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사람] '실세' 임종석이 뒤돌아 본 문재인 정부 5년

윤춘호(논설위원) 2022. 4. 9.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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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사태 때 국민에게 졌어야"

1. 권력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


권력을 잃은 사람들, 전쟁에서 패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지금 하산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불과 5년 전에는 천하를 차지한 듯 의기양양했던 사람들이다.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못지않게 나가는 사람들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회한과 아쉬움, 슬픔과 상실감, 권력 무상, 그리고 앞날에 대한 두려움도 있을 것이다. 자신들이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잘못한 건지, 왜 정권을 내주게 되었는지 복기하고 있을 테고 새로 정권을 잡은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듣기에 이만한 인물을 찾을 수는 없었다.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문재인 정부 초기 인사와 정책을 주도했다. 386세대의 상징적 인물이니 386 세대 용퇴론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테고 이 사람의 향후 행보도 궁금했다. 지난해 11월 한번 만나자는 제안을 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했다. 현 대통령 임기가 끝나면 모를까 아직은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할 수 없을 거 같다며 미뤘다. 지난 2월 초 다시 인터뷰 요청 문자를 보냈더니 대선 끝나고 새 정부 출범 전에 한번 시간을 내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잡은 날짜가 지난 3월 30일이었다. 이 사람이 초선 의원이던 2천년대 초반 출입기자와 취재원으로 인연을 맺었다.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지만 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셈이다. 선거 패배의 아픔이 크겠다는 말을 위로 삼아 던지자 상처 입은 지지자들이 걱정이지 자신은 괜찮다고 했다. 6년 만에 처음 만났는데 인사치레로라도 신수가 훤하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원래 검은 얼굴이 다소 꺼칠해 보였고 머리카락도 제법 희끗했다. 세월 탓도 있겠지만 선거 패배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평생 청년일 줄 알았는데 임종석의 얼굴에서도 세월이 느껴졌다.

2. 물거품이 된 '국민 통합' 약속


-문재인 정부가 이제 한 달여 남았는데 평가를 해보면 어떨까요? 성공했다, 아니면 실패했다, 아니면 만족한다?
"성공했다, 실패했다라는 식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맘때쯤 되면 다 아쉽죠. 문재인 대통령은 당신으로서는 최선을 다하셨다고 생각하고요. 그러나 문재인 정부에게 주어졌던 과제들이 다 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고요, 어쨌든 정무적 사건과 정책적 사건이 크게 사람들에게 실망과 아픔을 줬기 때문에 안타깝고 아쉽죠. 이쯤 됐는데 어떻게 만족스러울 수가 있겠습니까."

