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인사이트] 갑작스러운 'CNN 사장 사퇴'..그 뒤 숨겨진 음모 · 배신

김수형 기자 2022. 2. 4.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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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N 선장의 갑작스러운 사임…"동료와 연인 관계 신고 안 해"

어제 미국에서 가장 화제가 된 사건은 CNN 사장 제프 주커의 갑작스러운 사임 소식이었습니다. 낮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 케이트 볼두언이 잔뜩 어두운 표정으로 나와 CNN 사장이 물러난다고 속보 형식으로 뉴스를 처리했습니다. 주커의 발표문에는 20년간 함께 일하던 동료와 동의 하에 연인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를 공개하지 못한 잘못이 있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부하직원과 연인 관계일 경우 회사에도 알려야 하는 윤리적인 책임이 있지만 그 점을 위반했다는 걸 인정한 겁니다. 상대는 CNN 마케팅 최고 책임자이자 부사장인 앨리슨 골러스트였습니다. 그녀는 차기 사장 후보로 언론 보도가 나올 정도로 CNN에서 잘 나가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녀는 주커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기혼자였지만, 최근 둘 다 이혼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주커는 2000년대 NBC 아침 방송인 Today의 PD를 맡았던 인물로, 이 프로그램의 전성시대를 이끌었습니다. 딱딱한 뉴스를 생활 밀착 소식과 접목시켜 조금 편한 아침 방송의 콘셉트 자체를 창안한 인물이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홍보를 맡았던 사람이 골러스트였습니다. 당시 진행자였던 케이티 큐릭은 그때부터 둘이 너무 가까워서 이상했다면서, 당시 골러스트를 그 자리에 영입하자고 우긴 사람도 주커였다고 이미 본인의 자서전에도 언급해놨습니다. 두 사람이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는 건 업계에서는 모두 아는 비밀이었습니다. 주커 사장은 성명서에 코로나 이후 골러스트와 연인 관계가 됐다고 밝혔습니다.
 

CNN 앵커 쿠오모 해고 과정에서 시작된 진흙탕 싸움

이 사건이 드러나게 된 과정이 대단히 추합니다. CNN의 간판 앵커 크리스 쿠오모가 자신의 형이었던 뉴욕주지사 앤드루 쿠오모의 성추행 의혹을 비호하기 위한 대응 회의에 대놓고 참석하고, 사실상 행동대원처럼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에서 이번 사건도 시작됩니다. 이런 문제가 처음 언론에서 터져 나왔을 때도 주커는 쿠오모를 감싸기 급급했고, 그대로 프로그램 진행을 맡겼습니다. 크리스 쿠오모는 CNN에서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는 프라임 타임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였고, 그를 빼버릴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주커 사장은 앵커 쿠오모가 전직 주니어 여성 앵커를 성추행했다는 또 다른 의혹이 제기되자 결국 버티지 못하고 즉각 해임했습니다. (쿠오모 연봉은 600만 달러였는데, 이 돈도 못 받게 된 겁니다.)
CNN의 간판 앵커였던 크리스 쿠오모


하지만 크리스 쿠오모는 이 같은 의혹을 형처럼 전면 부인했습니다. 저널리즘적으로 명백한 잘못이 분명한 대책 회의 참석에 대해서도 주커 사장도 이미 다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오히려 코로나 초기 쿠오모 주지사가 한참 주가가 높을 때 형을 섭외하라고 종용하던 게 사장 아니냐고 항변했습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성 비위 문제로 자신을 해고한다고 하자, 쿠오모도 변호인을 통해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주커 사장의 부적절한 연인 관계가 폭로됐다고 사건을 잘 아는 내부자들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골러스트는 CNN에 들어오기 전에 앤드루 쿠오모 주지사의 홍보국장을 역임했습니다. 주커-골러스트-쿠오모 가문이 이미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던 관계였던 것입니다. 앵커 쿠오모도 이들의 부적절한 관계를 알고 있었고, 자신이 해고되는 형식으로 정리되자 막장 싸움으로 폭로전을 벌였고 주커 사장도 못 견디고 사임해버린 겁니다.
 

