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의 농담(籠談)] 선수로서 궤도에 진입하다

2022. 4. 6.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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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기의 『갈채와의 밀어』 다시 읽기㉑

김영기가 선수로서 처음 경기에 나간 다음, 사정은 나아졌다. 운동에 미쳐서 공부를 등한시할까 노심초사하던 그의 부모는 경계를 조금 풀었다. 김영기의 표현대로라면 ‘코트 안에서 쉬든 공을 깔고 앉았든 상관하지 않게’ 된 것이다. 유니폼을 가지고 집에 들어가도 아궁이에 던져질 위험은 사라졌다. 어머니는 운동하는 아들을 위해 정성을 기울였다. 무엇보다도 아들의 건강을 염려했다. 그래도 김영기는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언제 다시 경고등에 불이 들어오고 불호령이 떨어질지 모르니까.

훗날 김영기는 이 시기를 돌아보며 생각했다. 어찌 됐든 그의 부모는 운동부 순회대사 노릇을 그만두고 학교를 대표하는 운동선수로 자리 잡은 아들을 긍정적으로 보았던 것 같다고. 우리 팀 골을 향해 슛하는 실수를 하거나 말거나 무슨 일이든 한 가지 일을 끝까지 해내지 못하는 성격을 조금씩 고쳐나가는 아들을 믿게 된 것이다. 그러니 부모는, 특히 아버지는 아들의 운동열(運動熱)을 당분간 지켜보자고 결심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해서 코트 밖의 어려움은 대부분 해소됐다. 어른이든 친구든 선후배든 농구를 하겠다는 김영기의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코트 안에서는 거대한 난관을 만났다. 이희주 코치가 서울로 돌아온 것이다. 

 

이희주 코치는 평안남도 평양 출신으로 1942년 연희대학교 상과를 졸업했다. 배재고등학교 농구부 코치로 일하며 지도력을 발휘했다. 농구에 대한 남다른 식견과 비전을 바탕으로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등 주요 언론에 칼럼을 기고해 우리 농구계에 영감을 불어넣은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KBS와 MBC에서 농구 중계방송 해설을 맡기도 했다. 한국농구협회 이사, 대한체육회 고문을 역임했고, 1980년 미국으로 이주한 뒤에는 LA농구협회 고문을 맡는 등 활발히 활동하다 2006년 6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나의 기억에는 일찍이 허재의 진가를 알아본 안목의 소유자로 남았다. 고인이 된 스포츠서울의 이병진 기자가 쓴 칼럼이 있다.

1981년 4월 11일. 그날 아침 기자는 환갑을 훨씬 넘긴 나이(당시 65세)로 왕성하게 활동하시던 전 국가대표 농구감독 이희주 씨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오늘 나하고 꼭 갈 데가 있어.”
장충체육관에선 춘계중고농구연맹전 남고부 경복―용산 결승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바로 저 녀석이야. 두고 보라구, 이충희보다 더 잘할 걸.”
이미 신동파와 견줄만한 아시아 최고의 슈터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이충희보다 더 크게 성장하리란 이 선생의 장담에 약간은 불쾌감마저 느끼며 며칠 전까지 중학생이던 용산고 까까머리 신입생 허재를 눈여겨봤다.
김윤호-유재학이 버틴 경복고의 마지막 전성기. 비록 경복이 우승했지만 두 고교스타는 허재의 현란한 개인기 앞에 쩔쩔 맸다. 기자는 그때 허재에게 ‘농구천재’란 별명을 달아 주리라 마음먹었다. 경기가 끝난 뒤 소년에게 물었다.
―커서 어떤 선수가 되고 싶니?
“신선우 같은 선수요.”


이희주 코치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농구부원들은 대개 기뻐했지만 김영기는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기분을 느낀 농구부원은 김영기뿐이 아니었다. 환도 이후 배재고등학교 농구부의 인원은 스무 명으로 불었다. 엄격한 심사나 절차 없이 부원들을 받아들인 탓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나중에 들어온 농구부원들 사이에는 돌아온 이희주 코치가 팀을, 그러니까 인원을 정리한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간신히 농구부에 들어가 몇 달 훈련한 실력으로 경기에까지 참가한 김영기도 불안했다.

이희주 코치가 김영기를 불렀다.
“야! 꼬마, 넌?”
“김영깁니다!”
“네가 바로 방향감각도 없는 그 놈이구나!”
이 코치도 당연히 김영기의 첫 경기에서 벌어진 촌극을 알고 있었다. 김영기는 이 코치의 이야기를 듣고도 배짱 좋게 싱긋 웃었다.
“인마, 웃긴….”
이희주 코치도 웃었다. 이 코치의 웃는 얼굴을 보고 김영기는 적이 안심을 했다. 다른 운동부에서 당한 것처럼 키가 작다는 이유로 쫓겨날 것 같지는 않았다.

이 코치가 돌아온 뒤 농구부를 떠나는 학생이 적지 않았다. 이 코치는 조직적인 훈련과 선수 보강을 목표로 삼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농구부원을 새로 뽑기도 했다. 그가 지도하는 훈련은 엄격하고 고됐다. 그전까지 학생들끼리 주먹구구로 하던 훈련은 방과후 정해진 시간에 이루어졌다. 부원들의 몸에 익은 농구 기술들도 철저한 수정을 거쳐 가다듬는 과정을 밟았다. 김영기는 이즈음부터 자신의 농구선수 생활이 제 길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이 코치의 지도를 따라 동료들에게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한 가지 불안이 김영기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용케 농구부에 남았지만 언젠가는 쫓겨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하루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가 농구부에 들어간 시기는 이희주 코치가 부임하기 전이었다. 더구나 첫 경기에 나가서는 ‘역주행’을 해서 망신까지 당했으니 나중이 편할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김영기는 다른 부원에 비해 체격이 작았다. 김영기의 키는 나중에 1m78㎝까지 자랐지만 이때만 해도 가장 작은 축에 들었다. 체격도 가늘었고 저항력도 지구력도 다른 부원들에 비하면 약했다. 말하자면 농구선수로 성공하기에는 부적합한 신체조건을 타고난 것이다. 그래도 김영기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다른 면에서 몇 갑절 노력하면 자신의 약점을 메울 수 있다고 믿었다.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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