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이나 지혜만 있다고 영웅이 되는건 아니다

한겨레 2022. 1. 27.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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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신동흔의 치유적 신화읽기]토르의 망치와 궤네깃또의 책 사이

영웅신화의 보편성과 특수성

신화와 영웅의 세계적 보편성

구전으로 전해온 설화는 지역과 사람마다 천차만별로 다르지만 그 이면에 담긴 서사는 원형적 보편성을 지니는 경우가 많다. 인간의 존재적 정체성이나 고난 극복을 통한 자아실현을 다루는 이야기는 더욱 그러하다. 신화의 기본 화두에 해당하는 주제다.

신화에서 인생과업 성취를 통한 존재적 자기실현이라는 문제의 중심에 위치하는 캐릭터가 영웅이다. 영웅은 절륜한 힘이나 지혜 등을 갖춘 인물인데 단지 그것만으로 영웅이 되지는 않는다. 투쟁을 통한 과업 성취가 주요한 조건이 된다. 그 과업이 자기자신을 넘어서 세상에 기여하는 것이어서 집단의 자발적 존숭 대상이 될 때 그를 영웅으로 일컫게 된다. 넓게는 인류의 영웅이나 국가의 영웅부터 좁게는 마을영웅이나 가족영웅까지 영웅의 범주는 무척 다양하다.

신화학자들이 영웅적 인물의 생애를 정리한 서사모형에 ‘영웅의 일대기’가 있다. 귀한 혈통과 비정상적 출생, 버려짐과 죽을 위기, 구출과 성장, 공적 성취와 개선, 박해자와의 투쟁과 승리, 영광의 구현과 이례적 죽음 등으로 이어지는 서사적 틀이다. 본래 서양신화 속의 영웅들을 바탕으로 추출된 것인데 세계적 보편성을 지닌다. 예컨대 한국 건국신화 속 주몽과 석탈해, 김알지 등의 생애가 영웅의 일대기 구조를 따른다는 분석이 이루어진 바 있다. 이 외에 조셉 캠벨과 보글러가 각각 19단계와 12단계로 추출한 ‘신화 속 영웅의 여정’이라는 서사모형도 보편성을 인정받아서 신화 분석과 스토리텔링에 널리 적용되고 있다.

신화 속 영웅들은 구체적 과업 면에서도 원형적 공통성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여러 개 떠오른 해를 활로 쏴서 떨어뜨리는 일이나 재앙을 초래한 악룡을 퇴치하는 일 등이 그것이다. 생사의 경계를 넘어 초월적 세계에 진입함으로써 인간의 행동반경을 넓히는 일 또한 세계 신화에서 널리 볼 수 있는 과업이다. 그 과업들은 기본 속성 면에서 자연과의 싸움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열악한 환경이나 자연적 제약에 맞선 인간적 투쟁의 면모다. 앞선 글에서도 강조했지만, 신화 속 영웅은 인간의 표상으로 성격을 지닌다. 어떤 인간이냐면, 모든 한계에 굴하지 않고 부딪쳐 싸우는 인간!

신화 속 영웅은 인류의 표상인 동시에 특정 집단이나 공동체의 표상이다. 그리스 신화와 북유럽 신화 속의 영웅은, 또는 중국 신화와 한국 신화 속의 영웅은 서로 같으면서도 다르다. 고대의 영웅과 중세의 영웅, 근대의 영웅과 현대의 영웅 또한 마찬가지다. 오늘날의 상황을 보자면 나의 영웅과 너의 영웅, 그들의 영웅이 서로 갈라져서 서사적 분열과 갈등을 낳고 있음을 본다. 다름이 ‘틀림’처럼 되어서 부딪치는 형국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다름의 맥락을 오롯이 이해하면서 이를 매개하는 서사적 접속을 이루는 일이다. 이제 북유럽 신화와 제주 마을신화 속의 영웅신을 통해 그 서사적 연결고리를 찾아보려 한다. ‘지금 여기의 나’를 축으로 해서.

북유럽의 환경과 신화, 그리고 오딘과 토르

전통적으로 신화적 영웅을 말할 때 핵심에는 그리스 신화가 있었다. 영웅적 면모가 짙은 거인 프로메테우스로부터 긴 설명이 필요없는 헤라클레스와 테세우스,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 등에 이르기까지 그리스 신화는 영웅의 향연이라 할 만한 면모를 지닌다. 하지만 그 매력도가 다소 떨어졌는지, 요즘 신세대는 오딘과 토르 등 북유럽 신화의 영웅에 열광하는 중이다. 좀더 날것으로 다가오는 야생적 면모가 한몫을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야생성은 그 자체 신화의 본래적 성격이기도 하다.

북유럽 신화는 태초의 창조신화부터 거친 역동성을 지니며 일련의 서사가 뜨겁고 강렬한 투쟁으로 점철돼 있다. 오딘과 토르 등 북유럽 신화의 주역들이 영웅적 성격을 지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반영웅(半英雄)의 면모를 지니는 로키에 이르기까지, 북유럽 신화의 주인공들이 움직이는 길은 끝없는 부딪침과 투쟁의 연속이다. 마치 싸우기 위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은 모습이다.

북유럽 신화에서 오딘과 토르 등은 신(神)이다. 가장 중요한 신! 이들을 두고서 영웅이라 부르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신인 동시에 명백히 영웅에 해당하는 면모를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자연이 아닌 인간존재를 표상한다. 자연의 편에서 세상을 주재하여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편에서 자연의 힘이나 체계와 맞서 싸운다. 그 형상과 행위는 극히 인간적이다.

