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동물이 지나가고 있어요' 고속도로 현수막..정말 지나갈까?

강한들 기자 2022. 1. 30.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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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강원도 강릉시에 있는 한 생태통로의 모습. 국립생태원 제공


고속도로를 지나다 보면 길을 가로지르는 짧은 다리가 보이곤 한다. 동물 그림이 그려지기도 한 다리에는 ‘야생동물이 지나가고 있어요’ 같은 문구가 적혀있다. 차 타고 가다 스치듯 보게 되는 이런 다리를, 정말 동물들이 지나다니고 있을까.

유튜브 채널 ‘새덕후’가 2개월간 담은 육교형 생태통로인 ‘추풍령 생태통로’에는 각종 야생동물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예민한 멧돼지는 새로 설치된 카메라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가기도 하고, 멧토끼가 카메라에 몸을 비비고 지나가기도 한다. 고라니, 노루, 너구리가 이동하는 모습도 카메라에 담겼다. 논문 ‘야생동물 이용빈도 및 종다양도를 활용한 생태통로 효율성 평가’를 봐도 고라니, 고슴도치, 노루, 담비, 산양, 수달 등 다양한 동물들이 육교형 생태통로를 하루 평균 1.9회 이용하고 있었다. 2010년에서 2014년까지 미국 네바다주 북동부 지역 고속도로의 생태통로에서 조사된 이용 빈도보다 두 배 정도 높은 수치이다.

인간이 이동하기 위해서 만드는 길은 야생동물의 ‘행동권’이던 곳을 분리하고 고립시킨다. 인간이 집에서 잠을 자고, 식당을 가고, 일터로 향하는 것처럼 야생동물도 먹이터, 잠자리, 천적으로부터 몸을 피할 수 있는 은신처가 필요하다. 이런 동물들의 행동권이 많이 교차해서 생물 서식 공간을 서로 잇기 위해 필요한 핵심 지역이 ‘생태축’이고, 이를 연결시키는 기능을 하는 게 ‘생태통로’다. 자연환경보전법은 생태통로를 “야생 동·식물의 서식지가 단절되거나 훼손 또는 파괴되는 것을 방지하고 야생 동·식물의 이동 등 생태계의 연속성 유지를 위해 설치하는 인공 구조물·식생 등의 생태적 공간”이라고 정의한다.

생태통로를 이용하다 카메라에 찍힌 담비와 고라니. 국립생태원 제공


2021년 9월 기준, 전국에 등록된 생태통로는 532개다. 국토 면적 대비 생태통로 밀도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다. 하지만 도로에서 동물이 차에 치여 죽는 ‘로드킬’은 계속되고 있다.

국토교통부와 국립생태원 자료에 따르면 2015년 1만4178건이었던 로드킬은 2019년 2만1397건까지 늘었다. 2020년에는 1만5107건으로 줄었지만, 국립생태원은 코로나19 영향으로 모니터링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봤다. 송의근 국립생태원 전임연구원은 “연간 로드킬로 죽는 고라니를 6만 마리로 추정하는 논문이 있는데, 집계된 통계에는 연간 6000여 건이 집계된다”며 “통계는 실제로 발생하는 로드킬의 10분의 1도 안되는 수치일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생태통로와 울타리마저 동물을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닌, 인간 중심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2018년 완공된 서울양양고속도로 생태통로는 양쪽이 가파른 경사로 이뤄진 곳 사이에 있다. 동물들이 생태통로를 이용하려면 절벽을 따라 내려와서, 절벽을 따라 다시 올라가야 하는 구조다. 송 연구원은 “생태통로와 울타리가 설치 돼 있는데도 로드킬 다발 구간인 곳이 있다”며 “‘동물 찻길 사고 조사 및 관리지침’이 만들어진 2018년 이전에는 치밀한 현장 조사와 저감대책을 수립하는 과학적 접근이 이뤄지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생태통로를 이용하다 찍힌 너구리의 모습. 국립생태원 제공


이에 생태통로를 이용하는 동물에 맞춘 ‘고객 친화형’ 생태통로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유튜브 채널 ‘새덕후’가 담은 추풍령 생태통로는 동물들이 이질감을 느끼지 않도록 자연과 비슷한 모습을 조성해 동물들이 편히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땅 속에는 너구리 같은 동물들이 숨어서 쉴 수 있게 파이프를 심었다. 설치류 등 동물을 위해 폐목을 쌓아두고 그 사이로 이동할 수 있게 하는 구조물도 있다. 물 웅덩이를 만들어 새나 동물들이 와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우동걸 국립생태원 선임연구원은 “위치 선정이 잘 되고, 지형 연결성이 확보가 되면 동물들은 생태통로를 잘 이용한다”며 “사람의 편의를 위해 길을 만들고 동물들이 죽는데, 이에 대한 최소한의 윤리적인 책임을 질 필요는 있다”고 말했다.

생태통로와 로드킬을 다룬 책 ‘숲에서 태어나 길 위에 서다’의 저자이기도 한 우동걸 선임연구원은 그가 길 위에서 떠나보낸 수많은 동물들의 사연을 책에 담았다. 어린 삵부터 나이 든 너구리까지 사람들이 만든 길을 끼고 살아가다 결국은 차에 치여 숨졌다. 우 연구원은 책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따뜻한 기술의 시대를 꿈꾼다. 그리하여 미래의 도로는 비로소 다음 등식이 성립하길 바란다. 로드≠킬, 로드=길.”

강한들 기자 handl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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