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의 농담(籠談)] 타이베이의 이상한 박수

2022. 2. 16.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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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기의 『갈채와의 밀어』 다시 읽기⑫
▲대만에서 열린 4개국 농구대회 결과를 보도한 경향신문의 1956년 1월 5일자 3면 기사. 

김영기는 자신이 대만에서 열린 4개국 농구대회에 나갈 수 있었던 계기를 존 번의 도움에서 찾는다. 그는 『갈채와의 밀어』에 “한 말로 말하면, 이 4개국 농구 대회에 우리가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의 농구를 아낀 번 씨의 이국(離國) 선물이었다.”고 적었다. 사실 존 번이 한국을 떠날 무렵 대만 4개국 농구 대회에 나갈 대표로 선발된 선수는 기성 스타들이었다. 안병석, 고세태, 김영수, 황태석 등이 그들이다. 대학생 선수는 조병현뿐이었다. 김영기는 백남정과 더불어 이 해외파견 대표 팀에 선발되기를 기대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는 겉으로 ‘실력부족’을 이유로 들었지만 적잖이 실망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대표 팀 선발을 목표로 열심히 훈련한 젊은이의 노력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체육회에서 이미 선발된 대표 팀을 갑자기 해산하고 학생 선발 팀을 이 대회에 참가시키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존 번이 한국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은 당시 대한체육회 회장 이기붕이었다. 번은 이기붕을 만난 자리에서 한국 대표 팀을 학생 선발군으로 구성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이유로 제2회 아시아경기대회에 출전한 현재의 대표 팀이 참패를 기록한 점을 들었다. 물론 젊은 선수들을 내보낸다고 해서 승리를 거둔다는 보장은 없지만 번은 내일의 한국 농구를 위해 외국의 기술을 젊은 사람들이 접해 보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번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터웠던 이기붕은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갑작스런 대표 팀 변경이 이루어졌고, 김영기는 해외파견 대표 팀에 끼어 처음으로 외국에 나가게 된 것이다. 이 대표 팀의 평균연령은 22세였다. 선발로 가드 김춘배와 최태건, 포워드 조병현과 김영기, 센터 백남정이 뛰었다. 대회 장소는 타이베이 시의 3군구장(三軍球場)이었는데 한국 팀은 한 경기도 이기지 못했다.

전패의 수모를 당했다고는 해도 1954년 제2회 아시아경기대회에 비하면 내용 면에서 나았다고 볼 수도 있다. 한국은 이 대회 예선 3경기에서 2승1패를 기록했는데 캄보디아에 89-48, 싱가포르에 69-65로 이긴 반면 홈팀 필리핀에는 45-84로 참패했다. 결승리그에서는 다시 필리핀에 52-76로 패했고 대만에 53-56, 일본에 47-58로 져서 종합 4위에 머물렀다. 메달을 따지 못한 건 둘째 문제고 아시아 주요 경쟁국인 필리핀, 대만, 일본에 모두 패했으니 암담한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한국의 젊은 대표 팀은 필리핀에 2점(57-59), 대만에는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2점(63-65)을 졌다. 젊은 선수들로서는 선전했다고 자부해도 좋을 만한 경기 내용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주요 언론이 이 대회 결과를 통신을 인용하여 보도했다.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이 합동통신을, 조선일보가 AP통신을 인용했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한국과 필리핀의 경기 결과를 46-62로 보도하고 있다.)

김영기는 이 대회에서 뜻밖에 클로즈업됐다. 대만의 팬들은 김영기의 뛰어난 기량에 찬사를 보냈다. 한국에서는 소수의 관중과 고려대의 동료들만 알아주는 김영기의 기술농구가 대만의 팬들에게는 묘기농구로 인식된 것이다. 김영기는 내심 기뻤다. 경기가 열린 이튿날 타이베이의 신문들은 김영기를 언급하면서 “미국식 플레이를 하는 한국의 김영기는 필리핀과 중국 팀에 대한 최대의 위협 인물”이라고 보도하였다. 한자투성이의 대만 신문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한 김영기는 만족했다. 김영기가 대만 농구팬들과 언론으로부터 각광받는다는 소식은 한국에도 알려졌다. 하지만 국내 농구계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많은 농구인들은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개인플레이는 원래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중국 스타일이다. 그러니 중국인들에게 환영받을 수밖에. 그러나 한국 농구와는 거리가 먼 얘기다.” 김영기의 일화는 훗날 한국의 기린아 허재가 대만 농구팬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허재가 김영기보다 행운을 누린 점은 대만 팬들이 열광하기 전에 국내에서 이미 ‘농구천재’로 각광받았던 데 있다.

김영기는 은퇴할 무렵까지도 이때의 일을 아쉽게 기억했다. 그가 보기에 우리 농구는 이런 습성 때문에 발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선수들의 재능, 타고난 기질 등은 아시아 일류가 되기에 충분한데 개인의 기량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부족하고 그러한 노력을 폄하하거나 금기시하고 있으니. 김영기는 이 시절 “우리가 좀 더 협조적이고 학구적이며 과학적인 농구를 했다면 나보다 우수한 선수는 얼마든지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김영기는 이역 땅에서 이상한 (처음으로 접해 보는) 박수갈채를 받고 적잖게 고무됐다. 두 경기 내리 아깝게 진 대표 팀은 분한 마음과 미래에 대한 확신을 함께 품은 채 여의도 공항에 내렸다. 김영기는 당시의 기분을 ‘착잡했다.’고 회고했다.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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