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멘터리] '스밍총공' 아카데미와 한국영화의 미래
Part 1. 넷플릭스는 아카데미 작품상을 거머쥘 수 있을까
지금도 극장 가야만 볼 수 있는 그 세 편의 영화는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리코리쉬 피자"와 스티븐 스필버그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그리고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입니다.
다음 달 열릴 94회 아카데미상 최대의 화제작은 제인 캠피온 감독의 서부극이라 할 수 없는 서부극 "파워 오브 도그"입니다. 작품상·감독상·남우주연상 등 이번 아카데미 최다인 12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습니다. "파워 오브 도그"는 스트리밍 서비스인 넷플릭스가 배급한 영화입니다. 넷플릭스는 2019년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를 시작으로 2020년 "아이리시맨"과 "결혼이야기", 2021년 "맹크",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7"까지 마틴 스콜세지, 노아 바움백, 데이빗 핀처, 아론 소킨 같은 명감독들이 연출한 작품으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두드려 왔습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런 유명 감독들도 전통의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아닌 넷플릭스와 손을 잡았다는 이야기) 넷플릭스는 지난해 5편의 영화로 7개 부문에서 수상했지만, 작품상만큼은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언론들도 이번만큼은 넷플릭스가 아카데미 작품상에 바짝 다가섰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작품상 밖으로 범위를 확대하면 스트리머들의 위세는 더욱 강력해집니다. 주요상만 보더라도 여우주연상 후보인 "로스터 도터"(올리비아 콜먼)와 편집상 후보인 "틱, 틱…붐!"은 넷플릭스 작품이고, 여우주연상(니콜 키드먼)과 남우주연상(하비에르 바르뎀) 후보작으로 오른 "리카르도 가족으로 산다는 것"은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댄젤 워싱턴이 주연한 애플TV+의 "맥베스의 비극"도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단편 3개 부문을 뺀 20개 부문 가운데 13개 부문에 스트리머들이 후보작을 배출한 겁니다. "뉴요커"지는 2월 8일 기사에서 이번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작들에게서 '극장 개봉에서 스트리밍으로 전환'(shift from theatrical releases to streaming) 흐름을 볼 수 있다고 썼습니다. '이 영화를 어느 플랫폼에서 볼 수 있느냐'란 기사가 봇물을 이루는 것 자체가 올해가 영화란 영화관에서 보는 것이라는 공식이 허물어진 공식적인 첫해로 기록될 수도 있다는 방증입니다. 바야흐로 또 다른 의미의 '스밍총공'(스트리밍총공격)의 시대입니다.
Part 2. 창고에서 빛이 바래가는 한국영화들
이런 시대에 한국 영화계 사정은 어떨까요? "오징어게임"이나 "지금 우리 학교는" 같은 한국산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들이 플랫폼에 힘입어 세계시장에서 흥행하고 있지만 한국영화는 맥을 못 추고 있습니다. 미국과 다른 점은 한국 영화는 요즘 아예 개봉도 못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반면, 지난해 말 개봉해 750만 명을 동원하고 있는 마블과 소니의 "스파이더맨:노웨이 홈"을 필두로 이번 주 흥행 1, 2위를 다투고 있는 소니의 "언차티드", 그리고 3월 개봉할 DC와 워너브라더스의 "더 배트맨"까지 할리우드 대작 영화들은 코로나 와중에도 꾸준히 한국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물론 할리우드 영화들은 세계시장을 보고 개봉하는 거니까 우리와 상황이 꼭 같지는 않겠지요.
한국영화계의 주목을 받으며 설 연휴 개봉한 중대형급 영화 "해적:도깨비 깃발"과 "킹메이커"는 지난 16일부터 CGV와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등 3대 멀티플렉스와 씨네Q에서 할인 상영에 들어갔습니다. 이 영화들은 18일 현재 각각 124만 명과 73만 명을 동원하며 코로나 국면에서 박스오피스 상위권에서 나름 선전하고 있지만 손익분기점에 한참 못 미치는 실적에 머물고 있습니다. 7,000원에 할인 상영까지 한다는 것은 상황이 얼마나 절박한가를 말해주는 것이겠지요.
코로나 첫해인 2020년에는 흥행 20위 안에 그래도 한국영화가 16편이나 됐습니다. 그 중 관객 400만 명 이상을 기록한 영화 두 편 ("남산의 부장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과 300만 이상 한 편("반도")을 포함해 100만 이상 관객을 동원한 한국영화가 15편이었습니다. 그런데 2021년에는 흥행 20위 내 한국영화가 6편으로 줄었고, 360만여 명이 본 "모가디슈"를 포함해 100만 이상 관객이 든 영화는 4편에 그쳤습니다. 2020년과 2021년에 전체 관객 수나 극장 매출은 큰 차이가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국내시장에서 한국 영화 점유율도 코로나 이전에는 평균 50%를 유지했지만 지난해는 30%까지 내려앉았습니다. 올해가 아직 시작이라고는 해도 이처럼 추세와 스코어 모두 부정적이라 이미 촬영을 다 마친 "비상선언"(한재림 감독), "외계+인"(최동훈 감독), "한산: 용의 출현"(김한민 감독) 등 시장을 이끌 한국 영화 대작들은 언제 극장에 걸릴지 기약이 없는 상황입니다.