석고대죄를 청하는 죄인의 모습도 처연한 패배자의 얼굴도 아니었다. 가슴 치는 통회, 역부족이었다는 고백, 절절한 반성 같은 말은 드물었지만 이 사람의 꺼칠한 표정이 그것을 대신하는 듯싶었다. '더 잘할 수 있었는데'인 것이지 '왜 그렇게 못했을까' 쪽은 아니었다. 이 사람이 실망과 아픔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이쯤'이기 때문이다. 선거에서 패해 권력을 넘겨줘야 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을 지지했던 사람들에게 패배의 아픔을 주었다는 반성인 것인지 지난 5년이 잘못됐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대통령으로 취임하던 첫날 문재인은 야당 당사를 돌며 협치와 통합을 다짐했다. 그 약속은 아무리 봐도 지켜진 거 같지 않다. 문재인 정부 5년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은 더 찢어지고 갈라졌다. 전쟁 같던 지난 대선 과정이 그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가 더 분열되어 있고 그 정도가 더 커지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5년 동안 국민 통합의 계기를 마련하지 못했다는 비판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그런 측면을 보지 못했거나 통합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애국과 보훈이라는 기치를 내세워 대한민국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을 보살피고 최대한 예우하려고 노력했고 6.25 기념식에 민주화 유공자들을, 민주화 운동 기념식에 전쟁 유공자들을 부르는 방식으로 이념을 넘어선 정서적 통합을 시도했다. 김세연, 김성식, 이종훈 같은 야권 인사들을 내각에 기용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UAE 원전수주 문제로 MB의 뒷조사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을 때는 MB 비서실장이던 임태희에게 전화해 '어른께서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청와대 차원에서 적폐 청산을 구상하거나 정치 보복을 시도한 적은 단연코 없다고 했다. 정치부장이나 편집국장을 만날 수는 있지만 언론 사주를 만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 대통령을 대신해 보수적인 성향의 언론사주들을 만나 이해와 협조를 구하는 것도 이 사람 몫이었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노력으로는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에 대한민국의 분열은 훨씬 깊었다. 극성 지지자들만 보고 '질러 대는' 일부 정치인들이 있는 가운데 선거를 통해 위임받은 권력으로 제한된 시간, 제한된 조건에서 합리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일이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여야 협치와 관련해서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아쉬움을 숨기지 않았다. 야당 인사들을 자주 만날 것을 여러 차례 권유했지만 대통령은 그런 만남보다는 여, 야, 정 협의체 같은 제도화에 더 관심을 보였다. 제1야당 입장에서 보면 여러 야당 중의 하나 취급을 받는 그런 모임에 나가고 싶을 리 없었다. 대통령에게 건의해서 어렵게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였던 홍준표와 회동이 성사됐지만 1회성 만남으로 끝났다. 두 사람 모두 더 만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저는 이게 대통령님의 잘못이라기보다 정치적 이력에 의한 한계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기본적으로 그분은 국회 정치에 대한 불신이 있죠. 그것이 제가 대통령님에게 가장 아쉬운 점이에요. 진짜 이게 뭐라고 할 수가 없는데 그 점은 저도 정말 아쉬워요. 대통령께서 야당 지도부나 의원들과 공, 사석을 가리지 않고 만났으면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건 대통령의 스타일일 수 있으니까요."

지지자를 선동하는 게 정치의 목적은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지지를 얻어서 내가 대표성을 얻고자 하는 행위일 뿐이고, 대표로서 권한을 위임받은 이후 정치는 상대와 타협해서 결과물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5년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기적을 선사할 메시아를 기대하며 전쟁을 치르듯 하는 대통령제보다는 차라리 '덜 기대하고 덜 실망하는' 의원내각제도 생각해봐야 한다는 말은 국민통합이라는 과제가 그만큼 어렵다는 고백으로 들렸다.
 

3. 조국 사태- 국민에게 져야 할 때 지지 않았다


'조국 사태' 국면에서 자신이 경험한 것을 직설적으로, 격정적으로 이야기했다. 그 사건과 관련된 날짜는 물론 시간까지 정확하게 기억했다. 2019년 1월 청와대 비서실장을 사임하고 8개월쯤 지난 시점이었다.

"추석 연휴 때였는데 대통령께서 전화를 주셨어요. 제가 청와대 나오고 개인 폰으로 처음으로 주신 전화에요. 대통령께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그러시더라고요. 30분쯤 통화했을 겁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서 말렸습니다. 지금은 국민 여론을 들어주셔야 된다, 그리고 여당과 지지자들을 설득해야 된다, 늘 어려울 때마다 국민만 보고 가자고 하지 않으셨느냐… '잘 참고할게요' 그러시더라고요."

통화가 끝난 뒤 청와대 참모로부터 다음날 청와대로 들어올 수 있느냐는 전화를 받았다. 오후 세 시쯤 청와대에 가니 민주당에서 두 명, 그리고 자신과 김경수 지사를 부른 자리였다. 대통령이 김경수는 사정이 있어 참석하지 못하는 대신 '여기서 물러서야 한다, 한 발 더 나가면 정쟁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의견을 전해왔다며 참석자들의 의견을 물었다. 한 시간 반 정도 이야기를 하는데 당에서 온 두 명은 집요하고 강하게 조국 장관 임명을 요구했다.

