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내말삼 드러보소..조선시대판 '스크롤 압박', 여성 위로하네

한겨레 2022. 1. 29.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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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신지은의 옛날 문화재를 보러 갔다
'이내말삼 드러보소, 내방가사'
세계적으로 드문 근대 전 여성문학
한지 폭 너머 '안방 작가'가 체험한
차별·모순·가족·전쟁 생생한 일상
쓰고 읽고 베끼며 이룬 연대의식
<쌍벽가>, 연안 이씨(1737~1815), 1794, 풍산 류씨 화경당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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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나타난 내방가사는 여성들이 쓴 한글 문학을 가리킨다. 장르 이름에 안방을 뜻하는 내방(內房)이 붙은 것은 내방가사의 소재와 배경, 작가들의 집필 공간이 모두 집 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안방의 작가들’은 자기 존재와 삶에 대한 적극적인 성찰과 그것을 글로 남긴 존재들이었다. 노랫말 같기도 산문 같기도 한 가사는 4음보 운율만 지키면 분량은 무제한이다.

국립한글박물관이 한국국학진흥원과 함께 개최한 ‘이내말삼 드러보소, 내방가사’(4월10일까지)는 조선 후기부터 현재까지 창작되고 향유되는 내방가사 90여편을 조망하는 전시다. 1부 ‘내방 안에서’는 은은한 빛이 비쳐나는 한지벽을 세워 전시실을 꾸몄다. 이 종이벽은 한옥 안채의 창호문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동시에 그 문 너머 불을 밝혀둔 방 안에서 여성들이 글을 쓰기 위해 마주했을 하얀 빈 종이를 상상하게도 한다.

그리고 이 전시실 한가운데를 길게 펼쳐진 종이가 가로지른다. 두루마리 길이가 7m를 훌쩍 넘는 <쌍벽가>다. 이렇게 공간을 둘러싼 종이와 책과 두루마리를 이룬 종이가 어우러지며, 이 전시는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여성의 이야기가 익숙하고도 새로운 것임을 암시한다. 한지 폭 너머 ‘안방의 작가들’이 그저 사랑과 서러움이나 이야기할 것으로 예상한다면, 다음의 사실을 미리 염두에 두는 것이 좋다. 내방가사처럼 근대 이전에 여성이 주체가 되어 문학을 발전시킨 사례는 세계사에서도 매우 드물다는 것을.

솔직함으로 담아낸 삶

내방가사에 담긴 삶의 모습은 실제와 멀지 않다. 작가들은 작품 안에 여성들이 생각하고 고민해온 삶의 생생한 모습을 담아냈다. 그 현실 인식은 어디까지가 너스레이고, 어디까지가 진짜 이야기인지 가려내기 어렵지 않다. 그런 솔직함 때문에 동시대 여성들은 자신이 공감하는 가사 작품을 베껴 쓰거나 고쳐 쓰며 널리 퍼뜨렸다.

특히 2부 ‘세상 밖으로’는 개화기 이후 변화의 급물살에 직면한 여성들의 모습들을 보여준다. 한쪽에서는 남녀평등과 여성교육을 부르짖는 <해방가>를 쓰고, 다른 한쪽에서는 회갑을 맞은 60대 여성 이사호가 장장 11m에 이르는 <생조감구가>를 써 “모던보이 개똥일세…” 하는 신랄한 냉소를 풀어낸다. 신식 교육을 받고서는 일방적으로 이혼을 통보하고 새살림을 차리는 청년들 때문에 <시골여자 서러운 사연> 같은 안타까운 작품도 생겨난다.

또 어떤 딸은 여성의 사회 참여를 우려하는 어머니를 설득하는 <위모사>를 쓴다. 한 인간으로서 동등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이에게, 늘 누구에게 허락받았냐고 묻는 모순이 지난 100년간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너울 속에서도 변화에 뛰어드는 여성들은 끊임없이 등장한다. 의병가사와 독립군가가 여성들의 새로운 자기표현이 되고, 광복과 전쟁의 경험을 계속해서 기록해갔다.

3부 ‘소망을 담아’는 흥겨운 봄꽃놀이 같은 전시의 절정이다. 내방 안에서 세상 밖으로 나온 여성들의 이야기는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의 소통과 공감을 통해 기억되고 전파된다. 소리 내어 읽고 옮겨 적고 베껴 쓰는 것은 여성들이 내방가사를 향유하는 중요한 방식 중 하나였다.

