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베이징연락처 해병대원 사고 잦아, 중 정부 골치 앓아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13〉
중국인들, 미 해병대원들에게 반감
미군은 밤 생활이 중요했다. 베이징연락처는 육전대원이 거주하는 외교관 아파트에 카페를 겸한 바를 개설했다. ‘해군의 집(海軍之家)’과 ‘해군육전대구락부(海軍陸戰隊俱樂部)’ 간판 걸고 입장권을 팔았다. 단골들에겐 회원증도 발부했다. 베이징 주재 외국인들이 해만 지면 몰려와 음주와 가무를 즐겼다. 여자 문제가 빠질 리 없었다. 주먹질이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미 해병대원이 회원증 없이 입장한 아프리카 유학생을 구타했다. 화가 난 유학생은 기물 때려 부수고 인근에 있는 외교관 집으로 도망쳤다. 중국 정부는 모든 원인을 미국 측에 돌렸다. 브루스에게 육전대원 철수를 요구했다. 브루스는 엄하게 단속하겠다는 것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11월 중순, 중국에 온 키신저가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에게 선처를 구했다. 저우가 조건을 제시했다. “중국은 주권국가다. 미국은 중국의 주권을 존중하는 습관을 갖기 바란다. 해군육전대라는 명칭의 사용을 엄금한다. 군복을 착용하지 마라. 육전대원이건 아니건 중국은 상관치 않겠다. 일률적으로 연락처 관원으로 인정하겠다. 군복 입고 외부에 나오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 연락처 내에서 구보와 총검술로 세인의 주목을 끄는 행위도 불허한다.” 키신저는 모두 수용했다. 1974년 봄, 육전대원이 또 사고를 쳤다. 익명으로 미군의 횡포를 알리는 서신이 베이징 주재 각국 대사관 우편함에 쌓이기 시작했다. 브루스는 육전대원들을 철수시켰다. 보안요원을 민간인으로 교체했다. 새로운 보안요원도 군복만 안 입었을 뿐, 육전대원이긴 마찬가지였다. 중국 측은 알면서도 모른 체했다.
중국도 워싱턴에 연락처 설치를 서둘렀다. 프랑스대사 황쩐(黃鎭·황진)과 훗날 주미대사를 역임하는 한쉬(韓敍·한서)를 주임과 부주임에 임명했다. 1973년 4월 14일, 한이 인솔하는 선발대가 워싱턴으로 떠났다. 참사관 지자오주(冀朝鑄·기조주)의 회고를 소개한다. “화창한 봄날, 일행 10명이 베이징에서 출발했다. 도쿄에서 보잉747로 갈아탔다. 특등실에서 호강을 누렸다. 미국 지형과 교통법규를 숙지하기 위해 선발대에 합세한 황쩐 주임의 운전기사는 장신에 풍채가 훤하고 위풍이 당당했다. 주임으로 오인한 승무원들에게 각하 소리 들으며 온갖 환대를 받았다. 영어를 모르는 기사는 고개만 끄덕여도 위엄이 넘쳤다. 4월 17일 오후 덜레스 공항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국무부 관계자 중 하버드 재학 시절 같은 기숙사에 있던 친구를 발견하고 놀랐다. 화교 신문과 미국 일간지가 선발대 도착을 큼지막하게 보도했다. 대만 지원받는 화교일보는 중공 비적(匪賊)이 워싱턴에 나타났다며 우리를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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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의 브루스 주임은 중국과 궁합이 맞지 않았다. 연락처에서 두문불출했다. 1974년 8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물러난 닉슨을 부통령 포드가 승계했다. 포드는 사직을 원하는 브루스의 후임을 물색했다. 영국 대사로 내정된 공화당 전국위원회 위원장 조지 부시가 베이징 연락처 주임을 자청했다. 부시는 유엔 대사시절 유엔 회원국이 된 중국대표단과 친분이 두터웠다. 1974년 10월 21일 베이징에 도착한 부시는 중국을 이해할 방법을 찾았다. 크라이슬러 리무진 타고 베이징을 누볐지만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1개월 후, 거리에 넘치는 자전거 행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인 바바라에게 들뜬 사람처럼 외쳐댔다. “자전거를 타야 중국을 이해할 수 있다.”
브루스는 당시 미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이었다. 중국을 떠나기 전 베이징을 방문한 중국계 영국 작가 한수인(韓素音·한소음)에게 이런 예견을 했다. “마오쩌둥의 글과 언어에 감동했다. 중국은 미래가 밝다. 풍부한 자원을 합리적으로 이용하고 사치와 낭비를 억제하면 개혁은 성공한다.” 한은 윌리엄 홀든과 제니퍼 존스가 주연한 영화 모정의 실제인물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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