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녀산성은 주몽 때의 성인가?
[고구려사 명장면-144] 광개토왕 비문에 "(추모왕이) 비류곡 홀본 서쪽 산 위에 성(城)을 쌓고 도읍했다"고 기록하고 있듯이, 흘승골성 아니 오녀산성은 주몽 때에 아니 꼭 주몽 때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주몽왕 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축성된 성일까? 오녀산성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서는 이 점부터 확인하는 것이 순서일 게다. 먼저 밝혀둘 점은 이 글에서는 고고 유적으로 가리킬 때는 오녀산성으로, 역사적인 성으로 가리킬 때에는 흘승골성으로 표기하겠다. 그동안 대부분 오녀산성이란 이름으로 써왔기 때문에 혹 독자분들의 혼동이 있을까 봐서이다.
오녀산성에 대한 조사는 20세기 초에 일본 관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1912년 겨울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는 오녀산성을 조사하여 서문지 일대와 동벽, 집수시설을 포함한 성 내외의 여러 모습을 유리건판 사진과 스케치 등으로 남겼다. 그 뒤에도 여러 일본인 학자들이 오녀산성을 답사하였다. 이렇게 하여 오녀산성은 고구려 산성 유적으로 알려졌지만, 그 역사적 실체에 대해서는 막연한 추정뿐이었다.
굳이 도리이 류조의 조사 건을 언급한 이유는 이때 찍은 유리건판 사진들을 몇몇 소개하고 싶어서이다. 요즘 오녀산성 모습은 많은 분들이 답사를 다녀와서 올린 사진이 인터넷에 가득하고, 또 필자의 사진도 그와 그리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다소 식상한 면이 없지 않다. 그래서 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도리이의 유리건판 사진을 통해 110년 전 오녀산성의 모습을 보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필자가 오녀산성에 처음 오른 때는 1995년 5월이었다. 일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1993년에 첫 고구려 유적 답사를 다녀왔는데, 경비 부담도 부담이려니와 적잖은 시간을 투입하고도 현지답사 성과는 그리 효율적이지 못했다는 판단으로 다시 답사 간다는 생각은 접어두고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마친 직후에 행운이 찾아왔다. 모 일간지에서 만주의 고구려 유적 탐방을 기획했는데, 4명으로 꾸려진 팀에 합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더욱 팀을 이끄는 분은 유명한 재일 역사학자 이진희 선생님이었다. 1972년에 일제참모본부에 의한 광개토왕 비문 석회도부설을 주장하여 한일 양국 학계에 충격을 주었던 주인공 그분이었다.
이진희 선생님은 이미 두어 차례 일본 소장학자를 이끌고 집안과 환인은 물론 요동의 주요 고구려 성을 두루 답사한 터였다. 국내 시민들에게도 만주의 고구려 유적을 제대로 소개해야 한다는 뜻으로 모 신문사를 설득하여 이 기획이 이루어진 것이다. 필자는 고구려 유적을 제대로 답사한다는 설렘도 적지 않았지만, 이진희 선생님을 모시고 귀동냥으로 배울 게 적지 않으리라는 기대가 무엇보다 컸다.
10여 일이 넘었던 그 탐방길에서 이진희 선생님께 배웠던 가장 큰 공부는 고구려 유적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역사를 대하는 학자로서의 꼿꼿함과 성실함이었다. "저런 기개와 의지를 갖고 계시니 일본 학계에서 흔들리지 않고 홀로 비판의 목소리를 늦추지 않는구나"라는 존경의 마음이 절로 들었다. 66세에도 불구하고 산성을 오를 때에는 언제나 앞장서 계셨다. 필자가 그 뒤 누구보다도 많이 만주 고구려 유적을 탐방하도록 노력하게 된 계기이다.
오녀산성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문득 이진희 선생님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 탐방 길에서 인상적인 답사 중 하나가 오녀산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환인시 자체가 외국인이 숙박할 수 없는 제한 지역이었는 데다가, 출입 금지 구역인 오녀산성 답사는 한국인으로서는 더더욱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런데 이진희 선생님의 명성은 중국 학계에도 알려져 있어서, 그분 덕분에 요령성 문물국의 허가 아래 환인에서 1박하고 오녀산성 답사도 이루어진 것이다. 대신 환인현 문물관리소장이 안내라는 명분 아래 우리 팀을 감시하기 위해 하루 종일 따라다녔다.
1986년 오녀산에 송신탑을 세운 뒤, 지금은 탐방객들이 서쪽 절벽으로 999개 계단을 오르는 그 길에는 당시는 계단이 아니라 산 정상까지 물품을 끌어올리는 리프트 레일이 설치되어 있었다. 5월이었지만 철제 레일은 손으로 잡기 뜨거웠고, 가파른 레일 옆에 깔아 놓은 잔돌들은 한발 내디딜 때마다 흘러내려 미끄어지기 십상이었다. 정말이지 죽을 둥 살 둥 하면서 오녀산 정상에 올랐다. 오녀산성이 난공불락 성이라는 점을 그때 온몸으로 배운 셈이니, 그 경험을 어찌 잊겠는가. 요즘은 오녀산성에 갈 때 절벽 아래까지는 차량으로 올라가고 거기에서 999개 계단을 천천히 오르게 되니, 오녀산성이 천혜의 요새라는 점을 제대로 느끼기 어려울 듯싶다.
