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어질 도서관도 살린 '구청 게시판 권력'

채제우 기자 2022. 3. 3.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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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민원실 대신 '온라인 게시판'에 몰려.. 지자체 정책도 좌우
서울 구청 게시글 2년새 70% 증가, 고발성 민원 많지만 억지 주장도
"시민 참여 늘어난 건 긍정적.. 지역 이기주의로 흐를 우려도"

지난 1월 말부터 2월 초까지 서울 강남구청의 온라인 민원 게시판 ‘구청장에게 바란다’에는 “열린도서관을 계속 유지해달라”는 민원 50개가 잇따라 올라왔다. 열린도서관은 강남구 일원동에 있는 소규모 구립도서관이다. 강남구는 이 도서관이 규모가 작아 이용할 수 있는 인원은 적은데 강남 특성상 임차료가 비싸다며 원래 2월쯤 문을 닫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주민들이 “여기가 일원동에서 도보로 이용 가능한 유일한 도서관이다” “주민들의 도서관을 뺏지 말아달라”라는 민원글을 잇따라 올린 것이다. 결국 구청은 백기를 들었다. 강남구 관계자는 “도서관 이전 계획을 취소하고 전면 재검토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코로나 사태 2년을 겪으면서 지자체 온라인 민원 게시판이 ‘온라인 집단행동’이 일어나는 발화점이 되고 있다. 지역 아파트 커뮤니티나 주민 단체 채팅방 등이 활성화되고 있는 것과 맞물리면서 주민들이 요구 사항을 쏟아내 지자체와 공무원들을 압박하는 곳이 된 것이다. 코로나로 지자체 민원실 등을 직접 찾아가는 걸 꺼리는 분위기도 영향을 미쳤다. 서울의 경우 코로나 사태 전인 2019년 25개 구가 접수한 온라인 민원은 약 4만7200건이었는데, 작년 약8 만2300건까지 늘었다. 2년 새 70% 이상 증가한 것이다.

과거 구청 등 지자체 민원 게시판은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 공무원들이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요즘은 게시판 글이 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한번 게시판에 오르면 주민들 단체 채팅방 등에서 공유돼 금세 퍼져나가는 경우가 많아서다. 지난달 4일 서울 서초구 게시판에는 “어떤 배드민턴장에서 일부 운영진들이 시설 이용을 빌미로 불합리하게 회비를 받는다”는 민원이 올라왔다. 구청 측은 글이 올라 온 지 4일 만에 “운영진이 다소 강압적으로 행동한 사실이 있다는 걸 확인해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조치했다”고 알렸다. 지난 1월 31일에는 ‘강남역 술집 위생 불량’이라는 제목의 민원이 올라오자 4일 만에 해당 업소를 단속했다.

서울 광진구에서도 지난 1월 초 한 주민이 민원 게시판에 “다른 건물에 사는 사람들이 내가 사는 빌라 주차장에 쓰레기를 버린다”는 글을 올리자, 구청 직원들이 며칠 뒤 출동해 현장에서 쓰레기를 무단 투기하던 사람을 적발하고 감시용 CCTV를 설치하는 일도 있었다. 서초구청 관계자는 “공무원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주민들이 지적해 고친다는 점은 긍정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 국민청원과 마찬가지로, 게시판이 활성화하면서 일방적인 억지성 주장도 늘고 있다. 공무원 사이에선 업무 부담이 갈수록 커진다는 불만도 많다. 강북의 한 구청 관계자는 “민원 게시판 글 내용이 주민들에게 빨리 알려지다보니 구청장이 관심이 크다”면서 “그걸 알게 된 주민들이 본인이 원하는 대로 일 처리가 안 되면 같은 민원을 계속 넣는 경우도 있어 힘들다”고 했다. “반려동물의 전용 놀이터를 만들어달라” “00동 주민센터 직원들이 노는 거 같으니 감시해달라” 등 근거가 부족하거나 무리한 요구도 많다고 한다.

박정수 이화여대 행정학과 교수는 “주민들이 온라인으로 더 쉽게, 더 많이 의견을 낼 수 있는 구조 덕에 행정에 참여하려는 시민들이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라며 “다만 ‘님비(Not in my back yard·지역 이기주의)’ 현상이 더 심해질 우려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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