지난 달 24일 전국 극장들의 이익단체인 한국상영관협회는 보도자료를 내서 지금처럼 개봉을 연기하면 "한국 영화산업에 악순환을 가져오고 영화계를 넘어 K-콘텐츠 생태계까지 무너질 수 있다"고 호소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작 한국영화들을 만들어왔던 굴지의 투자배급사들도 생존을 위해 스트리밍용 드라마 시리즈로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신과 함께" 시리즈, "82년생 김지영", "모가디슈" 등을 제작했던 롯데엔터테인먼트는 최근 "서른, 아홉"으로 드라마 기획·제작에도 뛰어들었습니다. CJENM과 NEW는 물론이고 쇼박스 등 투자배급사들도 일찌감치 드라마 시리즈 제작에 나서 영화를 넘어서 '스밍총공'의 시대에 맞는 포트폴리오를 짜고 있습니다.
작품성과 대중성을 갖춘 규모 있는 한국영화가 충분히 공급되지 않고, 그래서 극장도 줄고, 영화관을 중심으로 한 한국영화 시장은 축소돼도 스트리밍 시장이 확대되는 한 K-영상콘텐츠는 계속 만들어질 것이고, 관객들도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서 언제 어디서든 편리하게 영화를 볼 수 있고, 더불어 글로벌 플랫폼에 올라타 해외 시장도 개척할 수 있지 않느냐고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또한 꼭 한국영화를 만들지 않더라도 감독이나 작가 같은 창작자나 배우·스태프는 스트리밍 드라마 시리즈를 만들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고, 실력과 경험도 쌓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스트리밍이 본격화하기 전 기존 한국영화산업의 틀이 아니라 한국 영상콘텐츠 산업의 발전이라는 큰 틀에서 보면 지금의 상황이 꼭 비관적인 것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창작자들에게는 지금의 상황이 기회이기도 합니다. 최근 "해적"과 "지금 우리 학교는"으로 극장과 스트리밍 양쪽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천성일 작가는 여러 인터뷰에서 영화와 드라마 시리즈를 모두 할 수 있는 것은 행운이라고 말했습니다. "OTT 덕에 2시간짜리 영화, 16부작 드라마라는 기존 틀에 얽매이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다는 점은 행운이고 행복한 일" (2월 10일자 연합뉴스 인터뷰)
코로나와 '스밍총공'으로 상대적으로 타격이 큰 쪽은 배급과 극장 부문이겠지요. 영화 산업은 제작, 투자, 배급, 상영이 서로 견제하고 영향을 주고 받으며 굴러 왔습니다. 배급과 상영 부문이 타격을 받아 산업의 균형이 재편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예측하기 쉽지 않습니다. 제작 분야만 떼놓고 보더라도 창작자나 배우의 힘이 너무 강해지면 제작 환경이 나빠지고, 중장기적으로 콘텐츠의 질이 떨어질 수 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또 스트리밍 플랫폼의 힘이 지나치게 강해지면, 기존 영화산업 내에 형성돼있는 불문법적 가치와는 다른 (비즈니스)논리가 영화예술산업을 주도하게 될 가능성은 커질 겁니다. 영화는 산업인 동시에 예술이고, 비즈니스맨과 아티스트가 공존하는 세계라서 비즈니스가 강해지면 아트는 쪼그라들게 마련이고 쪼그라든 아트는 다시 비즈니스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또한 외국 스트리밍 서비스들이 언젠가 한국 영화산업에서 발을 뺀다면 -지금은 위세를 떨치는 스트리밍 시장에도 기승전결이 있을 테고, 글로벌 플랫폼의 특성상 뭔가 투입대비 산출이 안 보인다 싶으면 어떻게 행동하리라는 것은 우리가 외환위기 때부터 목도해 왔습니다- 그때 가서 다시 코로나 이전 한국영화 전성시대의 구조를 복원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겁니다. 이미 무너진 환경은 일거에 되돌릴 수 없으니까요.
Part 3. '스밍총공'과 "시네마틱 익스피리언스"
3월 1일 개봉하는 "더 배트맨" 화상기자간담회에서 캣 우먼 역을 맡은 조이 크래비츠는 "더 배트맨"을 보며 "영화적 경험(Cinematic experience)"을 해보길 바란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하우스 오브 구찌"의 영화사 제공 인터뷰에서 알 파치노도 "시네마틱"이란 표현을 썼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 역시 "더 배트맨"을 보면서 과연 이런 영화를,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영화를, 커봤자 100인치인 TV모니터로 보는 것이 맞을까란 생각을 잠시 해봤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블록버스터가 아닌 작지만 뛰어난 영화 -이를테면 올해 아카데미에서 작품상·감독상·각색상·국제장편영화상 후보에 올라 "기생충" 버금가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일본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는 극장이 아닌 방구석 1열에서 봐도 괜찮을 영화일까요? 기준이 뭘까요?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대세가 스트리밍으로 넘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니까요.
이번 달이 지나가면 지금은 극장에서만 볼 수 있는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작 세 편 중 "리코리쉬 피자" 한 편만 극장에 남습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3월부터 HBO Max에서 스트리밍하기 때문입니다. (미국 기준입니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리코리쉬 피자"는 코닥의 35mm 필름으로 찍은 영화입니다. PTA(폴 토마스 앤더슨의 애칭)는 최종편집권을 양보하지 않(아도 되)는 몇 안 되는 미국의 작가주의 감독입니다. 이제 그런 감독만이 과거의 '영화'를 지키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스밍총공'의 시대입니다.
이주형 기자joole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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