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드라이브 마이 카' 다시 시작해줘

2022. 1. 28.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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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번거롭고 새삼스러웠던 설
이제는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
잘못 끼워졌던 첫 단추를 풀고
다시 끼울 수 있다는 마음이랄까

‘드라이브 마이 카’, 비틀스가 불러 유명해진 이 노래는 무라카미 하루키에 의해 단편소설이 되었다. 그리고 최근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에 의해 동명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예매가 시작되자마자 매진이 되어 버린 이 영화는 지금 장장 3시간에 걸친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한 달 내내 상영되면서 코로나 시국 하의 극장가를 달구는 조용한 화제작이 되었다.

‘여자 없는 남자들’이라는 소설집에 수록된 하루키의 단편은 비교적 단출한 이야기다. 남자 배우가 접촉사고를 내고 면허가 정지된다. 정밀 검사 결과 그에겐 녹내장 징후가 발견되고 시야결손으로 인한 운전 불가 판정이 내려진다. 오래된 노란색 사브 900 컨버터블(영화에서는 빨간색으로 바뀌어 나오는데 이 변화가 미묘하게 여겨지긴 한다)을 직접 운전하며 오고 가는 차 안에서 카세트테이프를 틀어놓고 연극 대사 연습을 하던 그는 소속사에 의해 스물네 살 여성 전속 기사를 배치받는다. 딱 사흘을 살다 죽어버린 딸과 같은 나이다.
신수정 명지대 교수·문학평론가
하마구치는 이러한 설정에 같은 소설집의 다른 단편에서 빌려온 이야기들을 뒤섞는다. 암으로 죽은 아내의 불륜을 의심하는 남자의 비틀린 내면이 두드러지고, 홋카이도 출신 여자의 가족사에 히로시마와 후쿠시마로 이어지는 일본의 뿌리 깊은 원폭 피해의 트라우마가 변주되는 식이다. 아마도 영화의 의욕 과잉이라고 해도 무방해 보이는 이 지점은 소설의 간명함과 어긋나며 우리의 삶을 둘러싼 어떤 기미를 분명하게 규정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하루키 특유의 소설적 진술을 배반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대신 영화는 소설이 구사하기 어려운 속도를 얻었다. 나는 드라이빙 이미지로 구현된 영화 속 속도감에 반해 버렸는데 그것은 영화가 줄 수 있는 최상의 향유 같기도 했다. 빨간색 자동차가 유영하듯 미끄러지며 그려내는 도쿄와 히로시마의 풍경, 눈 쌓인 홋카이도의 폐허의 잔상은 어떤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인생의 알레고리 같기도 했다. 가속이든 저속이든, 시야결손으로 자신의 차를 몰 수 없으면 타인의 도움에 의탁해서라도 구르고 또 굴러 헐떡이듯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는 자동차의 이미지만으로도 영화는 이미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다 보여주었다.

영화의 마지막, 젊은 여성 기사는 빨간색 사브를 몰고 한국으로 짐작되는 해안도로를 달린다. 어떤 설명도 없이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이 장면은 당혹스러운 만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듯하다. 나로선 이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 하마구치가 3시간에 걸친 영화적 여정을 이어왔다는 느낌도 없지 않다. 이 장면은 의사 부녀관계로 설정된 남자와의 관계에서의 주도권이 최종적으로 여성, 딸의 세대로 옮겨오는 대목이자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미지의 공간에서의 새로운 삶의 시작이 영원한 가능성의 세계에서 실제의 삶으로 이동하는 대목이 아닐까.

하마구치는 그것을 선명한 ‘빨간색’으로 낙관적이고 적극적으로 시각화했다. 물론 하루키는 조금 더 비관적이고 조심스럽다. 그는 소설 속 남자 배우의 연기론을 빌려 말한다. “박수를 받고 막이 내려진다. 일단 나를 벗어났다가 다시 나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돌아온 곳은 정확하게는 이전과 똑같은 장소가 아니다.” 어느 쪽이 마음을 끌어당기는가? 글쎄, 쉽지 않은 선택이다. 무엇이 되었든 다른 착지점, 애초의 극본에서 벗어난 미묘한 변화의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점은 같아 보인다. 비록 그것이 완전한 변신이 되든, 조금, 아주 조금 이동한 지점으로의 회귀가 되든 간에.

다시 새해를 맞는다. 지금보다 조금 더 젊었을 때는 연말연시의 흥청거림이 잦아들고 신년의 각오를 새롭게 다지려는 차 또 설이라고 경황없는 나날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늘 번거롭고 새삼스러웠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까 그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잘못 끼워진 첫 단추를 풀고 다시 끼울 수 있다는 마음이랄까.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위안이 된다. 멀리 가든, 가지 않든, 우리는 다시 새해를 맞아 이전과 또 조금은 다른 자리로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신수정 명지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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