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헌법 앞세운 '체육관 대통령'의 탄생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박정희 대통령은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도무지 환호할 수 없었어. 야당의 젊은 도전자 김대중에 맞서서 별의별 짓을 다 해야 했기 때문이지. 온갖 관권을 동원하고 막대한 돈을 뿌린 건 새로울 것도 없었다. “〈동아일보〉 김충식 기자는 1971년 국가 예산인 5242억원의 10%가 넘는 600억원 내지 700억원에 달하는 엄청난 선거자금을 썼다는 얘기를 당시 여당 고위층으로부터 들었다(〈프레시안〉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영화 〈킹메이커〉를 보면 김운범(김대중) 후보의 정치적 모사였던 서창대(엄창록)가 김대중과 결별하고 여당 쪽으로 넘어가는 스토리가 등장하지. 서창대는 ‘신라’ ‘백제’를 끌어들여 지역감정 폭탄을 제조한 것으로 설정돼 있어. 그래도 김대중 바람이 가시지 않자 박정희는 배수의 진까지 친다. “이것이 제가 여러분께 저를 찍어달라고 하는 마지막 선거입니다”라고 읍소한 거야.
천신만고 끝에 당선된 7대 대통령 박정희는 임기를 시작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심상찮은 움직임을 보인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는 좋은 핑곗거리가 되었지. 그간 죽의 장막 속에 잠자던 ‘중공(중국)’이 미국과 화해하고 유엔에 가입해 ‘자유중국(타이완)’이 국제무대에서 축출되는 상황이 대표적이었어. 1971년 10월25일, 유엔총회 결의 제2758호에 따라 유엔 본부에서 중화민국 국기는 땅에 떨어졌단다. 그리고 오성홍기가 펄럭였어. 6·25 때 한국군을 괴롭혔던 중공군이 휘두르던 국기였지. 이 상황은 박정희 정권에 좋은 먹잇감이 된다.
1971년 12월 박정희 정부는 난데없이 ‘비상사태 선언’을 발표한다. 정부 시책은 국가안보를 최우선으로 하며 취약점이 될 일체의 사회불안을 용납하지 않겠다면서 엄포를 놓았어. 그런데 국가안보를 위한 비상사태를 선언했던 박정희 정권이 1972년 봄과 여름에는 남북회담 정국을 주도했다.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을 주창한 7·4 남북공동성명은 역사적인 남북 합의의 효시였지만 남북 모두에게 버림받는 잔인한 운명에 처했지. 북한의 김일성은 남북대화가 좌초된 후 유일사상 체계를 강화하며 김씨 가문의 독재체제를 완성시켜 나갔어. 남한의 박정희는 10월 유신을 통해 ‘공화국’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운 제4공화국을 출범시켰고.
조갑제닷컴에 기록된 1972년 10월17일 박진환 특별보좌관의 증언. “아침에 우리 특보들은 부름을 받고 대통령의 집무실 안쪽에 있는 방에 모였습니다. (…) 커피가 나오고 이어서 소책자 한 권씩을 돌립디다. 표지를 넘기니까 ‘국회해산’ ‘비상계엄령 선포’란 글이 눈에 홱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박진환의 기록에 따르면 그 자리에서 이를 반대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도 놀랐던 모양인지, 이런 말을 했다고. “그 자리에서 누가 반대할 줄 알았는데 아무도 하지 않더군.”
당시 국정감사 중이었던 국회는 벼락처럼 내려진 유신 선포라는 황망한 비보를 듣는다. “우리 조국의 평화와 통일, 그리고 번영을 희구하는 국민 모두의 절실한 염원을 받들어 우리 민족사의 진운을 영예롭게 개척해 나가기 위한 나의 중대한 결심을 국민 여러분 앞에 밝히는 바입니다.” ‘저’도 아니고 ‘나’의 중대한 결심. 1972년 유신헌법 선포와 함께 국민들이 대통령을 직접 뽑을 기회는 사라지고 말았다.
