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제자 스타로 키웠더니, 날 떠난다네요"..마초 스승의 결정은 [씨네프레소]
박창영 2022. 4. 9. 19:03
*주의 : 이 기사에는 영화의 전개 방향을 추측할 수 있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씨네프레소-29]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
친구와 어떻게 친해졌는지 그 계기를 기억해 내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같은 학급으로 배치받았거나, 회사에 함께 다녔거나, 다른 친구의 소개로 만나거나 했을 텐데, 정확히 언제 무슨 일로 가까워졌는지는 떠올리기 만만치 않은 경우가 다수다. 친구를 사귄다는 건 연인을 만나는 것과는 완전히 달라서 고백을 하고 받아들여지거나, '우리 오늘부터 1일이다'라고 확인하는 과정이 없어서일지 모른다. 대부분의 친구는 내가 인지하지도 못한 가운데 삶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인생의 중요한 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반면, 친구가 떠나는 순간은 그와 어떻게 친해졌는지보다 떠올리기가 수월한 편이다. 상대방이 전학을 가거나 이직을 하고, 서로를 실망시킬 만한 사건이 계기가 돼 큰 싸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친구에게 '오늘부터 친구 하자'라고 얘기하는 경우는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곤 드물어도, '오늘부터 놀지 말자'고 절교 선언을 하는 경우는 꽤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인간적으로 큰 배신을 느낄 수 있다. 그와의 관계가 끊어짐으로 인해서 그에게 내줬던 내 마음의 공간까지 도려내지는 기분을 받기 때문이다.

"여자 안 가르친다"던 마초, 여제자 받아 스타로 키우다
오늘 소개할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의 주인공 프랭키 던(클린트 이스트우드)은 그런 면에서 좀 억울할 것 같다. 복싱 트레이너인 그는 여제자는 절대 안 받는다는 주의이지만, 매기 피츠제럴드(힐러리 스왱크)가 계속 사정하는 통에, 그녀를 가르치고 마음을 내준다. 하지만, 어느 날 큰 스타로 성장한 제자는 그를 떠나겠다고 통보한다. 그로서는 "왜 마음이 없는 나를 졸라서 제자가 된 뒤 나를 떠나겠다고 하느냐"라는 제자를 향한 원망이 생길 것이고, 동시에 "나는 왜 더 모질지가 못해서 그에게 인생의 소중한 시간을 내주고 말았는가"라는 후회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는 낡은 체육관을 운영하며 복싱 선수를 키우는 프랭키에게 어느 날 매기가 찾아오며 시작된다. 여자 제자를 절대 받지 않는 프랭키는 매기를 계속 외면한다. 어쩌면 자신의 실제 딸과 맺고 있는 소원한 관계를 자꾸 떠오르게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기는 계속해서 체육관에 찾아와 연습을 하고, 프랭키는 어느 순간부터 그가 눈에 밟힌다. 그가 갑자기 마음의 빗장을 내리는 건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는 아니다. 매기는 프랭키가 밀어내도 계속 언저리를 맴돌며, 그의 마음 한 쪽에 자리 잡은 것이다.

서른두 살인 매기는 신인으로 데뷔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다. 하지만 타고난 운동 신경과 근면함으로 빠르게 성장한다. 경기를 거듭할수록 둘은 가까워진다. 가족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듣지 못하면서도 계속 그들을 위해 송금하는 매기를 프랭키는 안쓰럽게 여기고, 딸에게 매주 편지를 쓰면서도 답장 한 번 못 받는 프랭키를 매기는 가엾게 생각한다. 호적상의 가족이 둘에게 못해주는 것들 즉, 좋아하는 음식을 나눠 먹고, 속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을 그들은 서로에게 해준다. 프랭키는 매기에게 '모쿠슈라'라는 링네임(복싱 선수가 경기장에서 쓰는 이름)을 붙여준다.

"모쿠슈라" 환호 받던 제자, 반칙으로 전신이 마비되다
팬들은 "모쿠슈라"라고 환호하며 그녀를 응원한다. 여기까지 봤을 때, 이 작품은 전형적인 스포츠 영화의 전개를 따른다. 초심자가 은둔 고수를 사사하고, 고생 끝에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성공 스토리 말이다. 그러나 감독은 애써 쌓아올린 서사를 단 한 번의 펀치로 무너뜨린다. 더티 플레이로 유명한 상대방과 대전하던 도중 매기는 반칙을 당하고, 의자에 목을 부딪혀 목 아래로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전신마비가 된다. 가난해도 본인의 두 주먹으로 살아가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살던 매기는, 병상에 누워 남의 도움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 절망감을 느낀다.

