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광해군 또는 광종이라 불리는 군주

1623년 4월 조선의 한 붕당인 서인(西人) 일파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을 왕으로 옹립했다. 반정 주모자들은 병사 2,000명을 몰고 창의문을 거쳐 창덕궁을 습격, 궁을 지키던 훈련도감의 내응으로 전투 없이 궁을 장악했다. 궐 밖으로 피신했던 광해군은 이내 체포돼 강화도에 위리안치됐고, 광해군의 실세 대북파는 대부분 참수되거나 귀양 갔다.
반정의 명분은 광해군이 친형 임해군과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사사한 것과 명나라에 사대하지 않고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 노선을 견지했다는 거였다. 왜란으로 소실된 궁 복원 등 잇단 토목공사로 민생을 어렵게 하고 간신들을 곁에 두어 정사를 어둡게 했다는 것도 포함됐다. 조선왕조실록(인조 1년 3월 14일·음력)은 '광해군 즉위 이후 죄를 받아 갇힌 사람을 석방'하고 '광해를 폐하여 군으로 봉하다'라고 그날 일을 기록했다.
광해군은 선조와 후궁인 공빈 김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서자를 세자로 삼는 걸 꺼렸던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피란을 떠나야 할 판이 되자 1592년 그를 왕세자로 책봉했고, 광해군은 임금 대신 궁에 남아 전란을 수습했다. 이후 계비 인목왕후가 적자인 영창대군을 출산하자 다시 적통 옹립론이 대두됐지만 1608년 선조가 갑자기 숨지면서 광해군은 기사회생 34세에 즉위했다.
최근 사학자들은 그를 개혁 군주라 평한다. 탕평책으로 당쟁을 견제했고, 조세(대동법) 개혁과 양전사업으로 왕권과 민생을 챙겼다. 국경 방비에 힘쓰는 한편 후금과 명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전개함으로써 새로운 전란의 불씨를 차단했다.
영창대군 등 정적 숙청은 광해군 개인의 폐륜적 성향 탓이라기보다 붕쟁의 결과로 보는 게 타당하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붕당의 알력은 서자 출신 국왕이 탕평으로 다스리기엔 지나치게 사나웠다. 성공한 쿠데타의 기록에 가려진 그의 진가에 주목하는 이들은 그를 '광종'이라 칭한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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