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 저하는 민주주의 국가들의 공통적인 현상이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정치적 이단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집권 자체가 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미국 시민들의 불신과 불만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은 민주적 제도와 관행들을 과감하게 무시함으로써 현대 민주주의 종주국 미국의 체면을 무참히 구겼다.
신뢰 하락은 정부를 구성하는 입법·행정·사법부를 가리지 않는다. 갤럽이 지난해 미국 시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입법부에 대한 신뢰도는 37%, 행정부는 44%, 사법부는 54%였다. 같은 기관이 집계한 1997~2021년 평균을 보면 입법부에 대한 신뢰도는 47%, 행정부는 52%, 사법부는 68%였다.
클래런스 토머스 미 대법관과 부인 버지니아 토머스의 사례는 정부에 대한 신뢰 추락에 일조하고 있다. 워싱턴 연방의회 의사당 습격 사건을 조사 중인 하원 ‘1·6 특위’는 2020년 말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불복 정국 당시 마크 매도스 백악관 비서실장의 문자 메시지 2300여건을 제출받았다. 그 중엔 버지니아가 매도스 비서실장이 주고 받은 29건도 포함됐다. 최근 언론 보도로 공개된 내용을 보면 버지니아는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사기’ 주장을 강력히 지지하면서 끝까지 투쟁하라고 응원했다. 단순 응원을 넘어 대선불복 재판 전략을 조언하는 듯한 대목도 있었다.
토머스 대법관은 미국 역사상 두번째 흑인 대법관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 현역 대법관 가운데 재직 기간도 가장 길다. 그는 현직 대법관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성향의 판결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토머스가 대법관이 되기 4년 전인 1987년 그와 결혼한 버지니아는 보수 성향 로비스트로 활동해 왔다. 그가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자라는 사실도 비밀이 아니다. 버지니아가 관여하거나 후원한 보수 단체가 제기한 소송이 대법원에서 다뤄진 경우도 여럿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지만 토머스 대법관은 한번도 부인과 관련해 재판을 회피한 사례가 없었다.
미국의 사법행동강령은 결혼한 부부일지라도 직업과 정치적 의견은 서로 분리된 것으로 간주한다고 한다. 따라서 대중적 비판 여론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는 딱히 문제 삼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였다. 지방법원이나 항소법원 판사들과 달리 대법관은 이해충동 가능성이 있는 재판을 회피할 특별한 규정도 없다.
하지만 부부의 정치적 견해는 별개라 할지라도 대법관인 부인이 직접적으로 지원하고 관여하는 측이 제기한 소송을 남편이 재판하는 상황이 정상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특히 토머스 대법관은 지난해 2월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불복 재판에서 그의 손을 들어줬다. 지난 1월 백악관 기록 공개를 둘러싼 재판에서도 유일하게 트럼프 전 대통령 측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도 그였다. 이번에 공개된 버지니아와 매도스 비서실장의 통화기록을 보면 백악관 기록 공개 관련 재판은 버지니아도 이해 당사자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더한다.
논쟁은 익숙한 구도로 흘러가고 있다. 민주당은 토머스 대법관이 트럼프 대통령 관련 모든 소송을 회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지만, 공화당은 ‘좌파의 공격’으로 치부하고 있다. 눈 앞의 공직 부패를 정화할 능력이 모자라는 정부와 정치는 미국 민주주의 위기의 표상이다.
워싱턴|김재중 특파원 herm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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