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리본특집] 그대 그리울 때면.. '준·희' 보러 산에 갑니다
글 서현우 기자 사진 이신영 기자 최남준 2022. 4. 7. 10:03
준.희 최남준 선생
자신과 먼저 떠난 아내의 이름 끝자로 등산리본 5만개 만들어
자신과 먼저 떠난 아내의 이름 끝자로 등산리본 5만개 만들어
‘그대와 가고 싶은 山/그리움으로 솟아나고…/그리움. 보고 싶은 마음!’
주황색 리본에 꾹꾹 눌러 담긴 이 글을 보며 잠시 걸음을 멈추고 땀을 식힌 뒤, 우거진 수풀 사이 어디로 이어질지 모를 갈림길에서 올바른 길을 찾은 등산객들의 수가 과연 몇 명일까? 그리고 또 리본에 적힌 ‘준.희’라는 글자를 보며 ‘대체 준희가 누구지?’ 라는 궁금증을 가진 사람은 또 몇 명일까?
이 ‘준.희’ 리본을 단 이는 부산 원로 산악인 최남준 선생이다. 그는 명망 높은 산악회인 건건산악회를 이끌며 1대간 9정맥을 162기맥을 주파하며 종주산행 붐을 불러일으켰다. 2001년 모든 대간 및 정맥을 완주했고, 국제신문 2대 산행대장도 역임한 바 있다. 특히 긴 산줄기를 며칠이건 비박하며 탱크처럼 헤쳐 나가는 산행 스타일로 유명했다.
그는 왜 ‘준.희’라는 리본을 달게 된 걸까? 최남준 선생을 만나기 위해 부산 광안리로 달려갔다. 이런저런 코로나 안부나 인사, 사적인 이야기 따위를 압축해 건너뛰고 궁금했던 이 질문을 던졌다.
등산리본을 달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또 ‘준.희’는 무슨 뜻인지요?
‘준.희’는 제 이름 최남준의 끝 글자 ‘준’과 아내 김숙희 여사의 끝 글자 ‘희’를 딴 것이에요. 1992년부터 등산리본 작업을 했는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준.희’는 제 이름 최남준의 끝 글자 ‘준’과 아내 김숙희 여사의 끝 글자 ‘희’를 딴 것이에요. 1992년부터 등산리본 작업을 했는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슬픈 마음에 한동안 산은 물론 외출도 거의 끊고 두문불출했었죠. 그러다 아이들도 있는데 계속 이렇게 지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다시 기운을 차렸어요. 그리고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세 문장으로 리본에 담아 산으로 돌아왔죠. 그 시는 제가 직접 쓴 겁니다.
사모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교대를 나온 만큼 머리도 좋고 착한 사람이었어요. 정말 누구 하나 부러울 것 없이 행복한 삶이었죠. 마침 아내도 등산을 좋아해서 취미생활을 같이 할 수 있었어요. 신혼여행도 제주도로 가서 성산일출봉 분지 안에서 텐트 치고 잤었어요. 지금은 불가능한 낭만적인 밤이었죠.
교대를 나온 만큼 머리도 좋고 착한 사람이었어요. 정말 누구 하나 부러울 것 없이 행복한 삶이었죠. 마침 아내도 등산을 좋아해서 취미생활을 같이 할 수 있었어요. 신혼여행도 제주도로 가서 성산일출봉 분지 안에서 텐트 치고 잤었어요. 지금은 불가능한 낭만적인 밤이었죠.
그렇게 딸 둘도 낳고 살았는데 덜컥 암에 걸렸어요. 2년 동안 투병했죠. 지금 의료 기술이었으면 암에 걸린 부위를 전부 절단해서 살았을 텐데 당시에는 암이 발견된 부분 일부만 도려내는 수술을 했어요. 결국 전이가 심해졌죠. 정말 최선을 다해서 간호했지만….
자녀분들도 상심이 크셨겠네요.
그래서 아내 영전 앞에서 아이들에게 약속한 게 하나 있어요.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너희 둘만 보고 살 거야”라고. 재혼을 절대 하지 않고(그는 재혼이 아이들을 혼란스럽게 할 것이라고 여겼다) 오로지 아이들만 바라보고 키우겠다고 다짐했어요. 다행히 모두 잘 커서 대학원 가서 박사도 되고 했어요.
그래서 아내 영전 앞에서 아이들에게 약속한 게 하나 있어요.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너희 둘만 보고 살 거야”라고. 재혼을 절대 하지 않고(그는 재혼이 아이들을 혼란스럽게 할 것이라고 여겼다) 오로지 아이들만 바라보고 키우겠다고 다짐했어요. 다행히 모두 잘 커서 대학원 가서 박사도 되고 했어요.
아내의 이름을 함께 담은 등산리본을 달 땐 어떤 기분이신가요?
