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찮은' 젓가락으로 한국인 문화유전자 탐색

이강은 2022. 4. 2.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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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사후 출간된 첫번째 유작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 두번째 책
글 마디마디에 젓가락 특성 빌려
국민에 전하는 애틋한 충고 음각
최근 작고한 이어령 초대 문화장관이 젓가락으로 한국인의 ‘밈(meme·문화유전자)’을 탐색한 이야기보따리를 푼 유작 ‘너 누구니’가 출간됐다. 사진은 생전 이 전 장관의 열정적 인터뷰 모습.세계일보 자료사진
너 누구니/이어령/파람북/1만8000원

“신기하지 않습니까. 천 년 동안 내려온 젓가락과 젓가락질. 그 속에 한국인의 마음과 생활의식이 화석처럼 찍혀 있다면, 그것은 어떤 고전보다도 더 많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줄 것입니다.”

우리 시대 지성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석학으로 뭇사람이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술술 풀어냈던 이어령(1933∼2022) 초대 문화부 장관은 지난 2월 하늘의 별이 되면서도 그냥 떠나가지 않았다.

생전에 누구보다도 한국 문화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자부심을 갖고 한국인을 사랑했던 그가 한국인들이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는 ‘하찮은’ 젓가락으로 한국인의 ‘밈(meme·문화유전자)’을 탐색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은 것이다. 사후 출간된 첫 번째 유작 ‘너 누구니’를 통해서다.
‘너 누구니’는 저자가 ‘백조의 곡’으로 여겼던,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이다. 백조가 일생 동안 울지 않다가 죽을 때 한 번 우는 것에 빗대어, 자신의 많은 저작 중 백미며 혼신을 다한 후기 대표작임을 나타낸 것이다. 한국인의 문화유전자와 민족적 정체성에 대해 저자 특유의 독창적 시각으로 뛰어난 통찰을 길어 올렸다. 저자가 이 시리즈의 집필을 시작한 것은 77세 때다. 암 투병을 하다 10년 만인 2020년 첫 번째 작품 ‘너 어디에서 왔니’를 출간했다. 이어 수술과 입원 치료를 반복하면서도 손가락이 움직이는 한 집필을 멈추지 않았다. 그야말로 최후의 역작인 셈이다.

저자는 ‘너 누구니’에서 우리 고유의 식사 도구이자 문화인 젓가락과 젓가락질에 담긴 한국인의 유전자 암호를 해독하고, 세계와 미래로 나아가는 거대한 문명론을 탐사한다. 남들은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기 쉬운 평범한 일상이나 사물, 현상에 내포된 의미와 교훈을 발굴하고, 우리 사회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해 왔던 그의 평소 자세 그대로다.

“하찮게 보이던 젓가락이 어느새 나의 정체성이 되고, 서양과 동양 그리고 한·중·일 세 나라 문화의 차이를 재는 잣대가 된다”고 한 저자는 젓가락의 기능·문화·역사·사상적 의미와 가치를 꼬리에 꼬리 무는 이야기로 풀어낸다. 우리에게 너무 친숙해서 존재감이 없는 젓가락이란 소품 하나로 이렇게 방대한 글을 지루하지 않게, 때로는 독자가 무릎을 칠 만큼 써 내려간 것에 탄성이 나온다.

저자에 따르면 젓가락이라는 도구 자체가 인간 문화의 소산이며 문명의 출발이다. 젓가락 문화에는 동양사상과 동아시아의 생활양식도 함축돼 있다. 저자는 젓가락을 사용하는 동아시아 3국 중에서도 한국은 나무 재질 젓가락을 쓰는 중국·일본과 달리 금속을 사용하고, 숟가락과 함께 짝(수저)을 이뤄 쓰는 유일한 나라(민족)라며 이는 국물·짝 문화로 통하고 결국 조화의 정신과 포용의 자세로 이어진다고 통찰한다.

특히 저자가 12고개로 구분해 써 내려간 글 줄기 마디마디에는 젓가락 특성을 빌려 우리 사회와 국민들에 전하는 애정 어린 걱정과 충고가 음각돼 있다. “젓가락은 외짝으로는 절대 쓰지 못한다. 아무리 상아젓가락같이 귀한 것이라도 외짝으로는 절대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한낱 막대기일 뿐이다. (중략) 오늘날 한국 사회는 많은 대립과 갈등을 안고 있다. ‘포르테’, 목소리 큰 사람들이 지배하고 ‘피아노’, 약한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약한 것과 강한 것이 서로 공명하면서, 젓가락의 두 짝처럼 짝을 이루는 그 정신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때다.”(48∼49쪽)

이때만큼은 젓가락이 우리 사회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죽비 같다. 천국과 지옥을 구분 짓는 젓가락 이야기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불교에서 널리 퍼졌다는 길이 1m짜리 젓가락에 관한 내용이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천국과 지옥의 환경은 모두 같다. 다만 지옥에서는 그 긴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자기 입으로 넣으려고 하다 모두가 바짝 굶고 죽어 간다. 반면 천국에서는 그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서 상대방 입에 넣어 준다. 이를 두고 저자는 “천국으로 가는 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우리에게도 천국과 지옥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남과 나누고 도와주면 천국이고, 내 욕심만 차려서 내 입으로 가져가면 그게 바로 지옥인 거다. 자, 이제 젓가락을 가지고 천국으로 갈 것인지, 지옥으로 갈 것인지, 이 책이 그 안내서가 되길 바란다.”(279쪽)

생의 소멸을 앞두고 두려울 법한데도 태어난 곳으로 돌아간다며 기뻐했다던 시대의 거인이 마지막까지 편하게 눈감지 못했던 건 아닐까 싶다. 이기적 욕망과 불화로 가득한 한국 사회에 대한 염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진흙탕에서 빠져나와 새 길을 열어 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 때문에 말이다. 그렇게 사자후 토하듯 그는 ‘반드시 천국으로 가야 한다’고 당부하며 이 세상과 작별했다. 책을 덮고 나면 젓가락이 여느 때와 다르게 보일 것이다.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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