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의 확장] 재일동포 이명진의 주민등록증 만들기

김명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총장/영화 <우리학교> 감독 2022. 1. 3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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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시선의 확장]은 흔히 '북한 업계'에서 잘 다루지 않는 북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그간 주목 받지 못한 북한의 과학, 건축, 산업 디자인 관련 흥미로운 관점을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처음으로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고 기뻐하는 재일동포 이명진 씨. © 뉴스1

(서울=뉴스1) 김명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총장/영화 <우리학교> 감독 = 필자가 명진(가명)을 만난 건 자주 교류하는 재일동포 신미유 씨의 일본 출국일이었다. 올해로 서른 넷인 신미유 씨가 정든 한국 땅을 떠나는 이유는 '군대'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석사 과정까지 마친 그는 좀 더 공부를 하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았고 여기저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해결 방법을 찾아 보려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많은 인연과 미래를 포기하고 일본 행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날 아침, 자가격리 14일을 마친 명진을 신미유에게 소개 받았을 때 나의 첫 질문 또한 '군대' 문제를 알고 한국 행을 탰했느냐였다. 물론 명진도 각오하고 있었다. 3년 안에 어떻게든 결과를 내고 싶다는 거다. 성인이 되어 처음 조국의 품을 찾은 명진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3년이었다. 총 거주 일 수가 3년을 초과하면 더 이상 취직이 불가하기 때문이다. 외국인에게 한국은 기회의 땅이 될 수 있어도 정작 재외국민 2세들에게는 차가운 얼굴을 보여주는 조국이었다. 그 조국에서 축구선수가 되어 꿈을 펼쳐 보겠다는 명진에게 3년은 어떤 시간일까.

올해 27세인 명진의 꿈은 축구선수로 사는 것이었다. 그것을 한국에서 이루고 싶다고 한다. 민족교육을 받지 않아 우리말과 글을 쓰는 건 아직 안되지만 도전해 보고 싶다고 한다. 어쨌든 여기서 살기 위해서는 '주민등록증'이 있어야 한다. 자가격리가 끝난 그날, 주민센터를 찾았다.

센터의 주민등록 담당자에게 외국인이 아닌 '대한민국 국적 재일동포'의 주민등록번호 생성은 자주 있는 업무가 아니었다. 이명진에게도 매뉴얼을 찾고 이곳저곳에 전화를 하는 담당자의 당황하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한참을 그렇게 시간을 보낸 후 결론이 나왔다.

재외국민(이 경우 해외에서 태어나고 자란)이 여행, 관광이 아니라 '거주'를 목적으로 할 경우에는 '주민등록번호'가 있어야 한다. 주민등록번호가 없으면 자신의 명의로 된 핸드폰 조차 만들지 못하고 은행 계좌도 살 집도 구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우선 규격 사진을 찍고 열 손가락 지문을 등록한다. 그리고 현재 살고 있는 거주지의 주소와 생년월일 등 기본적인 인적사항을 주민센터에 등록한다. 이 개인 정보는 '신원 조회'를 위해 경찰청으로 넘어간다. 국내에 동일인이 존재하는지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말은 안 하지만 범죄경력도 조사 대상일 것이다. 이것이 2주의 시간이 걸린다.

경찰의 신원조회가 끝나면 주민센터에서 '주민등록번호'를 생성한다. 주민등록증이 없어도 번호만 있으면 은행 계좌나 본인 명의의 휴대폰을 만들 수 있다. 주민증 발급 전에 이를 위해 문서로 된 임시 주민등록 확인서를 발행한다. 주민등록증은 '조폐 공사'에서 만들고 약 2주 정도 소요된다. 결국 명진은 입국 후 14일의 자가격리, 주민등록 신청, 신원조회, 임시 주민등록번호 발급, 주민등록증 발급까지 짧게는 한 달, 길게는 두 달 가량의 불편을 감수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주민등록신청을 하고 보건소를 방문해 복잡하고 긴 기다림을 거쳐 '코로나 접종 확인 국내 등록'을 했다. 본인 명의의 휴대폰이 없어서 큐알 코드를 만들 수 없으니, 일단 일본에서 접종 받은 내역으로 등록을 하고 임시 증명서를 발급 받았다. 이것으로 어떻게든 마트나 식당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2주가 지났다. 대리인 역할을 한 필자의 휴대폰으로 신원확인이 끝났으니 주민센터를 방문해 '임시주민등록확인서'를 받으라는 문자가 왔다. 주민센터 앞에서 만난 명진에게 2주 동안 어떻게 지냈느냐고 물었다. 개인 훈련과 구단 입단 테스트를 위해 외출한 거 말고는 집에만 있었다고 한다. 밥은 마트에서 구한 재료로 만들어 먹었다 한다. 임시확인서에는 명진의 새 주민등록번호가 찍혀 있었다. 바로 은행으로 갔다. 지금은 아르바이트도 할 수 없는 처지라 일본의 부모님으로부터 생활비를 받아야 한다.

은행 창구의 직원은 반드시 본인의 연락처 즉, 휴대전화가 필요하다고 한다. 당연하게도 아직 본인 명의의 휴대전화가 없다. 사정을 해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다. 필자가 딱한 사정을 설명하니 어디다가 전화를 건다. 겨우 허락이 떨어졌는지 신원보증인 역할의 필자 휴대폰을 대신 등록하라고 한다. 그리고 내일 다시 와서 이명진 본인 명의 휴대폰을 등록하란다. 은행도 이 경우 정확한 매뉴얼이 없다.