이별의 아픔을 이겨내고 하늘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고 있다는 걸 아내에게 전하는 느낌이죠. 그리고 그렇게 등산리본을 손에 쥐고 걸으면 늘 아내와 함께하고 있는 기분이에요. 산에서 새가 다가오면 아내가 왔다고 여기죠.
이별의 아픔을 이겨내고 하늘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고 있다는 걸 아내에게 전하는 느낌이죠. 그리고 그렇게 등산리본을 손에 쥐고 걸으면 늘 아내와 함께하고 있는 기분이에요. 산에서 새가 다가오면 아내가 왔다고 여기죠.
지금은 전국 곳곳에 ‘준.희’ 리본이 있잖아요? 모든 산에 밤이나 낮이나 아내가 머물고 있는 셈이죠. 그래서 산에 가면 외로움이 없어요. 내가 죽을 때까지도 잊지 못할 사람입니다.
6,500개 봉우리에 표지판 달아
그럼 등산리본을 지금까지 몇 개 정도 다신 건가요?
제대로 세어 본 적은 없지만 30여 년 동안 달았으니 적으면 5만 개, 많으면 10만 개는 족히 될 것 같아요. 처음 20년 동안은 일주일에 3번, 한 번에 20km씩 걸으면서 작업했거든요. 그때는 대부분 비박하면서 걸었어요. 그러니 그렇게 길게, 오래 걸을 수 있었죠.
제대로 세어 본 적은 없지만 30여 년 동안 달았으니 적으면 5만 개, 많으면 10만 개는 족히 될 것 같아요. 처음 20년 동안은 일주일에 3번, 한 번에 20km씩 걸으면서 작업했거든요. 그때는 대부분 비박하면서 걸었어요. 그러니 그렇게 길게, 오래 걸을 수 있었죠.
2005년부터는 무명봉에 표지판을 다는 작업을 했어요. 따로 이름을 얻진 못하고 산꾼들 사이에 독도용으로 몇 m봉이라고만 불리던 그 봉우리들이죠. 또한 봉우리 사이에 토박이들 사이에 이름이 구전된 고개들도 다 찾아서 표지판을 달아놨어요.
이 표지판을 달아 놓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지금 자기가 올라선 봉우리나 고개가 어딘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쳤을 거예요. 이름 없는 봉우리의 설움도 덜어주고, 또 산객한테는 지도상 위치를 정확히 알려 주는 역할을 하는 셈이죠.
최근에도 꾸준히 등산리본을 달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달지는 못하고 보통 저를 존경한다면서 늘 산행에 동행해 주는 후배들이 대신 해주고 있어요. 지금은 주로 남해안길이나 서해안길 같은 둘레길과 작은 섬에 있는 등산로에 등산리본을 달고 있죠. 표지판 작업은 올해 5월에 그만두려고 합니다. 충분히 했어요.
지금은 제가 달지는 못하고 보통 저를 존경한다면서 늘 산행에 동행해 주는 후배들이 대신 해주고 있어요. 지금은 주로 남해안길이나 서해안길 같은 둘레길과 작은 섬에 있는 등산로에 등산리본을 달고 있죠. 표지판 작업은 올해 5월에 그만두려고 합니다. 충분히 했어요.
등산리본을 달 때 어떤 원칙 같은 게 있나요?
좋은 질문입니다. 최근에 등산리본을 직접 만들어서 다는 분들이 있는데 너무 마구잡이로 달아요. 그러면 안 되거든요. 제가 단 등산리본은 아무데나 붙인 것 같아도 다 의미가 있어요.
좋은 질문입니다. 최근에 등산리본을 직접 만들어서 다는 분들이 있는데 너무 마구잡이로 달아요. 그러면 안 되거든요. 제가 단 등산리본은 아무데나 붙인 것 같아도 다 의미가 있어요.
일단 저는 삼거리 같은 갈림길에서 절대로 바로 맞는 길을 알 수 있도록 등산리본을 달지 않아요. 10~15m 정도 더 진행해서 간 곳에만 달아놓죠. 등산객이 먼저 독도를 해서 맞는 길을 골라서 오면, 그때 이제 맞는 길이라고 답을 알려주는 셈이죠. 길을 찾는 재미를 빼앗지 않아야 됩니다.
그리고 한 번 달아두면 내가 됐든 같은 산악회가 됐든 관리를 해줘야 되요. 등산리본은 5년 정도 지나면 탈색되고 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 경우 다른 걸로 교체를 해주든지 아니면 수거해야 되죠.
또 지나치게 나뭇가지를 졸라매거나 해서 나무의 생장을 방해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조여 놓으면 나뭇가지가 죽어버려요. 이런 리본이 눈에 보이면 약간 헐겁게 해주거나 빼버리죠.
