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The Column] 대통령무책임제, 이제는 그만

이용준 전 외교부 차관보·북핵대사 2022. 2. 3.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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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적 권한 행사하면서 문제 생기면
책임 안 지는 文 정권, 대통령무책임제 극치
새 대통령은 청와대서 나와
임기제 정무직 공무원으로서 역할과 책임 다해야

고대 로마는 기원전 509년 왕정을 타도하고 공화정을 수립해 480년간 유지했다. 절대 권력자의 출현을 막으려는 의지가 얼마나 강했던지, 로마 공화정 체제는 이를 막기 위한 삼중 사중의 안전장치로 겹겹이 싸여있었다. 로마 민회는 매년 임기 1년의 집정관 2명을 정치 지도자로 선출했고, 두 집정관은 모든 일을 상호 합의로 결정했다. 군대 지휘권은 두 집정관이 하루씩 번갈아 행사했고, 전투 중에도 총사령관이 매일 교대되었다. 외침 등 국가 위기 도래 시 독재관 1명이 임명되기도 했으나, 권력화를 막고자 임기는 6개월로 제한되었다. 절대 권력자 없는 로마에서 원로원은 최고 권력기관이었지만, 원로원의 입법과 결의는 평민회가 선출하는 호민관 10명의 거부권 행사로 견제되었다.

청와대 전경 /이진한기자

공화정 로마가 중시한 정치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의 정신을 오늘날 가장 잘 계승하고 있는 것이 미국 헌법이다. 미국 헌법은 의원내각제의 상징적 국가원수와 국정 실권자인 총리를 하나로 묶은 강력한 대통령직을 창설하는 한편, 대통령의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의회에 부여했다. 로마 원로원을 연상시키는 방대한 권한을 가진 미국 의회는 입법권과 예산권을 독점하고 있고, 외교권과 회계감사권도 의회의 고유 권한이다. 차관보급 이상 공직자에 대한 임명동의권도 갖고 있다.

미국 정치체제는 행정 집행의 권한과 책임이 모두 대통령에게 집중된 대통령책임제다. 대통령은 국정을 직접 책임지고 운영하며, 행정부가 실책을 저지르면 그것이 어느 부처 소관이건 대통령이 사과하고 정치적 책임을 진다. 내각은 한국과 달리 제청권도 부서권도 없는 단순 보좌 기관일 뿐이며, 각료가 대통령 대신 책임지고 사임하는 일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은 이런 미국식 대통령책임제를 선택했으나, 세월이 가면서 대통령의 권력은 점점 커지고 책임은 점점 사라져 제왕과 같은 면책의 성역이 존재하는 기형적 ‘대통령무책임제’로 진화했다.

한국 대통령은 공룡처럼 비대한 청와대 친위 조직을 통해 국정을 만기친람하고 집권 여당의 공천과 각 부처 내부 인사까지 개입하는 제왕적 권한을 행사하면서도, 국정에 차질이 생기면 아무 권한 없는 총리와 장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빠져나간다. 청와대가 관할 부처와 전문가들의 견해를 무시하고 전횡한 경제, 부동산, 탈원전, 방역, 북핵, 안보 등 분야의 무수한 실정들에 대해 국정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이 남의 일인 양 모르쇠로 일관하는 문재인 정권은 ‘대통령무책임제’의 극치였다. 더욱이 이 정부는 대통령의 국정 실패 책임을 총리와 장관이 대신 짊어지는 대리 속죄 관행마저 사라진 총체적 무책임 정부였다.

한국의 대통령책임제가 이처럼 ‘대통령무책임제’로 전락한 이유는 대통령이 스스로를 선출직 공무원이 아닌 세습적 제왕으로 착각하도록 만드는 후진적 정치 문화와 제왕적 통치 환경 때문이다. 내시와 궁녀에게 둘러싸여 백성과 동떨어진 삶을 살았던 조선 국왕의 거처였던 경복궁 뒤 북악산 자락에는 출입이 고도로 통제된 청와대 비서실과 경호실이 심산유곡 사찰처럼 숨어 있다. 거기서 몇 단계 출입 통제를 거쳐 언덕길을 올라가면 대통령과 극소수 지원 인력만 근무하는 텅 빈 대통령 집무실 건물이 유령처럼 서 있고, 거기서 숲길로 계속 올라가면 일제시대 조선 총독 관저 뒤쪽으로 대통령 관사가 자리하고 있다. 이런 절해의 고도에서 유아독존하는 대통령이 대국민 공감대를 상실하는 건 단지 시간의 문제일 것이다.

제왕적 대통령제 극복을 위해 프랑스식 이원집정부제 채택이 거론되기도 하나 이는 탁상공론일 뿐, 대통령 권력의 분점은 프랑스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통령책임제의 정상적 운영을 위해선 무엇보다도 권한과 책임이 일체화된 국정 운영이 필요하다. 대통령은 제왕적 권력의 상징인 비대한 청와대 조직을 최소 규모로 혁파하고 내각을 통한 투명한 국정 운영을 해야 하며, 보좌진의 어깨 뒤에 숨지 말고 국정 운영 결과에 직접 책임을 져야 한다. 이를 위한 첫걸음은, 대통령이 경호와 의전의 장막에 갇힌 음습한 북악산 은둔처에서 내려와 광화문이건 여의도건 국민이 살고 일하는 대명천지로 나오는 일이다. 이를 통해 대통령은 자신이 제왕이 아닌 임기제 정무직 공무원임을 매시간 확인하면서 일해야 한다. 대선 정국에서 청와대 이전 공약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부디 이번엔 그 약속이 선거용 허언이 아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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