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에 맞서 이기고 싶다면, '더 진실해져라'

세계적인 스릴러 작가 요 네스뵈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관한 글을 〈시사IN〉에 보내왔다. 노르웨이의 작가이자 뮤지션, 저널리스트 그리고 경제학자인 그의 대표작으로는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가 있다. 유리열쇠상과 리버튼상, 페르귄트상 등을 수상하며 북유럽 문학의 인기를 견인한 그의 작품은 40개 국가에서 4000만 부 이상 팔렸다. 작가는 서사를 둘러싼 전쟁의 관점에서 이번 사태를 진단한다. 이 글은 덴마크의 일간지 〈비켄다비센(Weekendavisen)〉에도 실렸다.
‘마약중독자와 신나치주의자들’에게 핍박받는 민중을 구원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는 블라디미르 푸틴의 서사가 통했다. 러시아에서는! 하지만 푸틴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목소리를 모두 차단해버렸다. 진정한 전쟁터는 바로 여기, ‘서사’에 있는 것이 아닐까. 진실이 무너진 시대에 이야기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2015년, TV 시리즈물인 〈점령(Occupied)〉의 시즌 1이 노르웨이에서 방영되었다. 러시아가 노르웨이를 점령한 가상 상황을 다룬 이 시리즈에서, 유럽연합(EU)과 미국은 노르웨이 녹색당 정부가 폐쇄한 석유 생산 시설을 다시 가동하기 위해 러시아의 점령을 암묵적으로 용인한다. 이 시리즈를 구상할 때 나는 극단적 상황에서 보통 사람들이 마주할 법한 딜레마와 선택에 중점을 두었다. 우리의 부모와 조부모가 1940~1945년 독일의 노르웨이 점령기에 마주했던 것과 유사한 상황을 다루고 싶었던 것이다. 약소국과 이웃의 강대국, 세계를 주름잡는 국가들이 교묘히 작전을 펼치며 자국의 경제적 이익과 안보를 위해 정치적 원칙을 조율하는 상황은 드라마의 배경일 뿐이었다. 〈점령〉에 나오는 가상의 세계가 실제 러시아는 아니었으며, 이 사실이 작품에서 명확히 드러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러시아 당국은 곱게 봐주지 않았다. 주노르웨이 대사 뱌체슬라프 파블롭스키는 러시아의 타스 통신에 이렇게 말했다. “올해(2015년)는 제2차 세계대전 승리 70주년을 맞이한 해입니다. 그런데 작가들이 노르웨이 북부를 나치 점령군에게서 해방시킨 소련군의 영웅적인 공로를 망각하고, 냉전시대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존재하지도 않은 동쪽의 위협으로 노르웨이 시청자들을 공포에 떨게 만드니 참으로 유감입니다.” 파블롭스키 대사가 다소 민감하게 반응한 이유는 그 전해에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무단으로 점령하면서(〈점령〉의 대본은 한참 전에 나왔고, 당시에는 이미 제작 중이었다) 러시아가 세계정치 무대에서 극악한 악역을 맡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해도 왜 그렇게 격분했을까? 〈점령〉은 허구이고, 러시아인들이 로봇처럼 움직이거나 하나같이 사악한 ‘나쁜 놈들’로 그려진 것도 아니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가짜뉴스와 선동으로 진실의 가치가 떨어지고, 지도자를 선출할 때도 감정에 휩쓸려 선택하는 시대로 접어들면서, 사실(fact)은 예전만큼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사실’은 감정에 호소하는 이야기, 우리에 관한 이야기, 우리를 집단·국가·문화·종교 등으로 묶어 규정해버리는 이야기 등에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서방국가들이) 베트남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패배한 이유는 무기나 군사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이야기가 부재했기 때문이리라.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상대편이 더 괜찮은 이야기를 내놓아서였다.