<헌수가>, 일제강점기.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부모님 회갑을 맞아 오랜만에 친정 식구들과 만난 이야기를 쓴 <헌수가>는 오늘날 전하는 내방가사 가운데 가장 긴 작품이다. 두루마리 길이가 무려 14m에 이르는 이 대작을 필사하기 위해, 여성들은 친구들과 함께 조를 짜기도 했다. 남의 집 경사 이야기를 필사하면 우리 집에도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보이는 너무도 순하고 부드러운 마음은, 질투와 경쟁으로만 여성 서사를 그려왔던 현대인들을 부끄럽게도 한다.

열여덟살에 과부가 된 어린 여성을, 네번이나 과부가 된 여성이 위로해주는 이야기인 <덴동어미 화전가>는 감상을 돕기 위해 만든 화사한 영상처럼 마음이 밝아지는 작품이다. 이야기 속 여성들은 겹겹의 불행과 고난을 겪고도 자기와 남의 고통을 저울질하지 않고, 모든 슬픔을 자기 것처럼 공감해주고 회복을 돕는다. 내방가사가 다른 여성들의 입과 손을 통해 단순히 기쁨과 슬픔 같은 감정만이 아닌 위로와 연대의 의식까지 전이되는 예술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덴동어미 화전가>, 일제강점기, 경북대학교도서관 소장.

생략되지 않은 존재들

내방가사 작품들은 “이내말삼 드러보소” 하고 독자와 청자를 호출하며 시작한다. 글 앞뒤엔 글씨나 글솜씨가 훌륭하지 못하다는 귀여운 겸손도 덧붙인다. 이런 장치들은 모두 내방가사가 속으로 고이는 독백이 아닌, 안에서 밖을 향해 흐르는 이야기임을 나타낸다. 교육과 정치에서 배제되었다고 해서, 여성이 사회적으로도 고립된 존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생각과 감정을 실컷 글로 쓰고 다른 이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들은 생략되지 않는 존재들이 되었다.

그래서 이 전시에서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것이 다 못 펼친 두루마리들이다. 전시에 나온 가사 작품들은 종이 낱장도 있지만 책이나 두루마리로 이은 형태가 많다. 전시실에 완전히 펼쳐놓기가 어려워, 가장자리는 돌돌 말린 채로 진열되어 있다. 두루마리가 영어로는 스크롤이니, 말 그대로 ‘스압’(스크롤 압박)이 대단한 작품들이다. 그런데 전시에서 생략된 그 말린 가장자리가 연상시키는 또 다른 요샛말이 있다.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의 준말인 ‘할많하않’이다. 보여주는 마음보다 숨기는 마음이 더 많은 이 할많하않의 정서는 반드시 그 준말을 쓰는 젊은 세대만의 것이 아니다.

목 밑까지 치미는 말을 꿀꺽 삼켜도 보고, 바람 빼듯 한숨으로 답답한 맘을 눌러본 적 있는 사람은 안다. 말 없는 사람이라고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님을. 할 말이 있는데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대개 약자다. 할 말이 많은데도 하지 않기로 하는 이유는 말해봤자 달라질 것 같지 않아서이다. 그래서 억울한 이야기도 즐거운 이야기도, 들어주고 읽어주는 이가 있을 것이라는 내방가사 화자들의 시원스러운 확신은 효용 없는 발언보다는 차라리 침묵하기를 선택했던 기억들에 위로처럼 다가온다.

“이 내 말 좀 들어보라”며 썩썩한 말투로 말을 걸어오는 과거의 마음들과 만나고 나온 오후의 바람은, 새해에는 모두 생략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 돌돌 말린 이야기들을 펼쳐놓는 새해가 되기를. 또는 누군가의 마음 안에 채 펼쳐지지 못한 이야기에 눈과 귀를 기울이는 우리가 되기를.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 연구원

박물관과 미술관의 문화재 전시나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전시를 소개합니다. 우리 문화재를 사회 이슈나 일상과 연결하여 바라보며, 보도자료에는 나오지 않는 관람 포인트를 짚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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