제4공화국 헌법이 박정희를 ‘총통’으로 규정한 건 아니었어. 엄연히 대통령제였고 임기는 6년으로 프랑스보다 1년 짧았으며 대통령 선거도 치러지기는 했다. 단, 국민들의 손이 아닌 매우 기이한 이름의 ‘선거인단’에 의해 대통령 선거가 행해졌지. 이름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 정부는 유신헌법이 선포되자마자 부랴부랴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를 치른다. 여기서 당선된 대의원 2359명이 1972년 12월23일 서울 장충체육관에 모여 제8대 대통령 선거를 하게 돼. ‘체육관 대통령’의 시작이었지.
무효표 한둘 빼고는 다 찬성인 선거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대통령 선출 이외에도 대통령이 추천하는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뽑는 막강한(?) 권한을 누렸다. 그러나 실상은 플라스틱 음식 같은 기관이었어. 겉만 화려한 전시용 기구일 뿐이었지. 대의원 2359명이 만장한 가운데 ‘선거’가 이뤄졌다. 이윽고 발표된 선거 결과는 그들 스스로를 놀라게 했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찬성표가 2357표에 이른 거야. 2표는 기표에 실수한 무효표였어(무효표를 던진 사람들이 곤욕을 치렀다는 후문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박정희는 이 99.9%의 지지율로 대통령이 된 뒤 온갖 긴급조치를 발동하며 국민들의 입을 막고 손발을 묶었다. 그리고 6년 뒤인 1978년 또다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열린다. 이번에는 2581명으로 구성됐고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장’ 박정희 대통령은 그들을 대상으로 이렇게 축사를 한다. “정파 간의 극한투쟁과 선동정치의 폐해 속에서 무책임한 인기 전술 등으로 국론은 분열되고 내일의 진로도 정립하지 못한 채 목전의 일에만 급급하는 풍조가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가득 차 있던 때였습니다. (…) 국정의 능률을 극대화하고 국력을 조직화해서 내외 정세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면서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해 나가고자 우리는 마침내 구국적 일대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것이 10월 유신이었습니다.”
선거를 앞두고 표를 달라는 사람의 연설이 아니라 휘하 병력을 집결시켜 지난날을 회고하는 사단장의 훈화에 가깝지. 이에 감명받았는지 제2기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무효표를 절반으로 줄이는 탁월한 성과를 낸다. 두어 달 뒤 실시된 체육관 선거에서 2578명 참석자 중 2577명이 찬성하고 단 1명만이 무효표를 던졌던 거야.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이 무효표의 주인공은 후일 대구에서 국회의원을 지내는 박승국이었다고 한다(〈국회보〉 2014년 6월호). 박승국은 대통령 선거가 투표용지에 기표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름을 적어 내는 방식임을 알고 이에 반발해 무효표를 만들었다고 해. 야사에 따르면 그 무효표의 정체는 ‘박정히’였다. 실수 같기도 하고 애교 같기도 한 이 한 표가 유신시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자존심이었으니 그 참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겠니.
대통령을 선출할 권리와 국민의 기본권을 뿌리째 앗아간 10월 유신이 선포되던 날, 당시 서울대에 다니던 고 김병곤을 비롯해 몇몇 대학생들은 하숙방에서 땅을 두드리며 통곡했어. 훗날 민주운동가로 불리게 되는 김병곤의 증언. “‘이제는 도저히 안 된다’고 전부 다 결의를 한 거야. ‘이제는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다. 사생결단을 할 수밖에 없다. 이거는 아예 없애야지, 그냥 반대하는 차원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죽음은 창졸간에 닥쳐왔지만 부활은 시나브로, 그러나 꾸준히 그리고 악착같이 진행된단다. 김병곤과 그 동료들의 다짐은 부활의 작고도 많은 시작 중 하나였어(다음 호에 계속).
김형민(SBS Biz PD)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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