-당에서 온 두 명은 대표와 원내대표였겠군요.
"아뇨. 그 두 분은 점심 때 총리와 함께 이미 하셨더라고요. 그 자리에서 이낙연 총리만 신중 내지 부정적인 의견을 내셨고 당 대표와 원내대표는 강하고 분명하게 공식적으로 임명을 요청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지금도 그 이야기는 한 마디도 안 하는 민주당 사람들에게 욕을 해주고 싶은데 누워서 침 뱉기라서 지금까지 말을 못 한 거예요. 문재인 대통령이 결심을 못 한 가장 큰 이유가 당의 이런 요구 때문이었어요."

청와대에서 나오면서 당이 이렇게 강하게 요구하면 대통령이 조국 장관을 임명할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국에게 전화를 했다.

지난 2018년 국회 운영위 출석한 임종석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국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 (사진=연합뉴스)


"지금 상황이 이러저러하다, 나로서는 이런 이유로 당신 임명에 반대했다. 그런데 대통령님은 당의 입장 때문에 당신을 시킬 수밖에 없을 거 같은데 이제 방법은 수석님이 그만두시는 거밖에 없는 거 같다. 여기서 멈춰야 가족을 지킨다, 그리고 여기서 멈추면 국민들이 또 좋은 사람 잃었다고 애석해 할 거다, 바보 노무현까지는 모르지만 전국적으로 '울지 마 조국' 부대가 당신을 지켜줄 거다. 별 이야기를 다 했어요."

조국은 장관 욕심 없다고 했다. 검찰 개혁안만 발표하고 자기 발로 걸어 나올 것이라고 했다. 그 시간이 길어야 한두 달일 거라고 했다. 임명되는 순간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진다고 했지만 조국은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대통령 개인 폰으로 문자까지 보냈지만 결국 조국 장관 임명은 강행되었다. 이 사람은 몸살을 앓았다고 했다. 자신이 청와대 안에 있었으면 별 짓을 다해서라도 말렸을 거지만 당이 저렇게 나왔으면 다른 의사 결정을 했을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윤석열이 조국 장관 임명을 강행하면 검찰총장직을 사퇴하겠다고 '겁박'한 사실도 있다고 했다.

-장관 임명을 강행하면 윤석열 총장이 사퇴하겠다고 했다는 겁니까.
"사임하겠다, 그렇게 했더라고요. 그것도 참 믿기 어려운 일인데 내부적으로 그런 일이 있었더라고요. 그런데 결국 사임은 안 하고 그때부터 정치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거죠. 울산 시장 사건, 원전 수사하면서 마음먹고 정치를 시작한 거라고 봐요."

민주당이 전형적인 '여의도 정치' 함정에 빠진 것이라고 했다. 국민은 보지 않고 상대방만 보고 정치를 하다 보니 채점자인 국민이 어떻게 점수를 매기고 있는지 못 봤다는 것이다. 상대방을 KO로 이기더라도 국민 채점표에는 지는 것으로 나올 수 있는 게 정치라는 게 이 사람 믿음이다.
 

