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소풍 김밥과 사실, 그 너머 진실
[경향신문]
3월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많은 부모가 긴장하고 있을 듯하다. 이 편식하는 꼬맹이가 학교 급식은 먹을지, 화장실은 제대로 갈지, 왕따라도 당하는 건 아닐지 모든 게 걱정스러울 뿐이다. 나 역시 그러했다.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소풍 갔을 때였다. 당시에는 교우관계에 촉각이 곤두서있던 터라 소풍에서 귀가한 애에게 누구랑 김밥을 먹었는지부터 물어보았다. 그러나 아이의 대답은 청천벽력과 같았다. “혼자 먹었는데요?”
우리 애가 김밥을 같이 먹을 친구도 없다니!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더 캐물어봐도 애는 횡설수설이라 제대로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엄마들끼리 이맘때 애들은 꼭 ‘찢어진 책’ 같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는데, 딱 그 상황이었다. ‘찢어진 책’이란 뭐라고 얘기를 해주긴 하는데, 내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뜻이다.
사실관계 확인을 위해 학부모 단톡방에 다른 아이들은 어땠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더 놀라운 정보가 들어왔다. 자기 아이도 혼자 먹었다더라는 답변이 속속 올라온 것이다. 이제는 나뿐이 아니라 여러 명의 부모가 심각해졌다. 몇 시간 후 선생님이 올린 소풍 사진은 우리 모두를 더욱 당황스럽게 했다. 김밥을 혼자 먹었다고 한 내 아이가 다른 친구들과 삼삼오오 앉아 점심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을 가지고 다시 아이에게 물어봤다. “너, 철수랑 영희랑 같이 앉아서 점심 먹었던데, 왜 김밥 혼자 먹었다고 했어?” “네. 애들이랑 같이 앉아서 제 김밥은 (남 주지 않고) 혼자 먹었다고요.”
그랬다. 혼자 먹었다는 다른 아이들도 확인해보니 다들 자기 김밥을 남 안 줬다는 의미로 얘기한 것이었다. 엄마들 모두 한바탕 웃고는 우리말의 중의성에 키득거리고 말았다.
그저 해프닝으로 지나가긴 했지만, 만약 내가 아이의 말을 내 식대로 오해해서 성급하게 바로 따지러 들기라도 했으면 선생님께서 얼마나 황당하셨을까?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 이상한 부모 목록에 내가 올랐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사실과 거짓 혹은 허구를 구별하는 것은 사회생활 대부분에서 매우 중요하다. 정확한 사실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아가며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지나간 일의 사실 여부에 가장 집착하는 집단은 아마도 역사가일 것이다. 확실치 않은 사실을 가지고 짜깁기한 이야기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한때 ‘사실’ 같은 건 없고 각자의 해석만 있을 뿐이라는 철학적 도전에 움츠러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요즘 역사가는 이 도전을 정확한 사실을 찾고 공유하기 위해 더더욱 노력해야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다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만 역사 속 사실은 존재한다. 그리고 이를 확정하려는 노력은 언제나 중요하다.
어렵게 한두 개의 사실을 확인해도 충분치 않다. ‘진실’은 그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내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함께 앉아 김밥을 먹었다는 사실은 확인했지만, 이것만으로는 아이가 친구들과 잘 지내는지는 알 수가 없다. 같이 앉아 밥을 먹는다는 것이 인간의 사회생활을 다 설명해주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 아닌가. 스무 명이 모여 광란의 파티를 해도 꿔다 놓은 보릿자루의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알 수 있는 모든 사실을 다 펼쳐놓아도 알 수 없는 진실이 있기 마련이다. ‘사실’이 만능키가 아니라는 점은 우리를 겸허하게 한다.
과거는 늘 ‘찢어진 책’과 같다. 그렇기에 사실을 모으고 또 모으며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러나 아무리 정보를 모아도 불완전하다. 이 불완전함에서 우리는 ‘다 알 수 없음’에 대한 겸허함을 배운다. 이것이 결론을 짓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를 신중하게 한다.
장지연 대전대 H-LAC대학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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