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는 연어의 심정으로.. 설, 책의 강물에서 헤엄치다

곽아람 기자 2022. 1. 29.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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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인 추천 "고향에 못 가도 이 책만은"
/일러스트=이철원

이번 설 연휴도 코로나 바이러스에게 빼앗겼다. 거리 두기와 집합 금지가 어김없이 귀성길 발목을 잡았다. 그리운 가족들 얼굴을 이번에도 보기 힘들지만, 고향을 향해 달음질치는 마음이야 누가 막을 수 있을까. Books 설 특집은 ‘설 연휴, 고향을 그리며 읽으면 좋은 책’. 전북 남원이 고향인 화가 김병종, 고향 서울을 떠나본 적 없다는 소설가 박민정, 충남 예산 출신인 소설가 윤대녕, 강원 양구에서 태어난 시인 이해인 수녀, 대구에서 상경한 소설가 정지돈(이상 가나다 순)이 고향 어귀로 향하는 초심을 노래하거나 , 귀성하지 못한 명절에 홀로 고요히 읽기 좋은 책 등을 소개한다.

명절에 우린 뿌리 찾아 저마다의 땅으로 가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이어령 지음|문학사상사

서가를 둘러보니 ‘흙 속에 저 바람속에’가 보인다. 저자의 요청으로 책 표지화를 그린 적이 있다. 소위 3대가 읽는다는 이 책은 아직도 굳건히 서점 매대를 지키고 있으니 이제 우리 시대의 고전이 되었다 할만하다.

제목은 흙과 바람으로 되어있는데 내용은 한국인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한국인,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가를 묻는 내용이다.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는 깡마른 박정희 의장이 장차 이 나라의 어린이들도 우유를 먹는 날이 오도록 하겠다고 공약하던 시절이다. ‘우리’의 문화와 정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때 30대 초반의 이어령이 한국인의 뿌리, 정신, 자존 그리고 비전 같은 것을 들고나왔던 것이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무엇보다 이 책은 한국인의 원형적 고향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땅에 뿌리 내린 가족과 씨족공동체 사회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 명절 때마다 이어지는 민족 대이동도 어찌 보면 단순한 공간 이동을 넘어 저마다의 고유한 뿌리로 회귀하려는 의식의 이동일 것이다. 산지사방 흩어져 있다가도 명절만 되면 이 의식이 살아나서 연어처럼 저마다의 땅으로 돌아가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고향 의식은 항해하는 민족이나 끝없이 새로운 땅을 찾아가는 노마드형 사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이 시대가 광속으로 바뀌었는데 여전히 그 옛날의 이 책이 읽히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김병종 화가·가천대 석좌교수

이상의 ‘날개’ 떠올리며 매일 같이 고향에 산다

날개: 이상 소설전집

이상 지음|애플북스

고향이라는 단어에 따라오는 아련함과 그리움 같은 것이 내겐 생소한 개념이다. 태어난 곳도 살고 있는 곳도 서울인 까닭이다. 내게 고향 소식은 재개발과 집값 상승의 풍문으로만 들려온다. 내가 살았던 아파트는 허물어졌고, 신발 가방을 끌며 오가던 추억 속 오솔길 따위도 자취조차 없다. 내겐 그런 것을 그리워할 마음이 애초에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향수라는 단어를 내 삶의 조건대로 바꿔본다면, 나는 어디에서든 고향을 생각한다. 모던 경성의 정오의 사이렌이 더는 울리지 않지만 여전히 ‘현란을 극한 정오’가 어울리는 대처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1936년 작 이상의 ‘날개’ 마지막 장면은 미쓰꼬시 백화점 옥상에 서 있는 화자에게서 나온다. 지금은 ‘명동 신세계점’이다. 경성역 티룸에 앉아 있던 화자가 들입다 쏘다니다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를 넘기며 다다른 곳.

지금은 2022년, 그 옥상에서 인공의 날개를 상상한다는 건 우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화자의 못나 빠진 망상에 동의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게 여전히 고향 서울을 부감하는 가장 상징적인 장소는 바로 그곳이다. 마천루의 개념은 끝없이 갱신되어 이제 서울 하늘 성층권에 임박한 듯한 높은 건물이 세워졌지만, 하늘이 가깝다기보다 땅이 멀어 보이는 못난 인간의 절망을 나는 ‘날개’에서 이미 오롯이 겪었기 때문이다. 이 서울을 떠나지 못하고 남겨둔 자리 없는 사람의 마음으로, 매일같이 고향에 산다. /박민정 소설가

코로나로 귀향 포기한 설… 반추와 회복을 바란다면

작은 동네

손보미 지음|문학과지성사

근래 작가 손보미는 집요할 정도로 열 살 전후의 아이가 등장하는 성장소설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작가는 자신을 일신하려는 시기에 흔히 ‘자기 기원에의 탐구’로 들어서게 된다.