4. 운명을 바꾼 문재인과의 만남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2012년 한명숙 대표 시절 사무총장을 맡았다. 이해찬과 문성근 등이 주축이 된 이른바 <혁신과 통합>과 공천 문제를 두고 갈등이 있었다. 급기야 이해찬이 이 사람을 사무총장에서 내보내지 않으면 탈당하겠다는 최후통첩성 편지를 한명숙 대표에게 보냈다. 이 편지를 한명숙에게 전달한 사람이 문재인이다. 결국 사무총장에서 물러났고 이 여파로 18대 공천권까지 반납했다. 이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시절이었다. 이때 일을 문재인은 두고두고 미안하게 생각했단다.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은 정무실장직을 맡아달라고 했지만 당내의 반발로 그것도 불발됐다. 문재인은 이 사람에게 마음이 빚이 있었던지 가끔 전화를 했고 일 년에 한두 번 두 사람만의 만남을 갖곤 했다. 박원순 계로 분류되던 이 사람에게 2016년 9월, 문재인이 캠프 비서실장을 맡아 달라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은 의심할 바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예스맨은 아니었다. 문재인은 좀처럼 먼저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인사를 할 때도 누구를 먼저 말하는 법이 거의 없었는데 대선 캠프 구성을 할 때 다소 뜻밖의 모습을 보였다. 손혜원을 홍보본부장으로, 정청래를 SNS 본부장으로 임명하라는 이야기였다. 문재인은 예전부터 두 사람과 약속을 한 내용이니 자신의 뜻대로 하라고 이야기했지만 이 사람은 그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문재인이 언짢은 표정을 숨기지 않았지만 자신이 손혜원과 정청래를 만나보겠다고 했다. 손혜원은 어렵지 않게 설득이 됐지만 정청래는 이미 후보와 이야기가 다 되었는데 왜 네가 나서느냐는 투였다. 정청래 대신 누구를 기용할 수 있는지 대안을 준비해서 문재인을 설득했다. 대안으로 제시한 인물이 동아일보 기자 출신으로 네이버 부사장으로 일하던 윤영찬이었다. 결국 문재인도 이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비문이면서 청와대 비서실장에 발탁된 게 우연이 아니었다. 늘 함박웃음 짓는 인상 좋은 순둥이처럼 보이지만 무서운 싸움꾼이다. 굴러온 돌이었고 단기필마였던 이 사람이 정권의 2인자가 된 것은 문재인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기 때문이지만 집요한 승부 근성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친문계 대주주 격인 노영민, 전해철 등과 목청 높여 싸운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대선 캠프 꾸릴 때 '부엉이 모임' 그분들은 자신들이 총괄본부장을 맡으려고 했어요. 그분들은 자신들이 대주주라고 생각하니까 제게는 잘 연락을 안 했어요. 제가 그분들 모이는 것을 알고 그 자리에 갔더니 총괄본부장직을 이야기하더라고요. 저도 워낙 직선적이거든요. '그 자리는 김영춘이나 송영길이 좋겠습니다' 그랬죠."

정치인에게 자리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욕망이 극적이면서도 일상적으로 드러나는 정치에서 살아남고 한 정권의 2인자라는 말을 듣는 자리까지 갔다면 이 사람의 권력 의지는 인정해야 한다.

이 사람이 실세라는 말을 들은 것은 때로는 대통령 뜻을 거스르는 일도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통령 이야기를 못 들어드린 것도 많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 조각 과정에서 법무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안경환의 사적인 문제가 드러나 청와대가 곤경에 처했다. 여론은 날이 갈수록 나빠졌지만 안경환 본인도, 대통령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대로 두고 볼 일이 아니라고 판단해서 청와대 실장, 수석회의를 열었다. 임명이 어렵다는 게 이 사람 생각이었고 참석자들의 의견도 비슷했다. 회의 결과를 안경환에게 민정수석 조국이 전달했고 안경환은 이 뜻을 전달받은 지 30분 만에 사퇴 의사를 밝혔다. 이 과정을 대통령에게 일체 보고하지 않았다. 대통령에게 보고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 나왔지만 그럴 거면 뭐 하러 회의를 하느냐며 모든 책임은 자기가 지겠다고 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대통령이 격노했다.

"그날 밤 10시가 넘었는데 송인배 부속실장한테 전화가 왔어요. '모두 들어 오시랍니다' 부랴부랴 관저로 갔더니 '어떻게 내게 한 마디 말도 없이 그럴 수가 있습니까' 대통령님이 그렇게 화난 모습은 처음이었어요. 손혜원, 정청래 때는 유도 아니었어요."

정무적 판단을 한 게 아니라 안경환 교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판단한 것이다, 죄송하다, 안 교수가 이렇게 빨리 사퇴할 줄 몰랐다고 이야기했다. 그래도 대통령의 화가 풀리지 않았다.