휴대폰 가게로 달려갔다. 가지고 있던 휴대폰은 일본에서 만든 것이니 소용이 없고 유심 카드를 교체하거나 한국 통신사의 새 휴대폰을 만드는 방법 밖에 없다고 한다. 가격이 별반 차이가 없다는 설명이 이어졌고 한국 통신사의 새 휴대폰을 선택했다. 그 길로 바로 보건소로 달려갔다. 임시 접종확인서가 아닌 큐알(QR)코드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한국의 방역시스템에 이명진을 등록해야 하니까 이것도 주민등록번호와 본인명의의 휴대폰이 필요하다. 담당 직원의 분주한 움직임, 몇번의 확인을 거쳐 약 1시간 만에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2주가 다시 지났다. 문자가 왔다. 주민센터에서 신규 주민등록증을 받으러 오라는 거다. 센터 앞에서 명진과 만났다. 주민등록증을 받은 그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비로소 대한민국의 국민임을 인정 받았다는 듯 만면에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이명진 씨의 주민등록증에는 인장처럼 ‘재외국민’이라는 단어가 박혀 있다. 법이 바뀌지 않는 한 계속 박혀 있을 것이다. © 뉴스1

한국 국적 재일동포의 주민등록증 만들기는 이렇게 1개월 반 가량이 걸려서야 이루어졌다. 어떤이는 경찰 신원조회를 하루 만에 하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2주가 꼬박 걸리기도 한다. 이 과정에 함께 하면서 필자에게는 몇가지 의문이 들었다. 대한민국에만 존재한다는 주민등록증, 이것은 왜, 언제 만들어졌으며 정말 아무 의심없이 받아들여도 좋은 제도일까?

살펴보니 주민등록증은 1968년 이후 탄생했다. 그해 1·21 사태가 터졌다. 1·21 사태는 북한 무장군인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여 당시 대통령 박정희를 제거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유일하게 생포되었던 김신조의 이름을 따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한다. 한국 사회와 반공 군사독재 정권은 큰 충격에 빠졌고, 그 결과로 예비군, 육군3사관학교, 교련 교육이 실시되었다. 주민등록번호도 이때 처음 탄생했다. 우리에게 이름 다음으로 중요한 주민등록번호는 이와 같이 분단, 냉전의 산물이었다. 모든 국민에게 '고유번호'를 부여해 이 번호가 없는 자는 비국민이 되는 것이다.

재외국민의 경우 한국에서 주민등록번호를 받고 이주한 1세를 제외하면 거의가 그곳에서 태어난 2세, 3세들이다. 이들은 부모나 본인의 선택을 통해 '한국 국적'을 받을 수 있다. 한국 여권을 발급받고 입국을 비교적 자유로이 할 수 있다. 하지만 국적을 취득하는 동시에 자동적으로 '주민등록번호'를 발급받지는 못한다. 여권에는 생년월일 외에 주민번호란에 100000, 200000 등 정체불명의 번호만 적혀있다. 그렇다면 명진의 경우처럼 어렵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주민등록번호를 받는다고 진정한 국민이 될까? 그가 받은 주민등록증에는 자그마한 글씨로 굳이 '재외국민'이라고 적혀 있다. 경찰의 신원확인을 거치고 주소지가 명확하고 디지털 지문에 해당하는 본인 명의 휴대폰이 있는데도 그는 여전히 그냥 '국민'이 아니라 '재외국민'인 것이다.

주민등록을 위해 필수인 '지문날인' 역시 불행한 역사의 산물이다. 재일조선인에게 지문 날인 제도는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자신들을 범죄자 취급했던 인권차별의 상징이다. 1930년대 괴뢰정부 만주국을 세운 일본이 범죄자로부터 지문을 채취하여 보관해 재범을 막는다는 '경찰지문'이 그 시작이다. 이것은 전후 일본의 외국인 지문날인 의무화로 변모하여 대표적인 외국인 차별 제도가 되었다. 주민등록증에 고유번호 뿐 아니라 지문날인까지 시켰던 박정희 정권이 그 영향을 받았다는 건 주지의 사실일 것이다.

일본은 이 제도를 50년대에 이미 폐지했으나 외국인등록을 위해서는 유지했다. 재일동포들은 지문날인 제도를 철폐하기 위해 1980년대부터 싸웠으며 1993년에야 겨우 폐지에 이르게 되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입국 시 지문 등록이 다시 의무화되었다) 재일동포인 그 또는 그 자손은 이제 모든 국민이 지문을 등록해야 국민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조국'에서 살려고 다시 지문날인을 해야 한다. 그는 열 손가락 지문을 찍을 때 어떤 기분일까?

재일동포들은 여권을 만들 때 '신원조회'를 반드시 거친다. 재외공관에 여권신청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절차다. 부모, 친척의 신원 뿐 아니라 학업, 직업, 단체 경력, 북한 방문 경력 등 사상 검증에 가까운 신원조회를 거친다. 그런데 주민등록증을 만들기 위해 또 다시 '신원조회'를 해야 한다. 그전의 신원조회가 '외교부'의 일이라면 이번에는 '경찰'의 일이란다. 이번에는 한국에 동일인이 없는가를 조사하기 위해서란다. 그는 '재외국민'이라도 되기 위해서 '국민'은 받지 않는 두 번의 신원조회를 거쳐야 하는 것이다.

헌법을 애써 거론하지 않더라도 모든 국민은 평등해야 한다. 이 나라가 모든 '국민'을 진정 평등하게 대우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재외국민'에게 대한민국은 평등한 국민 대우를 해 주고 있는가? 수많은 법 제도와 행정절차를 통해 마땅히 '국민'이어야 할 사람들을 이땅에서 자꾸만 밀어내고 있는 건 아닌지 곰곰히 따져봐야 한다. 지금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오로지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만이 이루어 낸 것일까? 미래에 우리가 살 나라는 오로지 이 땅에 사는 국민들 만의 나라인가?

김명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총장/영화 감독.©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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