러시아가 최근에 일으킨 전쟁에 관한 글에서 자주 인용되는 표현이 있다. “전쟁이 발발할 때 최초의 희생자는 진실이다.” 미국의 상원의원이던 하이럼 존슨이 1917년에 한 이 발언은 두 당사자가 사건에 대한 해석의 주도권을 두고 싸울 때 사실을 토대로 한 진실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경종을 울린다. 이는 저널리스트가 (아무리 진정성과 독립성으로 무장했더라도) 특히 전쟁 중에는 자신의 문화, 민족, 대대로 물려받은 세계관 등과 거리를 두고 실제 상황을 보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얼마나 순진한 것인지 일깨워주는 표현이기도 하다. 노벨상 수상자이자 원자폭탄을 발명한 과학자 중 한 사람인 리처드 파인만은 물리학처럼 절대적인 것에 대해서도 “나는 근사치의 답과 가능한 믿음과 사안마다 다른 정도의 확실성을 가질 뿐 어느 하나도 절대적으로 확신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완벽하게 ‘객관적인 진실’이라는 개념 자체가 착각이라는 뜻이리라. 하지만 ‘1+1=2’라고 높은 확률로 말할 수 있듯 어떤 것이 진실이라고 말하려는 시도와 어떤 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말하려는 시도는 엄연히 다르다.
프랑코 군부보다 나은 이야기꾼, 피카소
1937년, 파시스트인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를 폭격하여 민간인을 학살했을 때 이 마을의 모든 주민이 사건의 진상을 전할 수 있었다. 파괴된 마을과 희생자들의 사진이 나돌기 시작하자마자, 프랑코와 군부는 그 이미지들이 스페인 국내와 해외에서 격한 반응을 일으킬 것이라고 깨달았다. 그래서 공화주의 성향의 주민들이 마을을 파괴했다고 강변했다. 프랑코 군부의 이야기가, 적어도 이를 믿고 싶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한동안 통했다. 하지만 공화주의 진영에는 더 나은 이야기꾼이 있었다. 바로 파블로 피카소다. 그는 작품 〈게르니카〉에서 이 작은 마을에 펼쳐진 지옥을 그렸다. 당시 피카소는 파리에 살고 있었다. 이 작품은 객관적인 표현 기법이 아니라 피카소 고유의 상상과 경험을 기반으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며 유럽인의 눈을 뜨게 했다. 〈게르니카〉는 그해에 파리에서 전시되고 이후 유럽을 순회하며 공화주의 진영으로 지원병이 몰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소련 당국이 ‘1905년 러시아혁명’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 감독에게 연출을 맡긴 〈전함 포템킨(Battleship Potemkin)〉(1925년 작)도 마찬가지다. 두 작품 모두 사건의 진상을 표현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예술적 자유를 활용한다. 가령 〈전함 포템킨〉의 유명한 ‘오데사 계단 학살’ 장면은 실제 사건을 그린 것이 아니다. 하지만 화자는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목적은 진실을 말하는 데 있으므로 반드시 사실을 그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사망자 수를 보도하거나,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를 전달할 필요가 없다. 예술적 자유는 이야기에 힘을 선사하며, 이 힘은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스스로 선동당하는지 모를 때 특히 강력해진다.
〈마음과 지뢰:미 제국의 문화산업(Hearts and Mines:The U.S. Empire’s Culture Industry)〉의 저자인 온타리오 공과대학 태너 멀리스는 미국 전쟁정보부(Office of War Information)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할리우드와 공조하기 위해 ‘영화국’이라는 부서를 만든 과정을 소개한다. 영화국은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대본 1652편을 검토하여 미국인들이 ‘전쟁에 무심하거나 전쟁에 반대하는’ 듯 보이는 소재를 비롯해 미국을 우호적이지 않게 묘사한 부분을 모두 수정하거나 삭제했다. 그리고 미국 전쟁정보부의 부장 엘머 데이비스는 “선전 메시지를 대중의 마음속에 심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영화라는 매체로 메시지를 흘려보내 대중이 스스로 선동당하는지 모르는 사이에 주입하는 방법이다”라고 주장했다. 멀리스는 캐나다 공영방송 CBC에서 영화는 여론을 형성하는 데 완벽한 매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영화를 보면서 충격적인 경험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할리우드는 냉전시대에 미국의 군사적 이상을 홍보했고, 이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오늘날 전 세계는 사실상 같은 영화관에 앉아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지켜본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보는 장면은 저마다의 언어로 자막이 달린 더빙판이다. 