"대통령께서 한참을 아무 말씀 안 하시는데 그 침묵이 겁나 불편하더구만요. 시간이 얼마 지나 '와인 한잔들 하시겠습니까' 그러시더라고요. '고맙습니다' 그랬지요. 그런 일들이 많았어요. 듣자니 요즘 권성동 의원이 바른 소리 몇 번 하다가 당선인 눈 밖에 났다는데 저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그러면 누가 바른 말 할 수 있겠습니까."

대통령이 받아들이기 힘든 지시를 하면 일단 의논할 시간을 달라고 해서 뭉개고, 외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겠다며 뭉개고, 대통령 기분 살펴 가며 뭉갰다고 했다. 그렇게 시간이 가다 보면 대통령이 자신의 생각을 대개 수용했다는 것이다. 이낙연은 "임종석 실장은 대통령에게 듣기 싫은 이야기를 기분 나쁘지 않게 말하는 재주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대통령이 그런 상황을 불편하게 여기기도 했지만 그런 불편함 때문에 할 말을 주저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틀릴 수도 있고, 대통령께서도 확신하지 못할 수도 있고 대통령도 체면 때문에 어쩌지 못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 감이 저절로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참모가 아니라고 봅니다."

이 사람이 주도한 초기 내각과 청와대 인사에서 '부엉이 모임' 같은 원조 친문 인사들은 거의 배제됐다. 당 출신도 친문보다 비문 성향이 더 많았다. 대통령을 등에 업고 이 사람이 독주한다는 불만이 곳곳에서 나왔다. 원조 친문 인사들에게 임종석 비서실장이라는 존재가 껄끄러울 수 있었겠다는 말에 그랬을 것이라고 했다. 대선 캠프 구성 때부터 시작된 친문 직계들과 이 사람 사이의 긴장은 지난 5년 내내 계속되었다. 전해철 행안부 장관, 박범계 법무부 장관, 황희 문체부 장관 인사는 자신은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원조 친문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이고 이 사람이 청와대를 나온 이후에 기용된 사람들이다.

"대통령께 아쉬운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요… 첫째는 국회에 대한 것이고요, 두 번째는 잘 모르는 사람을 쓰는 것을 두려워해서 익숙한 사람을 쓰는 겁니다. 모르는 사람도 기용해서 쓰면 내 사람을 만들 수 있을 텐데…."

2019년 1월 비서실장에서 물러났다. 노영민이 자신의 후임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노영민은 마지막 비서실장을 하는 게 좋겠다는 게 이 사람 생각이었다. 비서실장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힌 이후부터 일이 잘 안 되더라고 했다. 자신의 후임 문제를 물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대통령도 후임에 대해 의견을 묻지 않았다. 내 책임은 여기까지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은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나온 이후에 청와대 의사 결정 구조가 폐쇄적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대통령이 각별히 아끼고 신임했던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이 사람이 대통령의 정치적 자산의 전부는 아니었다. 대통령에게는 여러 자루의 칼이 있었고 이 사람은 대통령이 가지고 있던 여러 자루의 칼 가운데 한 자루였다.
 

5. 부동산은 아픔, 외교 안보는 자랑


부동산 때문에 정권이 바뀌었다. 부동산 이야기가 나오자 인간의 욕망을 대하는 진보 진영의 태도에서부터 말을 시작했다.

"정치가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상황에서 사람들의 욕망을 함부로 다루는 것에 저는 반대합니다. 욕망을 대하는 태도는 진지하고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여기에 함부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욕망을 나쁜 것으로 취급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면서도 부동산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길었다. 과도한 의욕, 정치적 고집이란 말을 섞어 가며 부동산 정책의 실패 이유를 짚었다. 주무 책임자였던 김수현 수석을 정책실장으로 올리고 국토부 장관 김현미를 유임시킨 이유를 물었더니 "그건 솔직히 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다. 다만 김현미 입장에서는 청와대와 부딪히면서 자신의 소신대로 일하지 못했다는 억울함이 있을 거라고 했다. 소 잃고 외양간도 망가진 상태에서 나오는 이 사람 이야기는 들을 사람을 찾지 못한 넋두리처럼 들렸다. 부동산 문제에 관한 5년짜리 로드맵이 있었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정책을 하는 사람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데 왜 이렇게 정책이 흐트러졌는지 정말 모르겠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이 사람 얼굴을 보면서 부동산 문제로 문재인 청와대와 정부, 여당이 얼마나 당황하고 망연자실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청와대에 있는 동안 세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고 그 핵심에 이 사람이 있었다. 국정원장, 통일부 장관, 청와대 안보실장을 모두 제치고 남북 정상회담 추진위원장을 맡았다. 새로운 역사를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가는 생생한 느낌을 만끽했을 테고 여의도와 광화문에서 벌어지던 권력 싸움 정도는 꼬마들의 골목 싸움 같이 느껴졌을 것이다. 2018년 9월, 평양 5.1 경기장에서 문재인이 15만 명의 평양 시민들 앞에서 했던 연설문은 이 사람 작품이다.

