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의 러시아 군대가 수많은 우크라이나 군인과 민간 사상자를 내며 우크라이나 남부의 요충지 헤르손을 지난 2일(현지시간) 장악하면서 이곳에서 145km 떨어진 우크라이나 최대 항구 도시 오데사도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다. '흑해의 진주'로 불리는 오데사를 러시아가 점령할 경우 흑해 전역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할 수 있게 돼 이 지역은 전략적 요충지로 꼽힌다.
또 이곳은 전세계 반도체의 핵심 소재 중 하나인 희귀가스(Rare Gas)를 생산하는 '크라이언(Cryin)'이라는 회사가 있는 곳이다. 반도체에 빛을 쪼여 패턴을 형성하는 노광공정과 패턴 외에 불필요한 부분을 깍아내는 식각 공정에 각각 사용되는 네온(Ne)과 크립톤(Kr) 가스는 반도체 생산 공정의 핵심 소재다.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크름(크림) 반도를 침공할 당시 네온 가스 가격이 600% 이상 급등한 것도 그 특수성 때문이다. 전세계 네온의 70% 이상을 이 지역에서 생산해온 만큼 반도체 산업에는 중요한 지역이다.
2014년의 학습효과로 업계에선 공급 중단 문제가 발생할 것에 대비한 컨틴전시플랜(비상계획)을 마련해왔다. 반도체 업계가 이번 전쟁 발발 후 생산에는 큰 위기가 없을 것이라며 침착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다.
하지만 국제정세의 급격한 변화로 단기적인 수급 불균형이 공급망의 위기를 불러 올 수 있다는 우려도 미국과 일본 외신들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코로나19가 만들어낸 자동차용 반도체 부품의 공급망 붕괴의 기억 때문이다.
자동차 수요가 없어 부품 주문을 끊었다가 재주문하면 금방 나올 줄 알았던 자동차용 반도체는 시간지연 현상으로 생산공간을 IT제품에 빼기면서 수급불균형이 발생했다. 이후 물량부족을 걱정한 선구매까지 겹쳐 공급 부족은 심화됐다. 이런 자동차용 반도체의 악순환은 향후 몇년간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희귀가스의 경우도 당장 기존에 확보한 재고물량으로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이고, 대체 가스 등으로 생산에 임하는 기업들로 인해 향후 수개월간 공급 차질은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 업계에는 많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장기화될 경우 생산중단에 따른 공급부족과 대체 가스를 확보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자동차용 반도체 부족현상에서 볼 수 있었던 수급불균형이 우려된다는 지적도 있다. 지나친 우려는 필요 없지만 미래를 알 수 없는 변수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네온 등 희귀가스(Rare Gas)는 무엇이고, 우크라이나는 왜 이 분야에서 경쟁력이 높고, 러시아 전쟁으로 인해 희귀가스의 부족이 전세계 반도체 시장에는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 지를 심도 있게 파봤다.
우크라이나 오데사주 오데사 미트나 광장(Mytna square) 인근에는 현재 러시아의 잔혹한 공격에 신음하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울음(Crying)을 연상케 하는 '크라이언 엔지니어링'(Cryoin Engineering)이라는 회사가 있다.
이 회사는 반도체에 핵심적으로 들어가는 희귀가스인 네온(Ne)과 제온(Xe), 크립톤(Kr), 헬륨(He) 등을 생산하는 우크라이나의 강소기업이다.
사실 울음소리(Crying)와는 관련이 없는 극저온 기술을 기반으로 한 희귀가스 생산업체로 크라이어젠(Cryogen: 극저온체)과 'in'을 결합해 Cryoin(크라이언)이라는 이름으로 현재 140명 가량의 직원이 일하고 있는 25년된 회사다. 공기를 영하 240~260℃(도씨) 이하로 냉각시켜 액화공기를 만들고 여기서 다양한 가스를 생산한다.
2020년 우리나라가 수입한 전체 네온의 53% 가량을 우크라이나에서 수입할 때 이 회사가 대부분 물량을 공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엔 네온 수입 1위국이 중국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국내 사용 네온 수입의 23%는 우크라이나가 맡고 있다.
오데사 지역이 네온 생산 중심지역으로 성장한 배경은 구소련 당시 서유럽으로부터의 미사일 공격을 방어하겠다는 목적으로 이 지역에서 레이저 무기를 연구 개발한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된 네온의 대부분은 오데사에서 출발해 흑해를 통해 전세계로 전달되고 있다. 다만 실제 미사일 방어용 레이저 무기는 크라이언이 생산하는 헬륨 네온 혼합가스를 소스로 한 엑시머레이저가 아닌 더 출력이 강한 이산화탄소(CO2) 펄스를 이용한 CO2 레이저가 주로 이용된다.
