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정 시비 있어도 아직 '인간 심판' 필요 [베이스볼 비키니]
● 조금 높은 공도 이젠 스트라이크
● 기록 보면 카펜터, 박세웅 유리
정지택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는 2022년 신년사를 통해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이어 프로야구 1, 2군 심판 55명은 1월 11일부터 휴가도 반납하고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에 모여 새 스트라이크 존 적응 연습을 진행했습니다. 허운 KBO 심판위원장은 첫 연습 자리에서 "스트라이크 존은 규정에 분명히 그 범위가 나와 있다. 규정에 맞는 스트라이크 존을 유연하게 운영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허 위원장 이야기를 뒤집어 생각하면 지금까지 KBO 심판진은 규정과 다른 스트라이크 존에 따라 판정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KBO 공식 야구 규칙은 "유니폼의 어깨 윗부분과 바지 윗부분 중간의 수평선을 상한선으로 하고, 무릎 아랫부분을 하한선으로 하는 홈 베이스 상공"이라고 스트라이크 존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허 위원장은 "그동안 심판들이 높은 공에 있어서는 특히 스트라이크 존을 좁게 가져갔다. 이 부분을 개선하는 데 집중하려고 한다"면서 연습에 참가한 심판진에게 "예전보다 '조금 높다'고 생각한 공은 스트라이크로 봐야 한다"고 조언하기도 했습니다.
높은 공 스트라이크 선언, 짰다
PTS로 측정한 투구 데이터에 실제 심판 판정을 결합해 간단한 머신러닝 모형을 만들면 투구 위치별 스트라이크 확률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일반화 가법 모형(GAM·Generalized Additive Models)'을 통해 2021 시즌 투구 위치별 스트라이크 확률을 따져보면 허 위원장 설명처럼 높은 쪽 코스에는 스트라이크 선언을 잘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그래픽에서 스트라이크 존 위·아래 높이는 각 선수가 KBO에 등록한 키를 바탕으로 타석 숫자에 가중치를 주고 평균을 계산한 결과입니다.)
볼이 늘어나면 당연히 볼넷도 늘어납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인 2017년에는 리그 전체 5만6882타석 가운데 7.9%(4520타석)가 볼넷으로 끝이 났습니다. 이후에는 △2018년 8.1% △2019년 8.5% △2020년 9.4% △지난해 10.5%로 갈수록 볼넷 비율이 높아졌습니다. 프로야구 40년 역사상 타석 당 볼넷 비율이 가장 높았던 게 바로 지난해였습니다.
허 위원장은 "스트라이크 존 하나 때문에 볼넷이 늘어났다고 볼 수는 없다. 최근 투수들 제구력이 떨어지기도 했고, 좋은 투수가 해외로 진출하는 경우도 늘었다. 이런 수많은 요인이 합쳐진 결과"라면서도 "스트라이크 존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투수는 기본적으로 스트라이크 3개를 던져 타자를 잡아야 한다. 그런데 스트라이크 하나가 볼 판정을 받아 스트라이크 4개를 던져야 한다면 투수가 절대적으로 불리한 싸움을 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스트라이크 존이 공 하나 정도 높아진다고 모든 투수가 다 혜택을 누리거나 타자가 크게 불리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투수들은 숨통이 트이겠지만 어차피 높아지는 스트라이크 존을 마음대로 활용할 정도로 제구력이 빼어난 투수는 많지 않다"고 평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화 이글스는 재미있는 선택을 했습니다. 한화는 지난해 5승 12패에 그친 외국인 투수 카펜터(30)와 새 시즌에도 함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5승은 다승 공동 42위, 평균자책점 3.97도 규정 이닝을 채운 투수 19명 중 13위에 해당하는 성적입니다.
누구에게 유리할까
실제로 지난해 카펜터가 이 '가상의 스트라이크 존' 높은 쪽 코스로 던진 공 가운데 104개가 심판 판정 대상이었는데 이 중 70개가 볼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카펜터보다 볼 판정을 더 많이 받은 선수는 루친스키(34·NC 다이노스·76개) 한 명뿐입니다. 비율로 따졌을 때는 카펜터(67.3%)가 루친스키(61.8%)보다 오히려 손해를 더 많이 봤습니다.
이 코스에서 심판 판정을 50개 이상 받은 '토종 투수' 가운데는 박세웅(27·롯데 자이언츠)이 가장 손해를 많이 봤습니다. 박세웅이 던진 공 가운데 76개가 이 코스를 통과해 포수 미트에 들어갔지만 이 중 57개(75.0%)가 볼 판정을 받았습니다. 단, 박세웅은 2020, 2021년 2년 연속으로 피홈런 20개를 기록할 정도로 장타 허용에 약점이 있는 선수로 높은 쪽 코스로 공을 던지는 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물론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이런 예상이 꼭 맞아떨어진다는 법은 없습니다. 예전에는 '어차피 안 잡아준다'는 생각에 높은 코스에 공을 잘 던지지 않던 투수도 존이 넓어지면 새로 이 코스를 공략해 재미를 볼 수도 있습니다. 거꾸로 높은 공을 치지 않던 타자들도 이 코스를 노려서 장타를 치기 시작하면 스트라이크 존 확대가 꼭 투수에게 유리한 결과로 이어진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실제로 2017년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KBO는 당시에도 스트라이크 존을 확대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역시 PTS 데이터를 활용해 스트라이크 존을 추정해 보면 실제로 스트라이크 존이 특히 좌우로 넓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좌우 코너 활용에 능숙한 유희관(36·전 두산 베어스)에게 유리할 것이라는 언론 예상이 잇달았습니다. 실제로는 2016년에는 15승 6패 평균자책점 4.41, 2017년에는 11승 6패 평균자책점 4.53으로 큰 차이가 있다고 하기가 어려운 성적을 남겼습니다.
인간 심판의 자격
물론 한국에서만 이런 일이 있는 건 아닙니다. 메이저리그(MLB)에서도 투구 추적 기술이 발전하면서 "규칙과 실제로 적용하는 존이 다르다"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MLB에서는 심판이 낮은 쪽 코스를 잘 잡아주지 않는 게 문제였습니다. 이제는 거꾸로 "스크라이크 존을 좀 줄여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한국에서는 총재가 직접 마이크를 잡고 "늘려라" "줄여라"고 하는 반면 메이저리그에서는 이런 일 없이도 스트라이크 존이 변했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 J S 러셀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 교수는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라는 책을 통해 "(스트라이크) 존의 크기와 위치가 규정상 아무리 바뀌어도, 또 심판들이 내리는 해석 사이에 갖가지 독창적인 긴장이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심판들이 잡는 스트라이크 존이 메이저리그 평균 타율을 2할6푼으로 유지시키는 결과를 내왔다니, 놀라운 일 아닌가. 이 평균은 잠깐의 예외만 제외하고 약 100년간 유지돼 왔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저는 개인적으로 '로봇 심판'에 스트라이크 판정을 맡기는 데 '아직은' 회의적입니다. 로봇 심판은 여전히 인간 심판보다 판정이 정확하다고 하기 어려운 데다 판정에 걸리는 시간도 더 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팬들이 "오늘은 심판 판정 때문에 졌다"고 책임을 돌릴 수 있는 재미(?)를 앗아갑니다. 야구는 공이 아니라 사람이 들어와야 점수가 나는 가장 인간적인 스포츠니까요.
황규인 동아일보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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