평양 시민들에게 연설하는 문재인 대통령 (사진=평양사진공동취재단, 연합뉴스)


"며칠을 그 상황에 처해있는 대통령으로 빙의를 해봤어요. 첫 호칭을 어떻게 할지만 몇 시간을 생각한 거 같아요. '평양 시민 여러분, 북녘의 동포 형제 여러분' 아마 그러지 않았나 싶어요. 담당 비서관실에서도 준비하고 연설비서관실에서도 원고를 올렸는데 저는 제가 쓴 원고를 참고만 하시라고 드렸는데 가시기 전날 대통령님이 그러시대요. '그거는 임 실장 원고 그 내용 대부분 그대로 가기로 했습니다'"

외교, 안보 이슈에 대해 비화를 섞어가며 많은 이야기를 했고 남들이 가보지 못한 곳까지 가봤다는 자부심도 숨기지 않았지만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가 2017년 수준으로 돌아가버린 상황에서 이 사람 이야기가 다소 허망하게 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사람이 느끼는 허탈감이 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단다. 산의 8부 능선까지 올라가 마지막 봉우리를 눈앞에 두고 내려온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현 정부가 김정은과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눈 것은 차기 정부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남들이 가보지 않은 8부 능선에서 본 새로운 세상이 이 사람을 많이 변화시켰고 그것이 이 사람의 정치적 자산이 될 것은 틀림없다.
 

6. 386세대- 과잉 훈련되고 과잉 대표된 세대

전대협의장 시절 임수경 평양 축전 파견 발표 장면

'구국의 강철대오' 전대협 의장으로 학생 운동을 주도했다. 1989년, 33년 전 이야기다. 전국 방방곡곡에 10만 장이 넘는 수배 전단이 뿌려졌으니 홍안의 청년 시절부터 이미 유명인이었다. 3년 6개월의 수감 생활 후에 정치권으로 향한 것은 어찌 보면 예정된 일이었다. 우상호, 이인영, 오영식 등과 함께 김대중이 영입한 새로운 젊은 피의 상징이었다.
16대 총선 출마 포스터


2000년 16대 총선에서 민자당 4선 의원이자 두 차례나 장관을 역임한 이세기를 누르고 서울 성동에서 당선되었다. 불과 34살에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것보다 상대 후보에 대한 비난을 입에 담지 않고 이겼다는 것을 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16대에 이어 17대에 재선하면서 정치 역정은 순풍에 돛 단 듯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 상처 입은 짐승이 울부짖듯 통곡하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있는 모습이다. 국회의원을 두 번 했고 청와대 비서실장을 했으니 꽃길을 걸은 듯하지만 아픔도 적지 않다. 2008년 총선에서 낙선한 것을 포함해 세 차례 국회 도전에 실패했고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를 선고받긴 했지만 측근의 뇌물 사건에 연루돼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는 시련도 겪었다. 청와대 비서실장에서 물러난 뒤 21대 총선에서 서울 종로 출마를 노렸지만 결국 불발에 그쳤다. 청와대 비서실장을 그만둔 이후 대통령 특보 등의 직함을 갖고 있고 민간 차원의 남북 교류 일도 하고 있지만 좋게 말하면 자유인, 반쯤은 정치적 낭인 신세다.

