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욱의 기후 1.5] 택소노미? 유럽 넘어 한국까지 뒤흔든 '녹색분류체계' (상)
EU 택소노미, 정말 LNG와 원전 품었나?
유럽의 택소노미(Taxonomy)가 새롭게 개편되면서 전 세계가 이에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2020년 6월, 처음으로 택소노미가 나왔을 때와는 그 파급력이나 무게감이 다른 모습입니다. EU 내에서도, 또 수천km 떨어진 이곳 한반도에서도 말이죠. 택소노미라는 용어를 처음 접한 분들이 자연스레 떠올리는 이미지는 '세금 체계'인 경우가 많습니다. 택스(Tax)에 경제(Economy)가 함께 연상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택소노미가 의미하는 바는 이와 전혀 다릅니다.
'분류하다'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Tassein과 '규칙'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Nomos가 합쳐져 만들어진 말이 Taxonomy, 바로 '분류체계'입니다. 그런데, EU가 이 Taxonomy를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경제활동이 무엇인가'를 나누는 데에 사용하면서 그 의미는 그린 택소노미(Green Taxonomy), 녹색 분류체계가 됐죠.

그런데 개별 사업자들로서는 각자의 시각으로 이를 판단하는 것 자체가 리스크일 수밖에 없습니다. 공통의 가이드라인이 필요해지는 거죠. 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2020년 6월에 첫선을 보인 EU의 택소노미였습니다. 본래의 용도는 수조 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그린딜(우리나라에선 '그린뉴딜'이라 불렸죠.) 사업에서 그 예산이 투입되는 범위를 정하기 위함입니다. 당시엔 원자력발전이 택소노미 리스트에서 제외됐었고요. '심각한 피해를 입히지 말 것', 일명 DNSH(Do No Significant Harm)라 불리는 원칙에 위배된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LNG 역시 제외됐었습니다. 지속가능하지 않은 발전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석탄보다야 낫다지만 어쨌거나 화석연료를 태운다는 것은 마찬가지니까요.
그랬던 EU가 논의와 논쟁, 논란을 거듭한 끝에 지난 2일(현지시간 기준) 택소노미의 '최신판'을 내놨습니다. '최종안'이라고 하기엔 앞으로 남은 탄소중립으로의 여정 가운데 계속해서 개·수정이 이뤄질 여지도, 시간도 많은 상태이긴 합니다. 그리고, 그 최신판엔 LNG와 원전이 '쏙' 들어왔습니다.

원자력의 경우 ① 폐기물의 발생을 최소화하고, 안전기준을 강화하기 위한 4세대의 첨단 기술의 연구, 개발 및 설치, ② 3세대 이상의 현존 기술을 활용해 전기나 열을 생산하는 신규 원전의 건설, ③ 현존 원전의 수명 연장을 위한 업그레이드나 변경 활동이 포함됐죠.
다만 '현존 원전'의 경우 '시한부'로 목록에 포함됐습니다. 현존 기술을 활용한 원전의 건설은 앞으로 23년 이내에, 현존 원전의 수명 연장은 18년 이내에 해야만 하는 겁니다. 여기에, 천연가스나 원자력이나 이들 활동을 하기 위해선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일련의 조건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까다로운 배출 기준을 통과하더라도, 또 다른 조건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현존 석탄발전소를 대체하는 차원에서만 건설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그것도, 해당 발전시설을 재생에너지 발전시설로 바꾸지 못하는 부득이한 상황에서만 가능합니다. 또한, 13년 후엔 이를 다시 재생에너지 발전시설로 바꿔야만 하고요. 통상, 발전소의 수명은 30년가량입니다. 30년이라는 사업 기간의 절반도 보장받지 못 하는 상황에서, 지금보다 배출량을 35% 줄이기 위한 R&D 비용과 시간을 투입해 한정된 부지에서 사업을 진행해야 '녹색 분류체계'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원자력의 경우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각종 안전 기준과 폐기물 처리 계획이라는 '장벽'이 버티고 있습니다. 당장 신규 원전 건설에 있어 필수 조건인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리장은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전 세계에서 이를 갖추고 있는 나라는 단 두 곳, 핀란드와 스웨덴뿐입니다. 수만 년 넘는 시간, 땅속에서 완전무결하게 봉인되어야 하는 만큼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안전한 장소를 찾는 것도, 그 이후 해당 지역 주민들과의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것도 모두 난관의 연속이죠. EU에서 원전에 큰 힘을 싣고 있는 주요 나라인 프랑스조차 80년대부터 이를 만들고자 노력해왔지만, 완공까진 10년 넘는 시간이 더 필요한 상황입니다.
또, 처리장을 갖춘 핀란드나 스웨덴이라 할지라도 핵연료에 대한 대책 없이는 신규 건설이 불가능합니다. 2025년부터 '사고저항성 핵연료(ATF, Accident Tolerant Fuel)'를 이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후쿠시마 참사 이후 미국과 EU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ATF의 R&D는 활발히 진행 중입니다. 하지만 2025년까지 상업 발전 수준으로 ATF를 공급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당장 올해 안에 뚝딱 원전을 만든다 하더라도 2025년부터는 ATF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을 때까지 발전을 멈춰야 하는 것이죠. 또, 새로운 핵연료에 맞춰 발전 시설도 대대적인 개·보수를 해야 하는 만큼, 그 기간 동안 역시 발전소는 가동이 불가능하고요.
그렇다면, EU는 왜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데도 불구하고 LNG와 원전을 택소노미에 포함시켰을까요. 그 배경엔 EU를 좌지우지하는 두 강대국이 있습니다.

