. 2019년 미국의 다문화 마케팅 회사 ‘조이 콜렉티브’가 25~64세 흑인 여성과 백인 여성 각각 1000명에게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흑인 여성이 머리카락 때문에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백인 여성에 비해 1.5배 더 높았다. 일하려면 자연 상태의 머리를 바꿔야 한다는 말에 흑인 여성의 80%가 동의했다.

흑인 모발의 역사에 관해 다룬 책 〈머리카락 이야기(Hair Story)〉에는 “머리카락을 보면 한 사람의 정체성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라는 말이 나온다. 먼 과거 아프리카에서는 헤어스타일을 통해 지위, 재산, 직업 등을 알 수 있었다. 1700년대 노예제 사회에서 모발은 감추거나 밀어버려야 할 대상이 됐다. 흑인 여성은 머리를 천으로 감쌌다. 19세기 말에는 곱슬머리를 펴는 빗이 발명되었다. 백인 여성의 곧게 뻗은 직모가 미의 기준이 되면서 곱슬머리를 펴기 위해 열기구와 화학제품이 동원되었다.

곱슬머리 그대로 풍성하게 기르는 아프로 헤어스타일은 1960년대 흑인 해방운동의 상징이기도 했다. 흑인들이 자연 머리를 긍정한 최초의 움직임이다. 슬로건은 ‘블랙도 아름답다(Black Is Beautiful)’. 1980~90년대 들어 다소 주춤했던 ‘머리 해방’ 움직임이 2000년대 들어 다시 점화되었다. 머리카락을 둘러싼 미국의 역사와 정치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내 곱슬머리의 뿌리(My Nappy Roots)〉도 화제를 모았다. 2009년에는 흑인 여성의 머리카락을 소재로 한 영화 〈굿 헤어〉가 나왔다. 이번에 윌 스미스에게 뺨을 맞은 크리스 록이 기획과 각본에 참여했다.

여성들 스스로도 목소리를 냈다. 미셸 오바마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퇴임 후, 잡지 화보를 통해 처음으로 원래의 곱슬머리를 공개했다. 아이아나 프레슬리 민주당 하원의원은 땋은 머리를 한 채 국회에 입성했다. 최근에는 흑인의 머리를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도 만들어지고 있다. 2018년 공개된 〈어느 날 인생이 엉켰다〉에는 남자친구보다 일찍 일어나 새벽부터 머리를 펴는 여성이 나온다. 1989년을 배경으로 하는 〈배드헤어〉는 시작부터 화학제품을 잘못 써서 두피에 화상을 입는 끔찍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VJ를 꿈꾸는 애나에게 상사는 말한다. “이 건물의 어느 층에서 면접을 보든 그 곱슬머리로는 1차 탈락이야.”

2020년에는 흑인 여성 최초로 백만장자가 된 마담 C. J. 워커의 실화를 담은 〈셀프 메이드:마담 C. J. 워커〉가 공개됐다. 여성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미국 프로풋볼(NFL)의 쿼터백 콜린 캐퍼닉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콜린:흑과 백의 인생〉에서는 그의 인생 첫 콘로 헤어스타일 도전기가 나온다. 결국 그 머리로는 경기에 참여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땋은 머리를 푼다. 위협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인종화된 몸의 역사에 관한 책 〈낙인찍힌 몸〉의 저자 염운옥은 “눈에 보이는 ‘외모’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혈통’과 ‘지성’을 상상하고 우열을 매기는 데서 인종주의가 출발한다”라고 말한다. ‘머리카락이라는 외모’의 역사가 바로 그렇다. 이것이 시상식에서 농담을 듣고 얼굴을 찌푸렸던 제이다 핑킷 스미스를 둘러싼 길고 긴 이야기다.

임지영 기자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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