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인간극장] <10> 동해안별신굿 - 김동연 회장
- 따뜻한 계절 3~5월, 9~10월께
- 수호신·어르신 안녕 기원 행사
- 신내림 아닌 세습 무녀가 진행
- 1970년대 정부 폐습 타파 운동
- 공권력에 다수 무당 역사 속으로
- 세월 지나자 ‘전통문화’ 재평가
- 국가·지역 무형문화재로 지정
- 전국서 배움 청하는 이 많지만
- 전수관 부재로 교육 환경 열악
- 정부·부산시의 공간 지원 절실
‘경제적인 부와 함께 정신적으로도 건전하고 품위 있는 안정된 문화 생활을 추구한다’.

1970년대 정부가 추진했던 미신 타파 운동의 슬로건이다. 새마을운동의 하나인 미신 타파는 격랑을 일으켰다.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고유 전통 가운데 상당수가 폐습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중에서도 굿은 격렬한 배격의 대상이 됐다. 굿의 모태는 죽은 자의 넋을 기리고 산 자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제의다. 제의를 매개하는 존재는 귀신과 소통한다는 무당. 마녀 사냥하듯 공격하는 데 미신보다 좋은 대상도 드물었다. 굿 청산은 종교계의 이해와도 맞아떨어졌다.
전국에서 공권력이 굿을 단속했다. 굿판이 벌어지는 곳에 공무원이 들이닥쳤다. 때로는 경찰이 경범죄 처벌법을 내세워 무당을 잡아 가뒀다. 어버이의 명복을 비는 제의나 뱃사람의 안녕을 기원하는 어촌 마을의 연례 의식도 예외가 아니었다. 팔도의 신당·서낭당이 파헤쳐졌다.
미신 타파운동이 시작된 지 반세기가 지났건만 굿은 여전히 살아 남았다. 사전적으로 따지면 굿에는 ‘종교 제의’라는 의미보다 ‘여러 사람이 모여 떠들썩하거나 신명 나는 구경거리’라는 뜻이 더 앞에 온다. 그 의미대로 굿은 ‘관계’ 속에서 생존했다. 오랜 세월 전해 내려온 굿을 지워버린 일이야 말로 되레 촌극이라는 인식도 싹 텄다. 굿판에서 어우러지는 장단과 소리·의례 가운데 지키고 이어나가야 할 전통이 깃들었다는 깨달음도 확산했다.
세월이 바뀌자 정부는 ‘미풍양속과 전통 보호’와 ‘공동체성 회복’을 명분으로 전국의 굿을 국가·지역 무형문화재로 지정했다.
동해안별신굿은 1985년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82-1호로 지정됐다. ‘-1’이 붙지 않은 중요무형문화재 82호는 ‘풍어제’다. 부산에서 강원에 이르기까지 어촌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했던 동해안별신굿을 풍어제의 한 형태로 본 것이다.
동해안별신굿 무당의 특징은 ‘신 내림’이 아니라 세습무(世襲巫·5대)의 형태를 띤다는 점이다. 4대째 동해안별신굿을 가업으로 잇고 있는 김동연(71) 동해안별신굿보존회 회장을 최근 부산 기장군에서 만났다. 그는 동해안별신굿 전승교육사이기도 하다.
“학교 다닐 땐 무당집 딸이라고 손가락질을 숱하게 받았어요. 어린 마음에 ‘왜 이런 집안에서 태어났을까’ 원망스런 생각도 여러 번 품었고요.” 김 회장의 어릴 적 기억이다. 신 내림 받은 무당의 가계가 아님에도 ‘하세’(천대)를 받았던 경험은 역설적으로 김 회장 세 자매(김영희 동해안별신굿 명예보유자와 김동언 부산시 무형문화재 기장오구굿 보유자)를 똘똘 뭉치게 했다.
그는 “꼭 대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건 아니었다”면서도 “다른 친구들이 소꿉놀이 할 적에 우리 자매는 베개를 장구 삼고 쓰레받기를 부채 삼아 굿판 놀음을 했다. 어느 순간 ‘이럴 바엔 가업을 이어 무녀의 삶을 살자’ 싶은 결심이 섰다”고 했다. 마음 먹고 굿판에 나서자 ‘처녀무당’으로 가는 곳마다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세 자매는 그 길로 동해안별신굿판의 꽃으로 살아가게 됐다.
