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 우린 뿌리 찾아 저마다의 땅으로 가네

2022. 1. 29. 09:19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고향에 못 가도 이 책만은" 김병종 화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이어령 지음|문학사상사|290쪽|1만5000원

무려 60년 전에 나온 책의 저자를 현전으로 만나는 일은 행운이다. 얼마 전 와병 중인 이어령 선생을 뵙고 저자 서명에 낙관까지 한 새 책을 받았다. 오랜 병고로 더할 나위 없이 야윈 모습이었다. 육(肉)의 물성(物性)이 다 빠져나가고 정신의 하얀 결정체만 남은 느낌이었다.

서가를 둘러보니 거기 ‘흙 속에 저 바람속에’가 보인다. 언젠가 저자의 요청으로 저 책 표지화를 그린 적이 있다. 소위 3대가 읽는다는 그 책은 아직도 굳건히 서점 매대를 지키고 있으니 이제 우리 시대의 고전이 되었다 할만하다.

어쩌면 글쓴이 자신이 이 땅의 흙과 바람과 햇빛으로 큰 한 그루 나무였다 할 수 있겠다. 그 지성의 거목이 이제 잎을 다 떨구고 겨우 자신을 지탱하며 서있다. 고요한 얼굴로 손을 내밀어 나를 맞을 때 ‘아, 이 손’ 싶었다. 연자에서 실이 풀려나가듯 실로 수많은 말과 글이 이 손을 통해 풀려 나갔을 것이다. 이제는 오래 쓴 수공업적 장인의 도구 같아 보이는 그 갈퀴 같은 손에서는 놀랍게도 아직 글이 직조되어 나오고 있다. 그러고 보면 이어령의 ‘손’은 이어령의 ‘숨’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숨 쉬고 있는 한 글도 함께 나오는 것이니까.

‘숨’과 ‘쉼’은 획 하나 차이인데 숨 쉬고 있는 그에게서 쉼을 본 적이 없다. 그렇게 민들레 꽃잎처럼 일평생 사방으로 퍼뜨려진 언어의 ‘밈’이 철마다 꽃피고 열매 맺을 것이니 이어령의 숨은 그의 육이 떠나고 나서도 계속될 것이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책은 제목이 반이라는데 그 옛날 참으로 똑 떨어진 제목을 붙였구나 싶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어쨌다는 것인지 거두절미하고 있으니 천생 책장을 들출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목은 흙과 바람으로 되어있는데 내용은 한국인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한국인,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가를 묻는 내용이다.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는 깡마른 박정희 의장이 검은 안경 끼고 나와 장차 이 나라의 어린이들도 우유를 먹는 날이 오도록 하겠다고 공약하던 시절이다. 예컨대 ‘우리’의 문화와 정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때 30대 초반의 이어령이 한국인의 뿌리, 정신, 자존 그리고 비전 같은 것을 들고나왔던 것이다. 동양화의 ‘홍운탁월(구름을 물들여 달을 드러냄)’ 기법처럼 끝없이 서양을 끌어다가 한국을 드러내면서 타자처럼 한국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무엇보다 이 책은 한국인의 원형적 고향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땅에 뿌리 내린 가족과 씨족공동체 사회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 명절 때마다 이어지는 민족 대이동도 어찌 보면 단순한 공간 이동을 넘어 저마다의 고유한 뿌리로 회귀하려는 의식의 이동일 것이다. 산지사방 흩어져 있다가도 명절만 되면 이 의식이 살아나서 연어처럼 저마다의 땅으로 돌아가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고향 의식은 항해하는 민족이나 끝없이 새로운 땅을 찾아가는 노마드형 사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이 시대가 광속으로 바뀌었는데 여전히 그 옛날의 이 책이 읽히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김병종 화가·가천대 석좌교수

김병종(서울대 명예교수·가천대 석좌교수) 화백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