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쉽] 러시아는 왜 학살을 반복하는가..우크라이나 '절멸'로 돌아서는 푸틴
부차, 모티딘, 보로댠카 등 이번에 러시아군의 학살로 인한 피해가 드러난 도시들은 우크라이나의 북쪽 국경, 수도 키이우 일대에 주로 위치하고 있다. 이 일대에서 수습된 시신은 4백 구를 넘어섰으며, 매일 추가로 시신이 발견되고 있어 전체 피해 규모는 아직 알 수 없다.
더해지는 야만성... '배신자'니까 다 죽이겠다는?
이번에 키이우 주변지역에서 드러난 러시아 군의 학살범죄는 침공 초창기의 민간인 대상 공격보다 더 악질적이다. 침공 초기에는 원거리에서 민간인시설- 방어군 관련시설 가릴 것 없이 포격 또는 폭격을 했다면, 이번엔 직접 사람을 잡아다 고문하고, 성폭행하고, 묶고, 총살한 것이다.
러시아 군은 왜 이런 학살을 저지를까. 처음 푸틴의 계획은 수도 키이우를 신속하게 점령해 우크라이나 지도부를 제거하고 친러 정부를 세우는 것이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군이 저항하지 못할 것으로 오판했을 뿐 아니라, 일단 자신의 군대가 국경만 넘으면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환영해 줄 것으로 믿었다. 국경을 넘어온 러시아 부대들이 2~3일치 보급밖에 받지 못했던 것이 그 증거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강력한 저항을 당한 러시아군은 엄청난 전력 손실을 봤다. 이제 푸틴은 "내 것이 될 수 없다면 누구의 것도 될 수 없어. 차라리 죽여버리겠어!" 라고 외치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치정살인극의 남성캐릭터 같은 상태가 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 기사] 푸틴은 어쩌다 '푸틀러'가 되었나
[ https://bit.ly/3i3vOCu ]
피오나 힐(Fiona Hil) 전 미국 백악관 고문은 서방에서 푸틴을 가장 잘 아는 전문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국가안보회의(NSC) 유럽·러시아 선임 국장을 지냈다. 20년간 푸틴을 연구했으며, 여섯 차례 푸틴을 대면한 경험이 있다. 그런 피오나 힐이 최근 영국 더 타임스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모스크바에 대한 '배신자'로 보고 응징 모드로 전환했으며, 우크라이나 장악이 아니라 절멸(annihilation, 깡그리 죽여 없앰)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절멸전쟁(war of annihilation, 독일어로는 Vernichtungskrieg)은 나치 독일이 2차대전 당시 소련을 침공했던 '독소전쟁'의 성격을 가리키는 말이다. 상대국에 어떤 정치적 어젠다를 강제한다든가 국경분쟁을 해결하는 정도를 넘어, 상대방 국가 또는 국민을 완전히 파괴해버리는 것을 목표로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무제한 전쟁을 말한다. 나치독일은 소련에 쳐들어가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하거나 독일로 끌고가 강제노동을 시켰다. 소련은 나치 독일과 맞서 싸우느라 전투원만 8백만명 이상, 민간인을 포함하면 2천만명에 이르는 국민을 잃었다. 괴물과 싸우면서 괴물을 닮는다는 말처럼, 소련은 독일 침략군을 밀어내고 베를린으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독일의 악행을 같은 악행으로 되갚았다.
쏘아 죽이는 것으로는 부족? 대량으로 굶겨 죽이기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총으로 학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규모로 굶겨 죽이려 한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우선은 남부의 전략거점 항구도시 마리우폴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그렇다. 러시아군은 2월말부터 지금까지 마리우폴을 포위공격하고 있다. 3월 중순 이후로는 식량과 식수, 의약품의 외부 공급도 사실상 끊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미 민간인 사망자가 5,000명을 넘었고 사회기반 시설 90% 이상이 파괴된 마리우폴 도시 전체를 말려죽일 심산인 것이다.
이번에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서 벌이는 짓들을 보면 '배고픔의 무기화' 의도가 엿보인다는 게 폴리티코의 분석이다. 전투와 상관없는 농토에 폐기물이나 지뢰를 묻어놓고 간다든지, 농기구, 농로 등 농업시설을 고의로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년같으면 한창 밭을 갈고 씨를 뿌려야 할 시기라서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유럽연합의 농업부문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야누시 보이치에호프스키 EU 집행위원도, 푸틴의 군대가 우크라이나에 굶주림을 창출하고 그것을 무기로 쓰려는 것이라고 현 상황을 해석했다.
습관처럼 반복되는 '학살의 도구화'
크렘린은 문제에 봉착하면 '다 죽여버리자'를 해법으로 채택하는 짓을 반복해 왔다. 외국에 대해서만 학살을 자행한 것도 아니다. 자국민도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1937~1938년 스탈린이 권력 강화를 위해 벌인 대(大)숙청(Great Purge)에서는 기록이 남은 처형 희생자만 68만 명이 넘는다. 수용소나 교화소에 갇혀 강제노동과 고문 등으로 고통받다 죽은 사람도 최소 13만여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이러한 대규모 숙청은 스탈린 치하 정치경찰로 악명이 높았던 NKVD(내무인민위원회)가 기획하고 집행했다.
