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렁이는 '풀결' 위 봄꽃 피어나듯 천진난만 '오월의 소녀' 붓칠하다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2022. 4. 17.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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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피어나는..
빈 출생 클림트, 장식미술 대가로 명성
부친·남동생 사망.. '사랑'서 불안 묘사
세기말 몽환적 표현.. 고대 양식 등 탐구
금박 재료 활용 '키스' 등 황금기 맞기도
당대 외설 관점 벗어나 인체 표현 초점
성스럽거나 외설적인 여성상 화폭 담아
클림트가 그린 여성 드로잉. 이 드로잉은 상반신을그렸지만 그의 많은 드로잉들은 파격적인 하반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젊은 여인의 반신 모습(Half-figure of a Young Woman)’(1918)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제공
#구스타프 클림트, 오래된 도시의 예술가

오스트리아 빈은 20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도(古都)다. 긴 시간에 걸쳐 이룬 문화적 풍요로움으로 유명하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는 이 풍요로움 속에서도 미술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화가다. 클림트는 1862년 빈 근교 바움가르텐의 한 평범한 가정에서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보헤미아 이민자인 아버지는 금세공, 판화 작업 등을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어린 클림트는 벌이가 부족하고 넉넉하지 못한 가정환경에 우울과 슬픔을 느꼈다. 그런데도 기쁨이 있었다면 그가 아버지의 손재주를 물려받았다는 것이었다.

클림트는 14살의 나이에 빈 국립응용미술학교에 진학했다. 손으로 만드는 공예 장식과 회화 교육을 받았다. 졸업한 이후 함께 학교에 다닌 동생 에른스트(Ernst), 친구 마슈(Franz Matsch)와 공방을 차렸다. 공방은 공공건물 벽화 작업을 자주 수임 받았고 운영에 커다란 문제가 없었다. 국립극장, 미술사박물관 등에도 장식화를 그리며 장식미술의 대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9년 차 되는 해에는 구(舊) 시립극장의 관객석을 장식, 그 섬세함을 인정받아 황제상을 받았다. 이어서 뮌헨 대학교와 빈 대학교의 명예 회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성공 가도를 걷던 중 가족 구성원들이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와 동생 에른스트가 몇 달 간격으로 사망했다. 힘든 시간을 같이 버티고 이제 막 행복한 일상을 맞이한 터라 충격이 컸다. 정신적 동요가 일었고 그 무엇도 할 수 없어 손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한 치 앞을 모르는 것이 삶이라는 걸 깨달은 것은 3년이 지난 뒤였다. 비극을 경험하고 겨우 그려낸 작품의 제목은 ‘사랑(Love)’(1895)이다. 제목만 들으면 낭만을 상상하게 하는 이 그림의 가운데엔 키스하는 연인이 있다. 그 뒤로는 그들을 질투하는 인물들이 보이는데 행복 속 불안을 의인화했다.

클림트는 다시 창작열에 불탔고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다. 1900년을 십여년 앞둔 당시의 세기말적 분위기를 몽환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당대의 미술에서 벗어나 고대 그리스와 이집트 등 변방의 미술 양식을 가지고 실험했다. 모자이크 타일 같은 구조적인 문양과 납작한 평면의 모습은 모두 여기서 왔다. 진실의 여신 베리타스 등 신화 속 인물을 그림에 등장시켜 대상에도 변화를 줬다. 원근법에 기초한 기존의 아카데믹한 회화는 사라지고 온전히 새로운 것으로만 그의 화면은 채워졌다.

새로운 시대를 앞두고 새로운 미술을 하려는 의지는 그에게만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왕립 미술아카데미 회원이었던 그는 새로움을 지향하는 미술인들과 함께 아카데미를 탈퇴했다. ‘빈 분리파’라고 불리는 오스트리아 미술가 조합을 설립해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화가 에곤 실레(Egon Schiele), 건축가 오토 바그너(Otto Wagner) 등 신진 예술가들이 참여해 힘을 실었다. 빈 분리파는 아카데믹한 미술에서 벗어나 미술과 삶의 교류를 추구하며 자유로운 표현 활동을 목표로 삼았다. 삶 속 도구를 만드는 공예를 예술과 잇고 작품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려 했다.

하지만 클림트는 어느 순간 빈 분리파가 본래의 취지를 잃어가는 것을 느꼈다. 낙담한 그는 초대 회장을 맡을 정도로 애정했던 빈 분리파를 탈퇴했다. 혼자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야 할 상황에 맞닥뜨렸는데 이는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 어떤 의견도 제재도 없는 작업실에서 그는 자기 작업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재료로 금박을 사용하기 시작하며 ‘황금시대’로 불리는 작업의 시기를 맞았다. 그는 과거 ‘팔라스 아테네(Pallas Athene)’(1898)와 ‘유디트 I(Judith I)’(1901)에서도 금박을 사용했다. 다만 이때는 금박이 작은 부분에서 보였다면 이제 금박이 화면 전면을 채우며 신비로움을 더했다. 대중에도 널리 알려진 ‘키스(Kiss)’(1907∼1908)도 이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빛나는 화면이 황금시대의 전형을 보여준다.

