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을 바꾼 피카소조차..끊임없이 덧칠하며 고민했다 [아트마켓 사용설명서]
유화는 물감의 농도에 따라 불투명에 가깝게 색을 표현할 수 있어 작가들이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처음 그렸던 그림 위에 여러 번 물감을 덧칠해 고치는 일이 흔하다. 일례로 19세기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의 작품 '만종(L'Angelus)'에 등장하는 감자 바구니에는 원래 죽은 아기가 그려져 있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기도 했다.
담요를 뒤집어 쓴 사람이 손을 안으로 숨긴 채 구석에 웅크려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파블로 피카소의 1902년 작 '웅크린 거지(Misereuse accroupie)' 뒤에 다른 그림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밝혀낸 것도 이런 물감층 분석을 통해 이뤄졌다.
미국 노스웨스턴대-시카고예술연구소 과학적예술연구센터(NU-ACCESS) 연구진은 적외선, X선 영상 분석 기법을 토대로 피카소가 웅크린 거지를 완성하기 전 처음 그렸던 그림은 빵을 든 여인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내며 2018년 '미국과학진흥협회(AAAS) 연례총회'에서 발표했다. 연구에는 캐나다 토론토의 온타리오 아트 갤러리, 미국 워싱턴의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등도 참여했다.
연구진에 따르면 피카소가 웅크린 거지를 완성하기 전 처음 그렸던 그림은 빵을 든 여인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또 그 뒤에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라베린트 도르타 공원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다른 작가의 풍경화도 깔려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라베린트 도르타 공원은 당대 화가들이 자주 찾았던 곳이다.
그 과정에서 연구진은 가려져 있었던 피카소의 붓 터치를 발견했고 '매크로 X선 형광 분석(MA-XRF)'을 활용해 추가 분석했다. MA-XRF를 이용하면 그림 안쪽에 있는 물감 성분과 종류, 색상 등을 알 수 있다.
성분별로 영상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철과 크롬 성분을 검출한 영상에서는 기존의 웅크린 거지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철 성분이 많은 프러시안 블루 색상과 크롬이 많은 녹색 물감은 피카소가 우울증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던 '청색 시기(Blue Period·1901~1904)'에 자주 썼던 물감이다.
반면 납과 카드뮴, 아연 성분이 검출된 영상에서는 그림에서 빵으로 추정되는 둥근 물체를 손에 들고 있는 오른팔의 모습이 나타났다. 녹색 물감에서 많이 나오는 바륨 성분은 풍경화의 풀숲에서만 높게 나왔다. 웅크린 거지 뒤에 깔린 풍경화는 피카소가 아닌 다른 작가의 그림이라는 뜻이다(피카소가 썼던 녹색 물감은 크롬 성분이 많다).
웅크린 거지 뒤에 풍경화가 있다는 사실이 처음 알려진 건 1992년 X선 영상 촬영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당시 기술로는 이 풍경화가 피카소 본인 그림인지, 다른 사람 그림인지 알기 어려웠다. 어떤 물감으로 그려졌고 피카소가 덧대어 그린 부분이 어딘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그림에서 보이지 않는 오른팔의 모습을 발견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마크 월턴 NU-ACCESS 공동센터장은 "피카소가 그림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빵을 들고 있던 오른팔을 옷으로 덮은 것"이라며 "빵을 든 모습은 기독교나 천주교의 성찬식 장면을 연상시킬 수 있다. 피카소는 이 그림이 특정 종교를 상징하는 걸 원치 않았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케네스 브러멀 온타리오 아트갤러리 큐레이터는 "작가나 시대에 따라 사용하는 물감의 성분이 조금씩 다르다"며 "물감 정보는 누가 언제 어떤 부분을 그렸는지 밝히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는 과거에 그려진 미술 작품을 해석하는 데 과학적인 분석 기법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전망된다. 미술사에 던져진 여러 의문점을 해결할 수 있으리란 기대다. 또 과거에는 영상 분석을 위해 수백만 원을 들여 작품을 이송해야 했지만 최근에는 휴대용 장비로도 분석이 가능해져 활용 가치가 더욱 높아졌다.
월턴 센터장은 "그림 뒤에 가려진 여러 층의 붓 터치를 꿰뚫어보면 화가가 그림을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엿볼 수 있다. 이런 흔적은 작품은 물론이고 화가를 연구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송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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