소련 내의 여러 소수민족들도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그리스 출신자들에 대한 학살이다. 러시아의 기획·탐사 전문 월간지인 '소베르센노 세크레트노(SS)'는 2015년, NKVD가 1937-1938년 사이 그리스계 숙청작전을 벌여 2만2천여명을 총살했다고 보도했다. 그리스계가 소련 남부에서 해운, 무역, 농업 등에 종사하며 반혁명 스파이 활동에 연루됐다는 게 공산당이 내세운 이유였다.
카틴(Katyn)숲의 학살
1940년에는 폴란드에서 엄청난 규모의 학살을 자행했다. 이른바 '카틴(Katyn)학살' 또는 '카틴 숲 학살'로 불리는 일련의 학살 사건이다. 서구에선 이번 우크라이나에서 드러난 학살이 2차대전 당시의 카틴 학살을 연상시킨다는 보도가 많이 나왔다.
부차 학살과 판박이…2000년 체첸에서의 '자치스트카' 학살
당시 러시아군은 체첸 반군의 뿌리를 뽑겠다며 민간인 가정을 집집마다 뒤져 반군활동에 조금이라도 관여된 것으로 의심되는 남자들을 체포 또는 살해하는 자치스트카 작전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노약자나 여성에게도 총을 쏘거나, 공포에 질린 이들이 숨은 지하실에 수류탄을 던져넣어 수십 명을 살해하는 등의 전쟁범죄 행위를 잇따라 저질렀다.
당시의 학살범죄는 휴먼라이츠워치 등 인권단체들에 의해 외부세계에 알려져 국제적 공분을 일으켰고, 이후 서구에서는 '자치스트카'라는 말이 체첸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처럼 쓰이게 되었다.
러시아는 대체 왜 자꾸 이러는가
이런 여러 사례를 살피다 보면, 학살은 구소련부터 이어지는 러시아 핵심부의 집단적 기억 속에는 학살이 유용한 도구의 하나로 저장되어 있는것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나치 독일과 군국주의 일본도 20세기에 끔찍한 학살 범죄를 저질렀지만, 두 나라의 경우 전쟁에 패배하면서 제동이 걸렸다. 두 나라에서 학살을 포함한 비인도적 전쟁 정책을 주도한 인물들은 전범재판으로 처벌됐고, 국가는 이전 체제와의 단절을 강요당했다. 패전과 전후 재건에 따르는 고난의 시간을 겪으면서, 국민들은 지도자들의 전쟁범죄 명령을 무비판적으로 수행했거나 체제에 순응했던 과거에 대해 일단 반성의 계기를 가질 수 있었다.
반면 러시아는 패배를 통한 단절과 반성을 강요당한 적이 없다. 2차대전에서 소련은 나치독일을 꺾은 전승국이었으므로 2차대전중 소련이 벌인 학살은 단죄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냉전기에는 공산주의진영의 우두머리로서 세계의 절반을 호령한 슈퍼파워였고, 구소련연방이 해체된 이후에도 지배층은 사실상 그대로 이어졌으므로, 역시 단절과 반성의 계기는 없었다. 오히려 지금의 러시아는 소련 이전으로 퇴행하여 제정러시아를 지향하고 있는 판국이다.
푸틴의 지지율, 우크라이나 침공 후 오히려 높아져
1999년 6월부터 러시아 국민들의 푸틴의 지지율을 조사하고 있는 모스크바의 레바다 센터에 따르면, 푸틴의 활동을 지지한다는 응답은 지난해 여름(2021년 8월)만 해도 61%로 역대 최저 수준이었으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된 올해 2월 71%, 3월 83%로 급속히 올랐다. 푸틴 집권 20여년 사상 최고 수준에 근접하는 지지율이다. 반면 푸틴의 정책에 반대한다는 답변은 같은 기간 거의 대칭적으로 급격히 줄었다.
레바다 센터의 데니스 볼코프 국장은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될 때 러시아인들은 충격과 혼란을 느꼈으나 현재 국민들은 러시아가 서방 국가들로부터 포위돼 (공격과 비난을 받고 있으므로) 푸틴을 중심으로 결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내부에서 비판의 목소리를 내던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고 나라를 떠나는 중이다. 러시아 체제 안에서 반발이 일어나 푸틴이 권좌에서 내려오는 것을 전쟁 종식의 유일한 희망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에겐 암울한 현실이다.
푸틴의 러시아가 저지른 전쟁범죄를 법정에서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지만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희박하다.
[참고 기사] 푸틴을 전범으로 처벌하기 어려운 이유
[ https://bit.ly/3qDinOh ]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죄를 위한 노력은 시효 없이 계속되어야 한다. 전 인류적인 차원에서도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더욱 중요한 문제다. 김정은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구성: 이현식 D콘텐츠 제작위원 / 콘텐츠 디자인: 옥지수]
이현식 D콘텐츠 제작위원hyunsik@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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