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풍경이 말 걸어오는듯..엄유정 작가 "조약돌 모으듯 담고싶다" [아트마켓 사용설명서]

송경은 2022. 2. 5.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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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유정 작가가 가장 최근에 열었던 개인전 `밤-긋기` 전시장 모습. 지난해 10월 서울 종로구 학고재갤러리에서 약 2주간 개최됐다.가장 왼쪽에 보이는 작품은 `밤 풍경(캔버스에 과슈, 162.2×130.3㎝, 2021)이다. /사진 제공=엄유정
[아트마켓 사용설명서-6] 턱을 괸 채 무심하게 아래를 내려 보고 있는 사람, 가녀린 잎사귀들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듯한 어느 식물의 한 순간, 가지런히 쌓여 있는 빵,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 만년설로 뒤덮인 새하얀 산….

삶 가까이에 있지만 어딘가 낯선 것들에 주목하는 엄유정 작가(36)는 인물과 사물, 풍경을 가리지 않고 일상에서 마주하는 모든 대상을 끈기 있게 관찰하고, 그 안에서 발견한 다양한 순간과 느낌을 시원한 붓질로 풀어낸다. 엄 작가 그림을 보고 있으면 대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차분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엄 작가 작품 가운데 상당수가 시리즈 형태인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오랜 시간에 걸쳐 대상을 가까이 혹은 멀리서 바라보고,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하며 발견한 형상을 드로잉이나 회화(페인팅)로 표현하는 것이다. 일본 도쿄 신주쿠 공원 인근에서 만난 풍경들을 그린 연작 '도쿄 시리즈'(2016)와 다양한 모양의 빵을 그린 연작 'Baked Shapes'(2019) 등도 그렇게 탄생했다.

엄유정 작가의 `밤 얼굴`(종이에 과슈, 32×24㎝, 2021). 엄 작가는 인체를 하나의 언어로 사용하면서 동작을 통해 어떤 상황과 정서를 전달한다. /사진 제공=엄유정
엄 작가는 "한동안 집중하는 대상이 있으면 가능한 한 그 작업만 쭉 이어가는 편"이라며 "연작은 한 대상의 구조를 면밀히 살펴보고 궁금함이 사라질 때까지 (그림을 통해) 대상이 만들어낼 수 있는 여러 가지 형태적 가능성을 시도해보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연작이 갖는 시간적 특성이 흥미롭다"며 "여러 개로 분절된 각 작업이 저마다 완성된 시간을 갖고 있으면서 연작 전체로 보면 여러 시간을 이어놓은 하나가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0월에는 여름밤 다양한 장소를 걸어 다니며 오래도록 바라봤던 풍경과 밤에 그려본 얼굴을 모아 서울 종로구 학고재 디자인 프로젝트 스페이스에서 개인전 '밤-긋기'를 열었다. 밤이라는 시간의 옷을 입은 거리의 나무들은 검은 형체로 재해석됐고, 길지 않은 시간에 쓱쓱 그어낸 듯한 단순한 형태의 인물들에선 늦은 밤의 고요함과 고독함과 동시에 어딘가 낯선 듯한 긴장감이 묻어났다.

엄 작가가 그림을 통해 이야기하는 일상 속 생경함은 그가 대학 졸업 후 참여했던 아이슬란드 북부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예술가들이 특정 공간에 머무르면서 작업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계기로 더욱 무르익었다. 엄 작가는 "사람은 없고 광활한 자연만이 있는 환경에 한동안 놓여 있었다"며 "우연히 발견한 마을 설산이 달라지는 형태를 그리면서 삶 가까이에서 발견되는 미묘하게 생경한 것들에 더 주목하게 됐다"고 말했다.

엄유정 작가의 `화이트 마운틴`(2014) 연작물의 일부. 엄 작가는 아이슬란드 북부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40여 일간 아이슬란드에 머무르며 설산과 어우러진 풍경을 작업으로 남겼다. /사진 제공=엄유정
엄 작가는 2013년 우연한 기회로 미국 워싱턴에 머무르다 한국에 있을 때보다 상대적으로 가까워진 아이슬란드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에 현지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다. 아이슬란드 북부 올라프스피외르뒤르의 '리스트후스 아트스페이스'라는 작은 레지던시였다. 그렇게 40여 일간 아이슬란드에 머무르며 이어간 작업은 이듬해 서울 영등포구 공간사일삼에서 개최한 개인전 'Take it easy, you can find it'을 통해 전시됐다.