이 사람에게 임종석과 그들의 시대는 흘러간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덤덤한 표정으로 대체로 동의한다고 했다. 자신들은 '과잉 훈련되고 과잉 대표된 세대'였고 너무 많고, 너무 오래 했고 그로 인한 사회적 부작용이 명백하다는 것이다. 다만 386 정치 엘리트들을 무능하고 위선적이고 자리만 탐하는 집단으로 매도하는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전 세대와 비교를 하고 다음 세대에 역할을 넘겨줘야 한다는 이야기는 100번이라도 받아들이지만 이 세대를 싸잡아서 기득권에 찌들고 무능하고 이념에 사로잡혀서 공부는 안 하고 국정 운영 능력은 없으면서 욕심만 많다는 그런 식의 비판도 아닌 비난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 세대가 욕심이 많아서 정치권에만 들어차 있는 게 아니라 사회 모든 영역에 이 세대가 한 10년 있다가 이제 서서히 밀려 나가는 시점 아닌가요."

반려견 마고와의 망중한


2019년 제도권 정치를 그만두겠다고 발표했지만 2020년 총선 지원 유세, 그리고 올해 대선을 거치면서 사실상 정치 일선으로 돌아온 이 사람에게 서울시장 선거에 나설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당으로부터 역할을 요구받으면 그럴 생각이 있다고 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상처를 받는다면 그것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했다. 앞으로 할 일이 있으면 뒤로 물러서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뻘밭에서 배를 밀고 가는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배를 수리하면서 물이 들어오면 그때 노 저어 나가겠다는 것이다. 나갈 때인지 기다릴 때인지를 판단하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인데 지금은 기다릴 시간이라고 했다. 등산을 할 때 처음은 본인의 체력과 의지가 중요하지만 7부 능선부터는 날씨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했다.

이제 대한민국의 수준이 높아져 정치가 크게 망치지만 않으면 된다고 믿고 정치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예전처럼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권력 정치를 남보다 잘 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도 아니다. 연명하듯 정치를 할 생각도, 남에게 구걸하며 정치를 할 생각도 없다. 다만 김영춘처럼 완전히 정치에서 발을 빼는 것을 망설이는 것은 한반도의 운명은 남북 문제에 달렸고 이 분야에서는 대한민국에 기여할 부분이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대학 시절 산행 중

자연의 계절은 봄날이지만 이 사람에게 올봄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이 사람이 설 정치적 자리가 좁고, 시간이 간다고 더 나아질 거 같지 않다.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책임을 묻는 목소리가 더 커질 수 있고 386세대 용퇴론은 끊임없이 제기될 것이다. 훈장 같던 386이라는 말은 이제 무거운 짐이 되었고 그 짐은 시간이 갈수록 무거워질 것이다. 이 사람의 정치적 자산은 많이 낡았고 그 시효마저 다해가고 있다. 누구의 어깨에 기대기에는 정치적 체급이 너무 커졌다. 문재인의 그늘 안에서 한 편이었지만 친문 정치인들과는 결을 달리 하는 사람이다. 민주당의 새로운 주류로 떠오르고 있는 이재명에 대해서는 당내 경선 과정에서 분명하게 날을 세웠다. 386 학생 운동 그룹은 이미 몇 갈래로 갈라진 지 오래다. 자연으로 돌아가 잊힌 사람이 되고 싶다는 문재인이 이 사람의 정치적 후견인 역할을 할 거 같지도 않다.
 