가족이 그녀를 돌보지 않을 때, 프랭키는 매기의 병상 옆에 앉아 시간을 함께 보내준다. 그녀의 욕창을 관리해주고, 다리를 자른 모습도 묵묵히 바라봐준다. 그러나 놀이공원에서 신나게 놀다 온 가족은 그녀에게 재산 전부를 넘긴다는 서류에 사인을 해주길 요구한다. 손을 못 쓰는 그녀를 위해 '친절하게' 입에 볼펜을 물려준다. 이름뿐인 가족과 결별한 뒤, 진정한 가족으로 남은 프랭키에게 매기는 부탁한다. 자신이 세상을 떠날 수 있게 도와달라는 것이다.

인간에겐 죽음의 방식을 선택할 권리가 있을까
영화는 조력사를 어떻게 봐야 할지 지극히 개인적인 방식으로 질문한다. 이 작품은 제도적으로 안락사와 존엄사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는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대신, 가족과 떨어진 뒤 오랜만에 인간의 온기를 느껴봤을 프랭키의 시점에서 존엄사를 다룬다. 그는 처음부터 여자 제자를 받고 싶지 않았다. 그건 어쩌면 자신의 마음을 열어주고, 그로 인해서 상처받을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겠다는 의지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주위를 서성이다 삶의 한 가운데로 들어온 제자가 이제 자신을 떠나겠다고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이별을 완벽히 마무리 지을 집도의(執刀醫) 역할을 해달라고 그에게 요청하고 있다.

프랭키는 사랑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 직면했다. 사랑이란 상대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소망인 동시에, 상대가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마음이다. 그런데 상대방이 바라는 것이 이번 생을 존엄하게 마무리 짓는 것일 때, 나는 무엇을 해줘야 하는 것인가. 그녀가 죽는다면 상대와 함께 보내는 시간도 거기서 끝난다. 그러나 프랭키는 결국 제자가 바란 대로 삶을 끝낼 수 있게 도와주는데, 그건 바로 그가 들은 '응답' 때문이다.

그는 매주 성당을 찾아가 기도했지만, 신의 존재는 느낄 수 없었다. 매주 딸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신과 딸을 향한 기도와 속죄는 한차례도 응답받은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신이 말하는 사랑이 뭔지, 사회에서 말하는 가족애가 뭔지 정확히 모른다. 그러나 그와 함께 레몬파이를 나눠먹고, TV를 보며 시간을 함께 보내준 제자는 그에게 확실한 목소리로 응답한다. 내가 당신에게 원하는 한 가지는 내가 존엄하게 세상을 떠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그는 모든 추상적인 윤리를 던져버린 채 그녀의 목소리에 응답하는 게 사랑이라고 결론 내린다. 매기가 죽을 수 있게 도우며 프랭키가 말한다. "'모쿠슈라'는 '나의 소중한, 나의 혈육'이라는 뜻이야."

최근 프랑스의 유명 배우 알랭 들롱이 '조력사'를 결정했다는 뉴스로 떠들썩했다. 한국에서도 생을 존엄하게 마감할 권리에 대한 논의는 이미 시작됐다. 아마 사회적으로 조력사 또는 안락사를 허용해야 할지, 허용한다면 그 범위는 어디까지가 돼야 할지 논의할 의제가 많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결정할 땐, 존엄한 죽음을 원하는 당사자, 그리고 그 목소리를 가장 가까이에서 듣는 가족들의 의지가 잘 반영돼야 하지 않을까. 윤리와 철학, 종교를 논하기 전에 그것은 그들이 서로를 향한 사랑을 어떻게 완성 지을지를 결정하는 일이 될 테니 말이다.

장르: 드라마, 스포츠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출연: 클린트 이스트우드, 힐러리 스왱크, 모건 프리먼
평점: 왓챠피디아(3.8/5.0), 로튼토마토 토마토지수(90%), 팝콘지수(90%)
※2022년 4월 8일 기준
감상 가능한 곳: 네이버 시리즈온·웨이브·구글플레이·티빙·시즌(전부 단건 결제·1000~1540원)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출연: 클린트 이스트우드, 힐러리 스왱크, 모건 프리먼
평점: 왓챠피디아(3.8/5.0), 로튼토마토 토마토지수(90%), 팝콘지수(90%)
※2022년 4월 8일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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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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