독일은 탈원전뿐 아니라 에너지 전환, 무공해차 전환에도 가장 적극적인 나라 중 하나입니다. 게다가, EU가 “2035년부터 하이브리드를 포함한 모든 내연기관 신차의 판매 금지”를 결정했을 때, 가장 큰 영향을 받는 나라이기도 했죠. 대중차인 스코다와 폭스바겐부터 아우디, 최고급차인 벤틀리까지 거느린 폭스바겐 그룹도, 소형차부터 럭셔리카, 트럭까지 거의 모든 세그먼트의 자동차를 만드는 다임러 그룹(최근 트럭을 떼어내면서 별도 '메르세데스 벤츠 그룹'이 됐지만)도, BMW도… 사실상 'EU의 자동차 산업'이라고 쓰고 '독일의 자동차 산업'이라고 읽어도 무방할 정도이니 말입니다. 자동차 산업뿐 아니라 독일의 각종 제조업 역시 온실가스 감축의 풍파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독일 정부의 입장에선 이러한 재계, 산업계의 목소리를 외면하기 어려운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반면, 프랑스는 2020년 DNSH 요건 미충족을 이유로 원전이 그린딜 투자 대상에서 제외됐을 때부터 소위 '이를 갈며' 대응을 준비해왔습니다. 유럽 내 ATF R&D를 주도적으로 이끌어왔던 만큼, 택소노미에서 원전이 제외되는 것은 국가의 외교력, 영향력 부족으로 비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결국 EU는 천연가스와 원자력을 모두 포함시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포함은 시켰지만, 실행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제약을 걸어놓은 것이죠. 나름 '솔로몬의 판결'이라고 스스로 여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앞으로도 EU 내에선 '우당탕' 논란이 불가피할 전망입니다. 독일과 함께 적극 탈원전 대열에 참여했던 오스트리아와 룩셈부르크는 유럽 집행위에 대한 소송도 불사하겠다며 강경한 입장을 내비쳤습니다.
택소노미만 놓고 보더라도, 이제 탄소중립, 온실가스 감축, 에너지전환은 '지구 보호', '생태계 보전' 외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산업, 경제를 넘어 외교, 통상, 국가 영향력에도 직결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된 것이죠. 물론, 지구와 생태계라는 것이 이렇게 '하대(下待)' 되는 것 자체는 아이러니지만요.
이러한 택소노미를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지는 것은 비단 EU만의 일이 아닌 듯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각종 아전인수식 해석이 잇따르고 있죠. 택소노미를 둘러싼 오해와 진실에 대해선 다음 주 연재를 통해 자세히 전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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