각기 다른 버전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고, 결국에는 최고의 이야기가 승리할 것이다. 노르웨이 정치 평론가 모데 스테인셰르가 〈다그스아비센(Dagsavisen)〉에 썼듯, “전쟁에서는 군사시설이나 민간시설을 파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쟁에 직접 관여하지 않은 세계인의 마음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질문이 남는다. 우리가 세계인의 마음을 얻으려면 어떤 수단을 사용해야 하는 것일까? 특히 블라디미르 푸틴 같은 독재자가 자신만의 규칙에 따라 광분하면서, 우리에겐 어두운 과거 역사로 여겨지는 검열과 선동을 휘두르는 지금의 상황에서 말이다. 이에 맞서려면 (민주주의 국가들도) 푸틴처럼 움직이는 것이 좋을까(적절할까)? 그러나 민주주의 국가가 언론의 자유와 투명성 같은 민주주의 원칙을 포기할 수는 없다. (푸틴 같은 독재자에 맞서) 자유를 지키기 위한 일시적 시도라고 해도 언론 자유와 투명성을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윈스턴 처칠은 이렇게 말했다. “전시에는 진실이 매우 귀중하므로 항상 거짓이라는 경호원으로 에워싸서 지켜야 한다.” 비관주의자라면 이렇게 고쳐 말할 것이다. “전시에는 거짓이 매우 귀중하므로 새로운 거짓으로 지켜야 한다.” 하지만 항상 어딘가에선 ‘전시’나 ‘긴장’으로 여겨질 만한 새로운 상황이 벌어진다. 누군가는 이런 상황을 ‘비상사태’라고 부르며, 이에 합당한 조치(진실을 거짓으로 지키거나, 거짓을 새로운 거짓으로 지키는)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진실한 이야기가 최고의 이야기
당신이 나처럼 낙관주의 쪽이라면 진실이 (진실을 표현하려고 시도하는 저널리스트나 예술가 혹은 이야기꾼의 불완전하고 주관적인 진실일지라도) 승리하리라는 희망을 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 없다”라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말은 옳다. 어쨌든 내부에서 무너진 소련과 백악관에서 쫓겨난 도널드 트럼프의 사례도 있지 않은가. 실제 상황에 대한 온갖 이야기가 난무하는 오늘의 현실 앞에서 그저 굴복하고 ‘모든 이야기가 동등하게 진실을 전한다’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다른 이야기보다 더 진실한 이야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전방위로 객관적 보도를 촉진하고 허위 정보와 선동을 근절하는 데 앞장서는 런던 정보복원력센터의 로스 벌리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일으킨 이유에 대한 푸틴의 서사가 SNS나 외신 보도를 접하지 못하는 다수의 러시아 국민에게 설득력을 발휘한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의 인터넷 환경이 더 개방적으로 전환되면 여론이 푸틴으로부터 돌아설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버나드 L. 모어는 〈러시아인은 왜 푸틴에게 표를 주는가?(Why Do the Russians Vote for Putin?)〉라는 책에서 러시아인 대다수가 생활수준이 높은 작은 나라보다 이웃 나라들이 두려워하는 큰 나라에서 살고 싶다고 답했다는 여론조사를 제시한다. 푸틴은 러시아 국민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셈이다. 하지만 로스 벌리는 러시아의 젊은 세대는 가상사설망(VPN)을 비롯한 기술적 허점을 통해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접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아직은 그 수가 적지만 언젠가 이런 뛰어난 인재들이 저널리스트와 작가와 예술가가 되어 이야기를 무기로 활용할 날이 올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군사적 전개 상황과 제재조치와 외교적 노력에 대한 소식을 접한다. 하지만 서사를 둘러싼 전쟁은 장기전이다. 결국에는 블라디미르 푸틴이 지는 전쟁이다. 그가 거짓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경호원으로 진실을 에워싸든 말이다. 다만 문제는 ‘궁극적으로’ 그때가 언제냐는 것이다. 프랑코는 거의 40년간 스페인을 지배하는 동안 대대적인 검열을 막강한 정권 방어 수단으로 삼았다. 그래도 그는 역사책에 패자로 기록되었고, 스페인 국민은 그의 유산과 이념을 무너뜨렸다. 〈게르니카〉는 프랑코가 사망하고 6년 뒤인 1981년에 스페인에서 최초로 전시되었다. 첫 열두 달에만 100만명 이상의 인구가 관람한 〈게르니카〉는 지금도 마드리드의 레이나소피아 국립미술관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품이다. 가장 진실한(가장 사실적이지는 않다고 해도) 이야기가 최고의 이야기다.
요 네스뵈 (작가) / 번역 문희경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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