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2030] 힙합 듣는 버스 기사
마을버스에선 힙합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운전석을 흘끗 보니 20대 후반, 많아야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버스 기사가 앉아 있다. ‘버스 아저씨’라고 부르기도 어색할 정도로 앳돼 보였다. 반면 좌석에는 온통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뿐이었다. 버스에선 연달아 요즘 인기 있는 힙합 가수의 거친 랩이 쏟아졌다. 버스 기사는 강렬한 비트를 따라 능숙한 운전 실력으로 비탈길을 올랐다. 공연장을 잘못 찾은 관객처럼 꼿꼿이 앉아있는 어르신들의 뒤통수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몇 년 새 젊은 버스 기사들이 자주 눈에 띈다. 한 번은 청년 버스 기사에게 할머니 승객이 약국 가는 길을 물었다. “모르겠는데요.” 퉁명스러운 답이 돌아왔다. ‘젊은 친구가 너무하네! ‘싶던 차에 버스 기사가 크게 소리쳤다. “승객분 중에 아는 분 있으면 알려주세요!” 문가에 서 있던 중년 여성이 할머니에게 “○○○ 정거장에서 내리면 돼요”라고 알려주고선 ‘쿨하게’ 버스를 내렸다. 할머니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자 또 다른 젊은 승객이 친절히 되풀이해줬다. 이 얼마 만에 보는 세대 통합인가. 모처럼 기분 좋게 버스에서 내렸다.
요즘 20~30대 버스 기사 지망생이 늘고 있다고 한다. 유튜브에는 젊은 버스 기사들이 자신의 일상을 기록한 브이로그 영상도 올라온다. 한 20대 버스 기사 유튜버는 4년제 대학 졸업 후 공무원으로 일하다 회의를 느끼고 버스 회사에 취업했다. 그는 버스 기사를 선택한 이유를 이렇게 털어놨다. “밤늦게까지 무의미한 서류 작업을 반복하다 보니 ‘내가 정말 이 사회에 필요한 사람인가’ 의문이 들었다. 버스 기사로 일해보니 무엇보다 타인에게 도움이 된다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무의미한 일이 아닌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기분이었다.”
젊은 세대에서 ‘블루 칼라(Blue Collar·육체 노동직)’에 대한 인식이 확연히 달라지고 있다. 최근 구인·구직 플랫폼 ‘사람인’이 20~30대 208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0명 중 8명은 “수입 등 조건이 맞는다면 기술직을 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가장 큰 이유는 ‘능력이나 노력만큼 돈을 벌 수 있어서’(55.7%)였다. ‘대체하기 어려운 기술로 내 일을 할 수 있어서’(51.2%), ‘정년 없이 일할 수 있어서’(39.2%), ‘자유롭게 시간을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아서’(28.7%) 등의 이유가 뒤를 이었다. 88.4%는 ‘자녀가 기술직으로 일해도 상관없다’고 답했다.
돈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주식과 가상 화폐 투자로 꽤 큰 돈을 벌고 퇴사한 30대 지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기사로 재취업했다. 그는 “집에서 놀기보단 적은 시간이라도 사회에서 일하는 게 좋더라”고 했다. 강상중 도쿄대 명예교수는 저서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에서 “일이란 사회로 들어가는 입장권이자 ‘나다움’의 표현”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저마다 다른 색깔의 입장권을 당당히 선택한 모든 이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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