물론 그때 정상부의 널찍한 대지는 온통 숲과 풀밭뿐이었다. 요즘에 오녀산성에 가면 발굴조사 결과로 크고 작은 건물지들이 유적으로 전시되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 시대의 역사적 자취를 탐색할 수 있어 나름 탐방하는 재미가 있다. 하지만 1995년 그때 처음 오녀산성에 올랐을 때에는 유적이고 뭐고 그보다는 더 가슴에 와닿는 게 너른 평탄지였다. 가파르게 올랐던 절벽 위에 이런 평탄지가 넓게 펼쳐져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물론 도면상으로 정상부 평지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평탄지를 직접 눈으로 보고 가로질러 다녀보고서야 이 오녀산성이 방어와 거주가 잘 어울리는 천혜의 요지임을 제대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런 지형을 골라 성곽을 축조한 고구려인의 혜안에 절로 감탄하게 되었다. 2004년도 보고서에 따르면 이 정상부 평탄지의 크기가 남북 길이 600m, 동서 너비 110~200m가량 된다고 하니 독자분들도 어느 정도 넓이인지 가늠하실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하게 계산해도 축구장 9개 이상 들어갈 크기는 되지 않을까 싶다.
오녀산성 정상부에서는 환인댐 저수지와 환인 시내를 굽어볼 수 있다. 사방 주위를 모두 공제할 수 있는 요충지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정상에서 내려갈 때에는 올라온 서쪽 절벽 반대편 동쪽 산비탈로 내려갔다. 성의 동쪽과 남쪽은 상대적으로 경사가 다소 완만한 편이지만, 그렇다고 그리 쉽게 오르내릴 수 있는 경사면은 아니었다는 기억이다. 지금은 탐방로를 잘 만들어 놓았으니 하산 길이 그리 어렵지 않지만, 1995년 당시에는 길도 제대로 없는 곳을 거의 구르다시피 내려왔다.
그래도 그곳에서 비로소 제대로 된 인공 성벽을 만났다는 그 감동이 지금도 생생하다. 오녀산성 아니 흘승골성은 고구려인에게만 성지(聖地)가 아니었다. 고구려사를 공부하던 내내 나에게도 성지나 다름없었으니 그 감동이 어떠하였겠는가. 차디찬 성벽 돌과 덮고 있는 푸른 이끼를 어루만지고, 길게 뻗은 높은 석축 성벽을 바라보니, 비로소 오녀산성이 '성곽'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오녀산성 성벽 전체 둘레가 4574m에 이르는데, 그중 4189m는 자연 절벽을 이용하였고, 경사가 완만한 산비탈 동쪽과 남쪽 그리고 정상부의 주요 계곡부에만 총 길이 565m 정도 인공 석축 성벽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대략 12% 정도만 인공 성벽인 셈이니, 자연 지형을 얼마나 잘 활용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답사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석축 성벽이 있어야 고구려인의 자취를 제대로 실감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성벽의 축성 연대를 파악하려면 성벽을 절개하여 기초부까지 발굴하는 등 좀 더 면밀한 발굴이 필요하다고 고고학자들은 말한다. 아직까지는 중국 측에서도 본격적인 발굴보다는 축성의 형태와 방식을 근거로 오녀산성 성벽의 축조 시기를 고구려 초기로 파악하고 있는 학자들이 다수이다.
그런데 최근 연구에 의하면 성벽과 마찬가지로 돌을 가공하여 쌓는 적석무덤의 축조 양상과 비교해서 보면, 오녀산성 성벽의 축조 시기는 3세기 이전으로 올라가기 어렵다고 한다. 무슨 뜻인가 하면 결코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이 주몽왕이나 고구려 건국 초기에 쌓아진 게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중후기에 축성된 성벽 축조와 비교하면 쐐기꼴 성돌이 정연하지 못한 점이나 다소 서투른 느낌을 주는 겉쌓기 방식을 보면 현재 남아 있는 오녀산성 성벽을 만든 시기는 이른 중기일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건국기라는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에 필자도 동의한다.
동남부의 인공 성벽이 다소 후대에 만들어졌다고 해서 오녀산성이 건국 초기에 도성을 구성하지 않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러면 초기에 오녀산성의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정상부의 평탄지를 절벽 사이로 올라간 서문 자리와 동북쪽의 트인 부분 일부, 그리고 동남부 산비탈로 이어지는 일부에 방어시설을 갖추면 따로 성벽이 없더라도 훌륭한 성곽이 될 수 있다.
"한나라 사람들은 우리 땅이 돌로 되어서 물나는 샘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때문에 오래 포위하고 우리가 곤핍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연못의 잉어를 잡아 수초에 싸서 맛있는 술 약간과 함께 한나라 군사들에게 보내 먹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높은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밖에서는 성안의 사정을 전혀 알 수 없는 지형에다, 성안에 연못이 있는 오녀산성의 모습이 연상되는 내용이다. 여기 위나암성에 대해서는 국내 천도 문제와 관련하여 논란이 많은 부분이니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말씀드리도록 하겠다.
오녀산성의 동, 남부에 축조된 인공성벽 등은 뒤에 성을 확장하면서 축성되었을 것이며, 이는 오녀산성 즉 흘승골성이 단지 시조의 건국지로서의 모습만이 아니라 시기에 따라 그 성격이 변화되어 갔음을 보여준다. 사실 오녀산성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도 건국지라는 고정된 생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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