마지막으로는 길을 알려 주기 위한 등산리본이라면 남의 것 옆에 걸지 않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굳이 그렇게 많이 달 필요가 없어요. 지금 보면 무슨 굿당처럼 호화스럽게 붙은 곳이 정말 많아요. 정말 있을 자리가 아닌데 10~20장씩 붙어 있는 거죠. 또 자기 걸 붙이려고 남의 걸 떼버리는 경우도 있어요. 그래선 안 됩니다. 저는 단 한 번도 누구 것 옆에 내 걸 붙여본 적이 없어요. 내가 붙인 걸 보고 그 옆에 다른 사람들이 와서 붙이는 경우는 많아도.
‘등산리본이 이제는 쓸모없다’, 더 나아가 ‘쓰레기’라는 지적도 있는데 동의하시나요?
사실 등산리본은 이젠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은 구시대의 유물이에요. GPS와 워록스 지도만 있으면 등산리본이 없어도 충분히 산행하기 쉽죠. 국립공원이나 군립, 도립공원들은 길이 고속도로처럼 나 있으니 더더욱 필요 없고요.
사실 등산리본은 이젠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은 구시대의 유물이에요. GPS와 워록스 지도만 있으면 등산리본이 없어도 충분히 산행하기 쉽죠. 국립공원이나 군립, 도립공원들은 길이 고속도로처럼 나 있으니 더더욱 필요 없고요.
하지만 지맥 같은 경우에는 달라요. 등산리본 작업을 하는 후배들에게 늘 이런 곳에선 양껏 붙이라고 해요. 그만큼 길이 험해요. 특히 전라도 쪽 지맥들은 정말 등산리본이 절실하죠. 대표적으로 화원지맥, 철성지맥, 태청지맥, 백룡지맥 등이 있어요. 이 지맥들은 정말 무서워요. 1km 가는 데 2시간이 걸릴 정도로 험해서 마루금을 제대로 빠져나가기가 어렵죠.
등산리본에 전화번호도 써놨는데 연락받은 적은 없으신가요?
정말 엄청나게 많습니다. GPS가 상용화되기 전에는 조난당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전화했어요. 그러면 밤잠 설쳐가면서 머릿속에서 그 길들을 하나씩 그려가면서 길을 안내해 줬죠. 또 지나가다가 등산리본을 보고 도움을 받았다며 반갑다고 인사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정말 엄청나게 많습니다. GPS가 상용화되기 전에는 조난당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전화했어요. 그러면 밤잠 설쳐가면서 머릿속에서 그 길들을 하나씩 그려가면서 길을 안내해 줬죠. 또 지나가다가 등산리본을 보고 도움을 받았다며 반갑다고 인사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지자체에서도 연락이 많이 왔죠. 우선 고성, 거제 등이 기억에 나네요. 와서 감사패 받아가라고 합디다. 하지만 저는 절대로 받지 않아요. 저는 그저 자연과 더불어 사는 기쁨을 나누려고 했을 뿐이지 감사받으려고 한 일이 아니거든요.
가장 기억에 남는 등산리본은 무엇인가요?
5만 개 리본이 모두 소중해요. 지금도 지맥길이 눈에 훤하고 어디어디에 달려 있는지도 전부 생각납니다. 이게 전부 기억이 나는 이유는 리본 하나하나를 달 때 간절한 마음을 담았기 때문이에요. ‘여기다 달아두면 누군가에게 이 등산리본이 따뜻한 등불이 될 텐데’라는 마음을 담았어요.
5만 개 리본이 모두 소중해요. 지금도 지맥길이 눈에 훤하고 어디어디에 달려 있는지도 전부 생각납니다. 이게 전부 기억이 나는 이유는 리본 하나하나를 달 때 간절한 마음을 담았기 때문이에요. ‘여기다 달아두면 누군가에게 이 등산리본이 따뜻한 등불이 될 텐데’라는 마음을 담았어요.
단지 조금 특별하게 여기는 것은 ‘준.희’ 대신 ‘희.준’이라고 쓴 것을 단 곳들이에요. 수도암 스님 한 분이 아내를 앞에 두라고 조언했었거든요. 전라도랑 충청도 지맥 10여 군데가 그래서 ‘희.준’으로 돼 있죠. 아는 사람들은 아실 거예요.
현재 더 하고 싶은 작업은 무엇인가요?
제가 십자인대를 다친 후 점차 무릎이 나빠져서 이제는 힘든 산길은 오르기 어려워요. 등산리본이나 표지판 작업 모두 후배 산꾼들에게 맡긴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뭘 하려고 하지 않고 지금까지 해온 것들을 잘 관리하고 싶어요.
제가 십자인대를 다친 후 점차 무릎이 나빠져서 이제는 힘든 산길은 오르기 어려워요. 등산리본이나 표지판 작업 모두 후배 산꾼들에게 맡긴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뭘 하려고 하지 않고 지금까지 해온 것들을 잘 관리하고 싶어요.
또 제가 지금 암에 걸렸다가 회복하는 중인데 나이가 나이인지라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요. 제가 남긴 이 등산리본들을 우리 등산객들이 나쁘게 보지 않고 소중하게 여겨줬으면 하는 바람일 뿐입니다.
본 기사는 월간산 2022년 4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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