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9월9일, 평화시장엔 '여자 전태일'이 있었다

한겨레 2022. 1. 29.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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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
미싱타는 여자들
알려지지 않은 9·9 투쟁의 역사
전태일 이후 노동운동 이어간
여성 노동자들 목소리로 기록한
40년 전 '결사투쟁' 너머의 곡절
1970년대 청계피복노동조합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이 스크린 위에 되살아났다. 왼쪽부터 다큐멘터리 <미싱타는 여자들>에 출연한 신순애, 임미경, 이숙희. 영화사 진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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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투쟁’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몇년 전 여성 노동자의 역사를 다룬 책 한 귀퉁이에서 읽은 것이 다였다. 책에는 ‘청계피복노동조합 투쟁사’가 정리되어 있었는데, 그 기록은 1972년 4월22일 ‘평화 새마을 교실’ 설립을 시작으로 다양한 싸움의 목록으로 이어지다가 1977년 9월9일에서 멈췄다. 마지막 줄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9·9 투쟁. 이소선 석방과 노동교실 반환을 요구하며 결사투쟁. 민종덕 투신, 신승철, 박해창 할복 기도, 전순옥, 임미경 투신 기도.” 나는 오늘에야 이 한 줄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다큐멘터리 <미싱타는 여자들>에서였다.

“제2의 전태일이 되어야겠다”

1970년 11월13일,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고 외치며 몸에 불을 질렀다. 한국 사회는 분신의 순간에만 집중해왔지만, 평화시장의 노동운동은 그 이후에도 계속됐다. 1970년 11월27일 청계피복노조가 설립됐고, 그곳에는 여성 노동자들이 있었다. 중학교에 갈 나이에 학교 대신 공장에 온 사람들. 가난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도 있었고 학비를 벌어 계속 공부하고 싶었던 소녀도 있었으며 기술자의 자긍심으로 일했던 숙련공도 있었다. 그들은 ‘7번 시다’에서 ‘1번 오야 미싱사’가 될 때까지 하루에 열다섯시간씩 쪼그리고 앉아 바느질을 하고 미싱을 돌렸다. 덕분에 먹고살 수 있었던 건 노동자들의 가족만이 아니었다. 섬유산업에 산업화 동력을 기대고 있었던 대한민국 역시 그 덕에 먹고살았다.

청계피복노조가 운영했던 노동교실은 노동자들의 해방구였다. 열닷새 밤을 새우고 잠이 고파 도망쳤다 돌아와서 “더 열심히 일하겠다”고 빌어야만 했던 어린 소녀가 근로기준법에 대해 처음 들었던 것도 바로 그곳에서였다. 야학에서 노동자들은 또래 친구를 사귀고, 처음으로 어린 시다에게도 불려 마땅한 이름이 있다는 걸 배웠다. <미싱타는 여자들>은 노동교실에 다녔던 이숙희·신순애·임미경, 세 명의 노동자를 중심으로 1970년대 평화시장을 살았던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물론 노동교실은 노동자도 인간임을 가르치는 급진적인 의식화 공간이었다. 군사독재 시절 공안이 이를 곱게 보았을 리 없고, 노조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정부는 무엇이든 구실을 찾아 괴롭혔다. 그때마다 노동자들은 강경하게 맞섰다. 때로는 승리했고, 때로는 좌절했다. 그렇게 1970년대 노조 활동을 회고하면서, 다큐는 점차 1977년 9월9일의 기억으로 다가간다.

9·9 투쟁에 대한 기술은 마치 미싱사가 미싱을 돌리는 것처럼 서글프면서도 격정적인 리듬을 타고 빠르게 흘러간다. 열 명에 가까운 등장인물들이 각자 경험한 그날에 대해 말하고, 다큐는 색색의 천을 박음질하여 하나의 옷을 완성하듯이 이어 붙인다. 같은 날짜 같은 장소에 있었지만 다른 시간을 경험한 사람들의 여러 관점과 기억이 맞물리면서 9·9 투쟁은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가족들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정도로 깊은 상처를 남겼던 그날, 1977년 9월9일에는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공안은 1977년 9월10일을 노동교실 퇴거일로 정한다. 이에 노조는 9월9일 점거농성을 계획한다. 노조 교육선전부장이었던 이숙희는 이 결정이 달갑지 않았지만, 함께 농성하기로 한 동료들에게 “문만 열어주기”로 하고 건물 앞을 지키고 있는 경찰을 따돌리고 교실로 올라갔다. 약속한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은 오지 않았다. 오직 어린 시다 임미경과 그의 친구가 도착했을 뿐이었다. 문만 따주고 빠져나갈 계획이었지만 임미경만 두고 나올 수 없었던 이숙희는 결국 그 자리에 남는다. 이어서 집행부와 노동자들이 도착했고, 경찰이 건물을 에워싸기 시작한다.

남성 노동자들이 투신을 하고 칼로 몸을 긋는 극단의 대치 상황에서 전순옥과 임미경이 창틀에 올라서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떨어지겠다”고 외쳤다. 임미경은 인터뷰에서 말한다. “그 시절 나에겐 근로기준법이 희망이었다.” 그러나 버젓이 있는 법조차 지켜지지 않는 현실은 좌절을 안겨주었다. 그는 누군가가 전태일의 뒤를 잇는다면 상황이 달라지리라 믿었다. 그래서 자신이 “제2의 전태일”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숙희와 동료들이 말리지 않았다면, 그는 정말 뛰어내렸을지도 모른다.

그날의 항전은 농성에 참여했던 노동자 53명이 연행되고, 그중 신순애·이숙희·임미경·신승철·김주삼 등이 구속되면서 마무리된다. 경찰은 잡혀온 이들에게 끊임없이 “누가 시켜서 왔느냐”고 물었다. 그때 임미경은 “내가 (스스로) 왔다”고 말했다. “왜 왔냐”는 질문에는 “타당하지 않아서 왔다”고 답했다. 결국 그는 이숙희, 신순애와 함께 징역을 살게 된다. 그의 나이 열네살이었다. 국가는 너무 어려서 감옥에 갈 수 없는 나이였던 그의 주민등록번호까지 조작해서 투옥시켰다.

엄청 싸웠고, 끝까지 싸웠다

처음 김정영 감독이 청계피복노조 여성 조합원들의 이야기를 다큐로 만들겠다고 했을 때, 미싱사로 일했던 선생들께선 “왜 실패를 기록하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으로 시작된 청계피복노조는 조직력은 취약했지만 사회의 주목도는 높았다. 그만큼 국가의 탄압 역시 강했는데, 노조는 결국 9·9 투쟁이 남긴 상처를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다. 누군가에게는 명백한 실패일 것이다.

그러나 다큐에서 신승철 선생이 말하듯이 그 ‘오야’와 ‘시다’들이 “전태일이었다”. 그들은 “엄청” 싸웠고, 끝까지 싸웠다. 그리고 지금의 평화시장을 만들었다. 그 역시 제대로 기억되어야 한다. <미싱타는 여자들>은 “결사투쟁”, “투신 기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곡절을 40여년 만에 스크린 위로 되살려냈다. 가혹한 노동 조건 속에서도 ‘타당한’ 세계를 꿈꿨던 사람들의 이야기. 그 뒤를 따라가는 우리가 선생들의 삶으로부터 ‘타당하다’는 말의 의미를 새롭게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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