엄 작가는 다양한 작업 대상만큼이나 표현 방법도 한 가지를 고수하지 않는 편이다. 그는 "대상을 마주한 첫 순간에 집중했던 요소들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것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유동적으로 작업하려고 한다"며 "선적인 특성이 강한 대상이라면 드로잉을 선택해 가장 잘 어울리는 건재료를 찾고, 색에 대한 인상이 강렬하면 좀 더 두꺼운 색채 표현이 가능한 재료를 선택한다. 하지만 때로는 완전히 새로운 재료로 시도해보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특유의 간단한 선으로 이뤄진 인물 그림으로 이름을 알린 엄 작가는 "인체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특정 인물의 구체적인 서사보다는 인체가 가진 뉘앙스, 움직임, 리듬에 더 가깝다. 인체를 하나의 언어로 사용하면서 동작을 통해 어떤 상황과 정서를 전달하는 것"이라며 "그래서 인물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고 머리카락과 눈썹, 심지어 표정까지 점차 단순화되고 몸의 언어를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작업하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엄유정 작가의 `도쿄 시리즈`(2016) 연작물의 일부. 일본 도쿄 신주쿠 공원 일대에서 마주한 풍경들을 드로잉한 시리즈 형태의 작업으로, 작품들은 2016년 도쿄 가타 갤러리에서 전시됐다. /사진 제공=엄유정
엄 작가는 자신의 그림 작업을 담은 몇 권의 화집을 집필하기도 했다. 아이슬란드에서의 일상과 새로운 경험, 풍경과 감상 등을 담담한 수필과 그림으로 풀어낸 '나의 드로잉 아이슬란드'(2016)가 대표적이다. 출간 도서 중 112점의 식물 그림이 수록된 '푀이유(Feuilles)'(2020)를 비롯한 4권의 작품집은 작가가 직접 기획 제작했다. 푀이유는 프랑스어로 '잎사귀'를 뜻한다. 작가가 수목원이나 식물원, 제주도, 서울 한강 일대를 다니며 3년간 기록하듯 그려낸 식물 그림을 한데 모았다.

특히 푀이유는 지난해 독일에서 개최된 국제 책 디자인 공모전 '2021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에서 최고상인 '골든 레터'를 수상했다. 당시 공모전을 주최한 독일 북아트재단과 라이프치히 도서전 측은 선정 이유에 대해 "처음에는 섬세하고 고운 종이 위에 연필 드로잉으로 시작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선과 종이 두께가 두꺼워지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디테일을 보여준다"며 "촉감을 통해 독자에게 작품을 경험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고 밝혔다.

엄 작가는 "처음에는 그저 도록을 조금 더 의미 있는 작품집으로 잘 간직하고 싶어 시작한 것이었는데 여러 (도서) 디자이너 분을 만나 그림이 다양한 옷을 입는 것 같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며 "책이라는 매체는 전시와는 또 다르지만, 집에서도 언제든 그림을 펼쳐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화집이 하나의 작은 갤러리처럼 느껴지길 바랐다"고 말했다.

지난해 초 서울 종로구 갤러리 소쇼에서 개최된 엄유정 작가의 개인전 `푀이유(Feuilles)’ 전시장 한편에 식물 그림들이 전시돼 있다. /사진 제공=엄유정
엄 작가는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했다. 2013년부터 개인전 다섯 차례, 그룹전 20여 회에 참여했다. 주요 전시로는 'FEUILLES'(서울 소쇼, 2021), 'Invitation denied Ⅰ Ⅱ'(고양아람누리미술관 및 안산 단원미술관, 2020), 'I DRAW'(서울 디뮤지엄, 2019), 'IN_D_EX'(서울시립미술관, 2018) 등이 있다. 전시, 출판, 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시각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고 있다. 엄 작가는 "조약돌을 모으듯 앞으로도 매일의 삶과 풍경을 꾸준히 그림으로 담아내고 싶다"며 "올해도 여러 작업을 통해 좋은 경험을 많이 해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송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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