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가스값 루블로 내라” 獨·佛 “계속 유로 결제”
러 “수용 안하면 공급중단” 협박
EU “모든 상황 대비할것” 맞서
러시아와 유럽연합(EU)이 러시아산(産) 천연가스에 대한 결제 방법을 놓고 정면 충돌하고 있다. 서방의 강력한 경제제재로 국가 부도 위기에 몰린 러시아가 루블화 가치 방어를 위해 “러시아산 천연가스 대금은 루블화로 결제해야 한다”고 강요하자 EU 측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강력 반발하고 나섰다. 갈등이 고조되면서 러시아가 “가스 공급을 중단할 수 있다”고 협박에 나섰고, EU는 “모든 상황에 대비하겠다”고 맞서 최악의 대결 국면이 벌어질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31일(현지 시각) ‘비우호적 국가’에 대한 새로운 천연가스 교역 방식(결제 방법)을 담은 대통령령(令)에 서명했다. “1일부터 러시아산 천연가스 구입 대금 결제는 루블화로만 가능하다”는 내용이다. 적용 대상 국가는 미국, 영국, EU 27국을 비롯 일본, 한국 등 대(對)러시아 경제제재에 참여한 48국이다. 푸틴 대통령은 “루블화로 결제가 이뤄지지 않으면 구매자의 의무를 지키지 않는 것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했다. 천연가스 공급을 언제든 끊을 수 있다는 협박이다.
유럽은 강하게 반발했다. 브뤼노 르메르 프랑스 재정경제부 장관과 로베르트 하베크 독일 경제 부총리(재무장관)는 이날 독일 베를린에서 긴급 회동을 한 뒤 “러시아산 천연가스 결제는 계속 유로화로 하겠다”고 발표했다. 양국 장관은 “계약에 명시되지 않은 통화(루블화)로 대금을 내라는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이로 인해 초래될 모든 상황에 대비하고 있다”고 했다.
러시아의 천연가스 루블화 결제 요구는 지난달 하순부터 유럽과 러시아 간의 새로운 갈등 요소로 급부상했다. 러시아 입장에서 경제제재에 나선 국가에 불이익을 주는 한편, 부도 위기에 빠진 러시아 경제의 신인도를 높이기 위한 조치다. 유럽 국가들이 천연가스 대금 결제를 위해 외환 시장에서 루블화 매입에 나서면 루블화 가치가 치솟으면서(환율 하락) 러시아 금융시장이 안정되는 효과가 있다. 또 루블화가 국제 결제에 사용되면 일부 러시아 은행을 국제 결제망에서 퇴출한 서방의 금융 제재를 약화시킬 수 있다. 러시아가 지난 2021년 천연가스와 석유 수출로 벌어들인 재정 수입은 1190억달러(약 145조원)에 달한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그러나 “당장 가스 대금 결제를 루블화로 전환토록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유보적 입장을 내놨다. 푸틴 대통령도 지난 30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와 전화 통화에서 “유럽의 다음 달 천연가스 결제는 (금융제재를 받지 않는) 가스프롬 은행을 통해 유로화로 계속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유화적 신호는 전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나온다.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에도 “침공 의사가 없다”고 한 것처럼 상대방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드는 전형적 기만 전술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EU 국가들은 “러시아의 보복 조치가 언제든 닥칠 수 있다”며 대비에 나섰다. 독일이 지난 30일 가스 공급 비상 상태 3단계 중 1단계인 ‘조기 경보’를 선포했고, 오스트리아도 31일 같은 조치를 했다. 현재 유럽의 천연가스 비축량은 전체 비축 가능량의 25% 수준이다.
한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31일 “(에너지 가격 안정화를 위해) 앞으로 6개월간 하루 평균 100만배럴의 전략 비축유를 방출하겠다”고 발표했다. 지난 2월 배럴당 80달러대였던 국제 유가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배럴당 110~120달러대를 오가고 있다. AFP통신은 그러나 “미국의 전략 비축유 방출로 전 세계 석유 공급은 1% 정도 증가하는데 그칠 것”이라며 공급량 증가가 시장에서 큰 효과를 내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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