만담식 '코멘터리 뉴스' 확산시키고, 트럼프 정치적 거물 만든 장본인

2013년부터 CNN 사장으로 재직했던 주커 사장은 대단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는 데 미국 언론계에서 이견이 없습니다. 집중 보도 방식으로 CNN의 특성을 구축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스트레이트 뉴스를 전하는 것보다는 앵커들의 코멘터리(해설, 비평)를 더 강하게 요구했고 그런 방식이 고스란히 뉴스에도 반영됐습니다. 미국 뉴스 전문 채널의 저녁 프라임 타임 시간대 뉴스는 우리가 생각하는 정통 종합뉴스와는 거리가 멉니다. 쿠오모 프라임 타임이나 경쟁사 폭스뉴스의 터커 칼슨 쇼는 사실 뉴스라기보다는 만담에 가깝습니다. 앵커 원샷을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잡고, 뉴스와 자신의 주장을 잡탕찌개처럼 섞어서 전합니다. 가장 좋아하는 앵커가 뉴스와 의견을 뒤섞어 전하는데, 주커 사장이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던 이런 방식의 뉴스가 표준으로 정착된 겁니다. 독보적인 스타 앵커가 있는 경우에만 가능한 방식인데, 어떻게 보면 요즘 유튜브로 정치 해설을 전하는 방송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커 사장이 선장이었던 CNN이 가장 많이 투자한 정치인이 트럼프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뉴스가 되는 트럼프의 가치를 알아본 주커 사장은 트럼프를 집중 보도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고, CNN은 트럼프를 비판한다는 이유로 집중 보도를 하면서 트럼프가 점점 더 정치적인 거물이 됐습니다. 트럼프 시절 CNN은 트럼프 없으면 어떻게 먹고 사나 싶을 정도로 그에 대한 보도 비중이 높았습니다. 천재적인 미디어 감각을 가진 트럼프는 CNN을 더 독하게 비판하면서 CNN에 더 자주 등장했고, CNN은 트럼프를 더 세게 비판하기 위해 트럼프를 더 자주 등장시키는 적대적 공생 관계가 탄생했습니다. 물론 트럼프 전 대통령과 CNN의 관계는 불편했지만, 흥행 측면에서는 서로가 꼭 필요했습니다. 실제 2021년 초반까지 CNN의 실적은 대단히 좋았습니다. 폭스뉴스와 MSNBC까지 제치고 케이블 뉴스 채널 가운데 1등을 기록한 적도 있습니다.


 

CNN 추락 해결책으로 택한 CNN+ 시작도 못했는데

하지만 2021년 상반기를 끝으로 바이든 시대가 탄생하자 CNN의 몰락은 하루가 다를 정도로 확연해졌습니다. 진보진영을 손님으로 그들의 구미에 맞는 뉴스를 하려고 노력은 하는데 그들의 충성도는 폭스 뉴스에 비해 확연히 떨어집니다. 골수 보수층은 폭스 뉴스를 보면서 잃어버린 정권을 찾아오겠다고 이를 박박 갈고 있는데, CNN 충성 시청자들은 이런 아쉬움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재미가 없는 바이든 대통령의 특성도 뉴스 시청률에 영향을 미쳤을 듯합니다.) 폭스는 바이든의 포인트를 잡아서 비판하는 기사를 내면 시청자들이 몰리는데, CNN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CNN은 현재 2014년 이후 최악의 실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021년 말에 케이블 뉴스 프로그램 순위 25위 안에 든 게 딱 한 개 있었는데, 그게 쿠오모 앵커의 프라임 타임이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주커 사장은 이런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CNN+라는 유료 스트리밍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엄청난 몸값을 주고 폭스 뉴스의 간판이었던 크리스 월리스를 영입했고(월리스는 사실 폭스 안에서 가장 폭스스럽지 않은, 중립적인 뉴스를 하던 인물이었습니다. 코로나 걸리기 전 트럼프가 난장판을 만들었던 대선 토론을 진행했던 베테랑 앵커입니다.) 위기의 주부들에 나오던 에바 롱고리아가 여행 프로그램을 맡아 히스패닉 시청자들을 잡겠다는 전략입니다. 하지만 본체인 CNN 앵커들이 기본 뼈대로 대거 등장하는 계획인데, 이 유료 구독 모델을 제대로 띄우기 전에 선장이 사라진 셈입니다. 미국 역시 뉴스 미디어들이 너도나도 스트리밍을 하겠다고 뛰어들고 있는데, 사실 CNN이 이걸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궁금한 점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주커는 자기 그림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자리에서 내려온 겁니다. CNN이 소속된 워너미디어는 조만간 디스커버리랑 합병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430억 달러 계약으로 미디어 업계에서는 엄청난 금액의 인수 합병인데, 이 작업의 핵심 인사도 주커 사장이었습니다.

주커 사장은 충성을 요구하고, 자기 사람은 어떤 비난에도 감싸고 가는 스타일입니다. CNN 법률 분석가로 종종 등장하는 검사 출신 제프 투빈은 동료들과 줌 미팅을 하다가 음란 행위를 해 미디어 업계를 발칵 뒤집어놨는데, 주커 사장이 그를 감싸고 CNN에 출연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줬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투빈도 품었던 주커 사장이 쿠모오를 버리면서, 음모와 배신의 막장 드라마가 전개되고 있는 겁니다. 극적인 요소를 모두 갖춘 CNN의 내부 갈등을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가 곧 나오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김수형 기자sean@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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