장편소설 ‘작은 동네’의 주인공 ‘나’는 시간강사 일을 하며 살고 있다. 남편은 연예 기획사 직원. 어머니가 담낭암으로 사망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니, 그 전에 어머니가 열아홉 살에 미금도라는 섬을 몰래 빠져나와 목포에 정착하면서 ‘나’의 수수께끼 같은 드라마가 펼쳐진다.

미금도, 목포, 경기도 광주, 서울, 경주로 이어지는 여정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열한 살 때까지 살았던 광주의 ‘작은 동네’를 회상하고 추적한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남편의 연예 기획사 소속이었던 배우의 실종과 과거 작은 동네에서 만났던 전직 여가수의 자살을 연관시키며 자신의 출생에 관한 비밀에 접근한다. 마침내 지금까지 인식하고 있던 자신과는 전혀 다른 나와 조우하는 것이다.

이 소설은 질문과 암시를 던져준다. 우리는 과연 자신이 알고 있던 ‘나’와 동일한 존재인가? 비단 작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명절이 되면 자기 기원을 찾아 떠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번 설은 귀향을 포기한 사람이 많다. “책 속에는 모든 세계가 다 들어 있어.” 이 소설 속 인물이 하는 말인데, 자신을 고요히 반추하고 회복하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하며 감히 일독을 권한다. /윤대녕 소설가

가족 때문에 아프다면 밤하늘을 올려다보자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김용택 지음|마음산책

달빛이 환한 날에는 세상의 좋은 말을 하나씩 불러본다. 고요함, 단순함, 겸손함, 따스함, 명랑함, 순결함, 참을성, 평상심…. 달빛 덕분에 이 말들을 생각하며 시 한 편을 쓸 때도 있다.

설 명절에 고향을 찾는 사람은 가족이 그리운 것이다.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가족임에도 너무 가까운 관계라고 생각해서 그러는지 뾰족하게 서로 공격하고 아파한다. 내가 받는 편지 중에는 가족에게 상처받아 우울해하는 내용이 많다. 나는 답장을 쓰기 전에 기도한다. 노여움을 오래 품지 않는 온유함과 용서에 더디지 않은 겸손, 그리고 감사 인사를 미루지 않는 슬기를 지니게 해달라고.

내 고향은 강원도 양구. 일찍이 떠나와 이제는 수도원이 고향 같다. 설날엔 수도원 장독대에 올라가 하늘과 광안리 바다를 바라본다. 고향의 달을 그리며 펼쳐본 시집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는 제목부터 다정하다.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김용택 시인은 자신이 태어난 바로 그 고향 집에서 살고 있다. 평생 산 집에서 바라본 달을 근사하게 느끼는 것은 시인의 마음이 매일 새롭기 때문이다. 달이 떴다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 수 있는 감성과 여유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이번 설날엔 무엇이 새로울까. 밤하늘을 올려다보자. /이해인 수녀·시인

모두 떠나 고요한 서울… 혼자 읽기 더욱 좋은 책

친구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공경희 옮김|열린책들

나는 명절에도 고향에 가지 않는다. 친척도 만나지 않고 차례도 지내지 않는다. 나 같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코로나 바이러스 이후 별수 없이 그 수가 늘었으리라. 내가 고향에 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명절 때 서울이 고요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고요함은 언제나 독서를 위한 최적 배경이 된다.

시그리드 누네즈의 장편소설 ‘친구’는 친구의 죽음을 통해 삶과 문학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책이다. 뉴욕에 홀로 사는 소설가인 주인공은 어느 날 스승이자 연인이었던 지인의 자살 소식을 듣는다. 추도식이 끝나고 주인공은 지인이 키우던 대형견 아폴로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아폴로는 늙고 기력이 쇠한 개다. 새 주인을 못 본 척할 뿐만 아니라 무시하기까지 한다. 주인공은 아폴로와 가까워지는 동시에 세상을 떠난 친구와 나눈 기억을 정리해야 한다.

’친구’는 친구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이야기이다. 마흔 살이 넘어서 작가 생활을 시작한 시그리드 누네즈는 이 과정을 담담하고 고요하지만 흘러내릴 만큼 풍성한 통찰을 담아 그린다. 그러나 그의 통찰은 모든 페이지에서 균형을 잡으며 독자들을 상실과 기억, 변화에 대한 명상으로 이끈다. 얇은 책이지만 읽고 나면 한 계절을 살아낸 듯한 기분이 든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의 고요한 서울에서, 홀로 읽기에 더없이 좋은 책이다. /정지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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