크라이언은 러시아 철강 회사들로부터 사들인 원유가스(Crude Gas)를 원료로 해 구소련 시절부터 이어온 극저온 공기분리기술을 활용해 네온 뿐만 아니라 제논, 크립톤, 헬륨 등을 생산하고 있다.
미 와이어드(The Wired)에 따르면 지난달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크름(러시아식 표기 크림)반도로부터의 미사일 공격에 크라이언은 네온 가스 등의 생산을 일시 중단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이 회사의 홈페이지와 페이스북, 트위터 등의 모든 활동이 중단돼 있는 상태다. 러시아군의 공격 범위가 넓어지면서 오데사의 함락도 머지 않았다는 전망이 나온다.
공기 중엔 질소 분자(N2: 이하 공기 중 함유비중 78.084%)와 산소 분자(O2: 20.946%)가 대부분(약 99%)이다. 아르곤(Ar: 0.9340%), 이산화탄소(CO2: 0.0407%), 네온(Ne: 0.001818%), 헬륨(He: 0.000524%), 메탄(CH4: 0.00018%), 크립톤(Kr: 0.000114%), 수소 분자(H2: 0.000055%), 제논(0.0000087%)은 극미량이 존재한다. 이 가운데 불활성 가스인 아르곤, 네온, 헬륨, 크립톤, 제논 등을 희귀가스라고 부른다.
이 희귀가스들은 철강업체들이 제련 공정에 필요한 순수 산소와 순수 질소를 공기 중에서 뽑아낸 후 남는 불순질소(Crude Gas)에서 추출한다.
철강업체들은 제철소 용광로의 온도를 최대 2300℃까지 높이기 위해 순수 산소를 사용하고, 1.5~2개월마다 한번씩 용광로 내 정비를 위해 내부에 열풍을 넣는 것을 잠시 멈추는 휴풍시 용광로 내부 기압이 낮아지지 않도록 질소로 채운다. 이를 위한 순수산소와 순수질소를 극저온 공기분리장치(ASU: Air Separation Unit)를 통해 추출한다.
공기 중에서 산소와 질소를 추출하는 방법은 공기를 고압, 저온으로 액화시키면서 진행된다. 임계기압인 49.7기압에서 공기를 급냉해 -182.5℃에서 액화 산소를, -185.8°C에서 액화 아르곤을, -195.8℃에서 액화질소를 뽑아내는 식이다. 비등점(끓는점)의 차이를 이용하는 것으로 ASU의 하층부에는 액화산소가, 상층부에는 액화 질소가 모이는 형태다. 네온과 헬륨의 생산방식도 비등점 차이를 이용하는 것은 같다.
산소분리 공정 과정에 필요한 순수산소와 순수질소를 추출하고 남은 나머지 공기 중에 액화되지 않은 원유가스(Crude gas)가 남는다. 업계에서 통칭 불순질소라고 부르는 이 가스 내에는 끓는 점이 낮은 네온(비등점 -246.046°C)과 헬륨(-268.9°C)이 들어 있다.
1차 정제된 이 불순질소 기체 내에는 45~50% 비중의 네온과 12~14% 정도의 헬륨이 들어 있다. 크라이언이나 TEMC(국내 네온 생산업체) 등 희귀가스 생산업체들은 이 가스를 철강업체들로부터 받아서 식스나인(6N: 99.9999%) 순도의 네온 등을 추출하는 것이다.
반도체 공정에 쓰이는 또 다른 희귀가스인 제논(비등점 -108.099°C)과 크립톤(-153.4°C)은 산소보다 끓는 점이 높아 고온공정과 초저온 공정을 묶은 좀 더 복잡한 추출 과정을 거친다.
이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많은 인명 살상의 문제도 있지만, 전세계 반도체 산업에 큰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는 우려도 이같은 희귀가스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대한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다.
반도체는 빛의 예술이라고 할 정도로 레이저 등 광원을 활용하는 공정이 많다.
현재 7나노 이하 초정밀 미세 EUV(극자외선) 공정에서는 EUV 장비 내 진공 속 액체 주석(Sn)에 이산화탄소 펄스 레이저를 1초당 5만번씩 쏴 13.5nm의 빛(EUV)을 만든다. 이 때 빛의 세기를 강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출력이 센 이산화탄소 레이저다.(CO2 레이저는 출력을 높여 미사일 방어용 레이저 무기에도 사용된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여전히 생산공정에서 90% 이상을 사용하는 10나노대 공정의 DUV(심자외선)에는 이산화탄소 레이저 대신 네온과 헬륨을 섞은 엑시머레이저로 쏴 광원(ArF 빛)의 세기를 높인다.
여기에 쓰이는 엑시머레이저는 우리가 일상 생활 속에서도 자주 접하는데 레이저 프린터나 편의점 등에서 물건 값을 계산할 때 제품 정보를 읽는 바코드 리더기, 프리젠테이션을 할 때 쓰는 레이저 포인터에 들어가고, 피부치료나 각막을 깎는 라식 수술 등에 사용되기도 한다.