황금시대를 거친 뒤 그의 작품은 신비로운 것과 정신적인 것에 초점을 맞췄다. 그림은 더 화려해졌고 신화 속 인물을 등장시키면서 시작한 상징주의도 더 강해졌다. 쉬지 않고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지만 1918년 1월 갑작스럽게 뇌출혈로 쓰러졌다. 2월이 된 뒤 합병증으로 56세의 나이에 숨을 거뒀다. 합병증을 유발한 원인은 다름 아니라 당시 유행하던 스페인 독감이었다. 그는 코로나19가 발발한 뒤 ‘팬데믹으로 목숨을 잃은 예술가’로 자주 언급되기도 했다.
‘세레나 퓰리처 레더러의 초상(Serena Pulitzer Lederer)’(1899)
#클림트가 그린 꽃과 소녀

클림트는 공방을 연 이후 평생 프로페셔널한 전업 예술가로 살았다. 하지만 그런 예술가로서의 삶이 자유로울 수 없도록 발목을 잡는 것이 있었다. 바로 직접적인 누드와 성의 표현이었다. 이는 그를 비판의 대상으로 만들기도 했다. 빈 분리파로 명성을 떨치던 시기 빈 대학과의 사이에 일어난 일은 잘 알려져 있다. 빈 대학은 클림트에게 학교 건물 천장을 장식할 세 점의 그림을 의뢰했다. 클림트는 ‘철학’ ‘의학’ ‘법학’ 연작을 그려 삶의 운명과 부조리를 표현했다. 문제가 된 것은 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임산부를 포함한 사람들을 나체로 그린 부분이었다. 학교는 그림이 외설적이라며 거부했고 오랜 시간 공들인 작품은 전시 기회를 잃었다.

누구보다 누드와 에로틱한 장면을 자주 그린 그는 인체 표현에 능했다. 역사상 여성을 가장 잘 표현한 화가로 손꼽히는 이유는 여기서 온다. 자화상을 한 점도 남기지 않은 이유를 묻는 말에 다음 같이 답하기도 했다. “나는 회화의 대상으로서 나 자신에 전혀 관심이 없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 특히 여성에 관심이 있고, 그보다 다른 형태에 대한 관심이 더 많다.” 그의 앞에 수많은 여성 모델들이 섰고 말년에는 여성에 초점을 맞춘 대형 작업 프로젝트를 펼쳤다.

클림트가 여성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매우 이분법적으로 나뉜다. 성스럽게 느끼거나 또는 외설적으로 느낄 때 여성을 그림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의뢰받은 초상화를 종종 그렸는데 이 경우에는 성스러움에 가깝게 여성을 그렸다. ‘세레나 퓰리처 레더러의 초상(Serena Pulitzer Lederer)’(1899) ‘헤르미네 갈리아의 초상(Portrait of Hermine Gallia)’(1904) ‘프리차 리들러의 초상(Portrait of Fritza Riedler)’(1906) 등이 대표적이다. 그림 속에서 이들은 공통으로 모두 순백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다.
‘매다 프리마베시(Mada Primavesi)’(1912-13)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제공
‘메다 프리마베시(Mada Primavesi)’(1912∼1913)는 클림트가 그린 소녀의 초상화다. 신비로운 연보라빛을 배경으로 꽃 그림들이 그려졌다. 꽃무늬 벽지로 볼 수 있지만 쏟아지는 꽃들은 마치 꽃비 같다. 바닥에는 초록빛 풀결이 일렁이고 그 위를 분홍색 새들이 거니는 듯하다. 장난감이 쏟아진 하얀 카펫 위에는 더 하얀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서 있다. 정면을 응시하는 소녀의 얼굴이 말갛고 볼은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그런데도 소녀는 연약한 존재로 느껴지지 않는다. 뒷짐을 진 자신감 있는 포즈와 정면을 응시하는 당당한 시선 때문이다. 생기 있는 눈빛은 얼굴을 흐리지 않고 분명하고 또렷하게 밝힌다.

프리마베시는 은행가이자 기업가로 유명한 오토 프리마베시(Otto Primavesi)와 오이게니아(Eugenia)의 딸이다. 프리마베시와 유지나는 진보적인 비엔나 예술과 디자인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컬렉터로 알려졌다. 클림트는 프리마베시의 초상화를 위해 여러 장의 스케치를 그리며 포즈, 의상, 배경을 실험해 공들였다. 스케치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적용해 배경에 봄날과 관계한 꽃, 새 등 다양한 패턴을 그렸다. 클림트는 ‘메다 프리마베시’ 이후 여성과 꽃을 뒤섞는 새로운 표현 방식을 선보이기도 했다.

클림트가 그린 9살 소녀는 풋풋함과 이제 곧 피어날 준비를 마친 당당함을 모두 가진 오월의 모습처럼 보인다. 한 해의 시작은 분명 1월인데 항상 봄이 돼야 기지개를 켜고 피어날 마음가짐을 하게 된다. 그래서 지금은 피어나는 시간이다.

김한들 미술이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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