동해안별신굿은 매년 3~5월과 9~10월 사이에 진행된다. 어촌마다 굿청(굿판을 벌이는 공간)은 바닷가 백사장이나 넓은 터에 마련됐다. 꽃·과일이 영그는 따뜻한 계절이 아니고선 굿청을 차릴 엄두도 내기 어렵다는 게 김 회장 설명이다.
마을마다 굿을 청하는 주기는 3~10년 사이. 수호신인 골매기신을 비롯해 고혼이 된 마을 어른들도 굿을 올리는 대상이 된다. 김 회장은 “굿의 효험이 3년, 10년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일정 기간이 지날 때마다 구성원들이 마을의 수호신과 어른들을 잊지 않고 인사를 올린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굿을 청하고 행하는 모든 과정에서 마을의 공동체성이 발휘돼야 한다. 제주와 도가집(제물을 도맡아 준비하는 집)을 선정하고 굿에 드는 경비를 각출하는 과정은 모두 주민 회의를 통해 결정된다.

경비는 주민의 재산 형편을 따져 차등을 두고 추렴한다. 통상 선주가 더 많이 부담한다. 주민들은 굿의 석수(판 수)와 제일(굿하는 날)을 정해 굿을 청하고 계약한다. 부산에선 칠암·일광·대변·학리 등 기장 일대 6개 어촌마을이 매년 돌아가며 별신굿을 청했다. 김 회장은 “부산에선 보통 24석수 이상의 굿을 청한다. 경북 등지에서는 하룻밤을 새 굿을 청하는 경우도 있다”며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코로나19 때문에 학리 별신굿을 못 했다. 마을 어른들께는 ‘시기가 시기인 만큼 조상이나 수호신이 헤아려주실 것’이라고 한다. 우리도 마음 한편이 무겁다”고 덧붙였다.
동해안별신굿을 이끄는 인물은 쾌자를 입은 무녀다. 남성들은 화랭이(굿판에서 장구·꽹과리 연주)로서 무녀의 노래와 춤을 뒷받침한다. 굿의 규모가 큰 데다 곳곳에 오락성이 가미돼 제일이 되면 마을은 축제 분위기로 들뜬다. 굿판은 보통 제전을 정화하는 부정굿으로 시작한다. 이어 마을 수호신을 굿청에 봉안(골매기 청좌굿)하고 나면 고깔에 염주 장삼을 두른 무녀가 가창을 연행(세존굿)하면서 조상신과 성주신을 축원해 달랜다(조상·성주굿).
심청굿은 심청전의 이야기를 읊는 서사무가이다. 눈병을 없애는 의미가 담겼는데 관객들이 가장 고대하는 순서다. 마마(천연두)를 막는 손님굿 또한 빠질 수 없는 재미를 준다. 과거에는 손님굿이 연행되면 구경꾼 중 손주를 보호하고 싶은 할머니가 나서 굿청에 돈을 올리기도 했다. 이어 용왕신에게 축원을 올린(용왕굿) 뒤 제신을 수행하는 수비들을 먹이는 거리굿이 연행된다. 김 회장은 “굿이 행해지는 과정에서 마을사람과 무녀들은 서로를 존중했다. 다만 최근엔 ‘화를 피해야 한다’며 치성을 올리는 수단으로 굿을 강요하는 사례가 많은 듯하다. 굿에 대한 인식이 나빠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김 회장은 10여 년간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로도 활동했다. 그 덕인지 아들(정연락), 며느리(홍효진) 등 김 씨 가계의 사람들 이외에도 전국에서 동해안별신굿 배움을 청하는 이가 많다. 그가 가장 아쉽게 여기는 것은 전수관의 부재다.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고도 전승 전용공간이 없는 건 매우 드물어요. 이곳 전수관도 월세에요. 방음 처리를 해 사용하고 있지만 교육하기에는 좋은 여건이 아닙니다. 문화재청과 부산시에 계속 건의하는데 결실이 없네요. 하루빨리 전수 공간이 완비되길 바랍니다.”
※ 제작지원 B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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