7. 나만의 언어, 나만의 철학을 갖고 싶다

(사진=임종석 전 비서실장 페이스북 캡처, 연합뉴스)

지난해 서울시장 보궐 선거를 앞두고 SNS에 '박원순은 정말 그렇게 몹쓸 사람이었나'라는 글을 올렸다. 박원순의 잘못은 하나의 잘못이지만 그거 하나로 박원순을 평가하는 것은 지나치고 서울시장 보궐 선거라면 박원순이 추진했던 것들에 대한 평가는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박원순을 언급하는 것이 곧 2차 가해라는 것은 좀 과하고 제가 그 피해자를 언급한 것도 아니고요. 박원순이 비판받을 대목이 많이 있지만 그가 강조한 안전, 환경, 인간 친화적 정책 같은 가치들이 있는데 그런 것에 대한 평가는 하지 않고 선거를 치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박원순 시장 8년에 대한 글을 시리즈로 쓰고 싶었는데 후보나 캠프에서 원하지 않아서 멈춘 거죠. 첫 글의 제목이 좀 거칠었던가 보죠."

박원순에 대한 글도 그렇지만 같은 진영에 있는 사람들에게 욕 먹을 이야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한다. 언론사 문제에 청와대가 개입하지 않았더니 조직화된 세력이 편집권은 물론 경영권까지 장악하는 것을 보면서 저것이 바람직한 모습인지 아쉬웠다는 이야기나 민주노총이 더 이상 약자가 아니라는 말도 그렇다. 2004년 국가보안법 폐지가 여권에서 대세이던 시절 폐지가 아닌 개정을 주장했다가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고 한미 FTA 협정 체결에 찬성했다가 돌팔매를 맞았다. 무모하다 싶을 만큼 거침없이 자기 이야기를 했다. 나의 철학과 가치관을 분명하게 밝히고 그런 생각이 유권자들에게 받아들여지면 나의 꿈을 열어보는 것이고 아니면 접겠다는 각오인 것이다.

윤석열 당선인이 추진하는 대통령 집무실 이전 계획에 대해 충분히 검토할 수 있지만 이렇게는 아니라는 취지로 비판했다. 당신이 5년 전에 그 입장이었으니 새 정부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제 입장에서는 그 정도면 충분히 옹호한 것 아닐까 싶은데 어쨌든 비난은 안 했어요. 글의 행간에도 비난의 뜻을 담지 않으려고 되게 노력했어요. 저는 이렇게 무리하지만 않으면 얼마든지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도 집무실 이전 추진했고 저 개인적으로는 세종이 더 낫다고 보지만 용산도 좋다고 생각해요. 다만 추진위 구성하고 충분히 준비해서 가라는 거거든요. 서두르다가 반드시 사고 나거든요."

점심을 겸해 시작한 자리는 오후 다섯 시가 다 돼서 마무리가 됐다. 이 사람의 만 56년 인생을 두루 살펴보고 싶었는데 대화는 문재인 정부 출범 전후에 벌어졌던 권력 내부 이야기에 집중되었다. 이 사람이 겪은 이야기는 정가 비화 정도로 치부하기에는 아직 생생하다. 뉴스로서 시효가 여전히 남아있는 이야기들이 수두룩했다.

못보던 몇년 사이에 한층 무거워지고 깊어졌다. 예전에 내가 알던 사람인가 싶을 정도였다. 자기만의 언어를 구사하고 자기만의 철학을 갖고 싶어 했다. 다른 세상을 본 사람에게는 다른 세상을 설명하는 언어가 필요하다. 권력의 이면을 본 것만이 아니라 한반도의 운명, 7천만 한민족의 운명을 결정하는 과정에 깊숙하게 개입했다. 그런 경험들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장삼이사들의 언어, 그 이상이 필요한 것이다. 자신의 개인적 고민에서 철학적인 부분까지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다는 말은 그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 아닌가 싶다. 아무리 봐도 이 사람의 정치적 기상도는 당분간 흐림이다. 실세라는 말을 들었던 적지 않은 정치인들이 7부 능선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잊혀지고 사라진 것처럼 이 사람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 자기만의 언어, 자기만의 철학을 가지려는 욕구는 7부 능선 이상을 오르겠다는 의지의 표현인데 욕망을 갖는 것과 그 욕망을 실현하는 것 사이에는 언제나 심연이 있다. 그 심연을 이 사람이 어떻게 건널지 지켜볼 일이다.

윤춘호(논설위원)spring84@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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