크립톤 가스는 반도체 메탈 공정에서 사용하는데 주로 텅스턴 CVD(화학기상증착) 공정에 사용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제논(크세톤)은 반도체 패턴을 형성한 후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내는 에칭 가스로 쓰인다. 128단 V낸드 등 적층시 구멍을 뚫을 때도 사용하며 다른 용도로는 의료용 마취제로도 사용되는 희귀가스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제조 공정에 꼭 있어야 하는 특수 가스이기는 하지만, 일부 희귀가스가 없다고 해서 반도체 생산을 아예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필수적인 가스이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 관계자는 "2014년 러시아의 크름(크림)반도 병합 때 급등한 네온 가격을 경험한 후 네온, 제논, 크립톤, 헬륨 등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로부터 오는 6대 희귀 가스에 대한 준비를 해왔다"며 "이번 전쟁의 영향이 아주 없다고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영향이 아주 많다는 것도 아닌 그런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미국과 중국이 무역분쟁을 벌이면서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을 제한한 미국의 조치에 상응하는 조치로써 중국이 네온 등 희귀가스의 수출을 제한할 경우 특수가스 대란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특히 미국이 조명 등 전기용품과 반도체에 사용하는 네온의 90%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수입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전쟁으로 네온 수입 물량을 돌릴 수 있는 공급처가 중국 밖에 없는 상황이기 됐다. 러시아와 중국 양쪽에서 희귀가스 공급이 차단될 경우 문제가 크게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업계에선 이같은 우려를 기우라고 평가한다.
최근 포스코와 함께 네온 생산 국산화에 성공한 충북 보은에 위치한 티이엠씨(TEMC)의 유원양 대표는 "네온 가스 자원이 무기화되는 등의 얘기는 지나친 우려로 소설 같은 얘기"라고 잘라 말했다.
유 대표는 "중국이 네온 수출을 제한하기도 힘들 뿐더라 반도체 제조공정에서 네온을 덜 사용할 수 있는 공정이 있고, 또 다른 가스를 대체재로 사용하는 등의 다양한 방법도 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또 희귀가스와 희토류는 그 양이 지구에 적다는 측면에서는 같지만 '자원의 무기화'를 할 수 있는냐는 측면에서는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백금, 팔라듐, 이리듐, 망간, 코발트, 니켈 텅스텐, 리튬, 붕소, 우라늄 등 산업에 핵심적으로 사용되는 희토류는 특정 국가의 땅에 묻혀 있고, 그 양이 제한돼 있어 해당국가에서 수출하지 않으면 공급받을 수 없어 자원의 무기화가 가능하다. 하지만 희귀가스는 지구 어디에나 존재하는 공기가 원료여서 경제성과는 별개로 생산시설만 갖추면 어느 국가에서나 뽑을 수 있어 자원의 무기화가 힘들다.
일례로 희토류는 37%가 중국의 내몽골 지역에 분포돼 있어 중국이 이를 무기화할 경우 다른 국가가 상당한 어려움을 겪지만, 네온이나 헬륨 등은 공기 중에서 추출해 경제성 있는 시설을 누가 갖추느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같은 희귀가스의 국산화도 공급부족에 숨통을 틔워주는 소식이다. 포스코는 지난 1월 12일 TEMC와 손잡고 네온 기술 국산화 및 생산설비를 개발하고 제품을 내놨다. 이번에 준공한 설비는 고순도 네온 기준 연간 약 2만2000Nm3(노멀 입방미터)를 생산할 수 있으며, 이는 국내 네온 수요의 16%가량을 충족할 수 있다.
포스코 관계자는 "산소공장에서 크루드 네온(Crude Ne)을 생산하고 이를 TEMC에 공급하면 이 회사가 이를 고순도 네온으로 정제해 최종 고객에게 판매한다"고 설명했다.
앞서 ASU를 공급하는 프랑스 산업가스 전문 에어리퀴드 엔지니어링&컨스트럭츠사는 하루에 1700톤의 산소 생산 능력을 가진 공기분리장치(ASU) 제작을 위해 포스코와 계약을 맺었다고 밝혔다. 이 ASU는 하루에 148kg의 네온 가스를 추출할 수 있는 농축기를 붙일 수 있는 규모다.
에어리퀴드는 포스코와 30년간 포항과 광양 사업장에 20개의 ASU를 공급했는데, 이 장치에 네온 원료를 농축할 수 있는 설비를 붙이면 더 많은 네온 크루드 가스를 확보해 희귀가스 생산량을 늘릴 수 있다는 얘기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도 "현재 네온 가스의 비축량도 3개월 정도로 여유가 있을 뿐더러 네온 공급이 달릴 경우 줄이거나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있어 과거 일본의 부품 소재 수출금지 때와는 달리 급박한 상황은 아니다"며 지나친 우려를 경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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