북유럽의 여러 신 가운데도 투쟁심과 전투력이 특히 강한 존재가 천둥의 신 토르다. 그가 묠니르 망치를 휘두르면 천둥이 쳐서 세상이 뒤흔들린다. 벼락의 신 제우스를 연상시키는 모습인데, 살펴보면 속성에 차이가 있다. 자연의 본래적 위력으로서의 제우스의 벼락이 신과 인간을 지배하는 구실을 하는 것과 달리 토르의 천둥은 거인이나 다른 족속과의 싸움에서 사용된다. 토르가 상대하는 거인들은 크고 거친 자연을 표상하거니와, 토르의 과업은 자연에 맞서 삶의 길을 여는 데 있다. 토르가 손이 아닌 망치로 천둥을 일으킨다는 점 또한 인간적 문명성을 나타낸다. 망치는 사람이 만들어서 쓰는 도구인 것이다.

북유럽 신화에서 자연에 대한 영웅적 투쟁이 강조되는 것은 특유의 환경과 관련이 깊다. 스칸디나비아반도를 비롯한 북유럽 지역은 자연환경이 험하고 열악하다. 겨울이면 끔찍한 추위와 함께 긴긴 밤이 이어진다. 그 원형적 표상이 얼음과 눈의 세상 니플하임이며, 생명적으로 구체화된 존재가 서리거인이다. 생존을 위해 맞서 싸워야 하는 대상이다. 한편, 북유럽의 여름은 여느 지역 못지않게 더우며 긴긴 태양의 시간이 이어진다. 불의 세상 무스펠하임의 현현이다. 필연적으로 감당해야 할 자연조건이다. 크고 험한 산이나 거친 바다도 부딪쳐 극복해야 할 또 다른 거인에 해당한다. 허리띠 메긴교르드를 졸라매고 망치를 휘두르며 거인들과 싸우는 토르는 북유럽 사람들 자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태초 거인 이미르와 오딘 삼형제의 싸움으로부터 이어져온 기나긴 역사다.

북유럽 신화에서 오딘과 토르 등은 아제 신에 속하는데, 거인들 외에 바네 신들과도 전쟁을 치른다. 오딘이 주도한 그 전쟁은 얼핏 종족간 싸움으로 보이지만, 잘 보면 이 또한 자연과의 싸움에 해당하는 면모를 지닌다. 바네의 대표신인 프라이는 바다의 신 뇨르트와 대지의 여신 네르투스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로 자연신적인 존재다. 바네 신 숭배는 자연을 부모처럼 존중하고 따르는 삶의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오딘은 바네 신들을 물리쳐 제압하는 길을 택한다. 한쪽 눈을 희생하고 얻은 지혜를 무기로 삼은 투쟁이었다. 그 지혜는 명백히 문명적이고 인간적인 것에 해당한다.

전쟁의 신 오딘과 천둥의 신 토르가 발휘하는 위력은 일견 죽이고 파괴하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현대에 들어와 슈퍼히어로로 거듭난 오딘과 토르의 형상은 압도적 전쟁신 이미지에 가깝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들의 싸움은 살기 위한 것이고 살리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험한 자연환경 속에서 삶의 길을 찾아 분투해온 영웅적 역사가 그들의 서사 속에 깃들어 있다. 후예나 메르겡, 대별와 소별왕이 하늘의 해를 쏘고 백두산 백장군이 흑룡과 맞서 싸운 것과 통하는 면모다.

그리고 그들은 전지전능한 무소불위 능력자가 아니다. 오딘은 한쪽 눈을 잃은 존재이며, 토르는 거인의 주머니에 속절없이 갇혀 휘둘리기도 한 존재다. 인간이 그런 것처럼, 그들의 한계는 명확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끝없이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산꼭대기로 끊임없이 바윗돌을 굴려올리는 시시포스처럼. 시시포스와 비교하면, 오딘과 토르는 더 적극적이고 개척적이다.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대신 계속 다른 벽에 몸을 부딪쳐 새 영토를 열어나간다. 칼 같은 예기와 천둥 같은 행동력으로. 영웅의 진경(眞境)이다. 거대한 벽과 맞서 싸워서 스스로 거인이 되고 신이 되는 것. 인간존재의 원형적 과업에 해당하는 무엇이다. 세계의 큰 벽에 둘러싸인 21세기 젊은이들이 오딘이나 토르에 열광하는 것이 우연이 아님을 문득 깨닫는다.

제주도 작은 마을의 영웅 궤네깃또의 위엄

오늘날 세상에 널리 알려진 신화들은 나라나 민족, 또는 종족 차원의 이야기들이다. 예전에는 이보다 작은 단위의 신화들이 널리 전승되었었다. 작은 마을 같은 곳에도 각기 자기만의 신화가 있었다. 그 인상적이고 생생한 자취를 신화의 섬 제주에서 볼 수 있다. 제주도의 크고작은 여러 마을은 본향으로 불리는 지역수호신을 모시고 있으며, 다수의 본향신들이 신화에 해당하는 내력담을 지닌다.

제주도 본향신은 영웅적 면모를 지닌 이들이 많다. 그중에도 첫손에 꼽을 만한 존재가 구좌읍 김녕마을의 신 궤네깃또다. 궤네깃또는 송당 본향 소천국과 백주또의 아들로서 형제뻘인 내왓당 천자또마누라나 일뤳당 바라못도 등과 유사한 내력담이 전해지는데, 서사적 스케일이 크고 완성도가 높다. 완연한 영웅신화의 풍모다. 아담한 작은 마을의 신이지만, 궤네깃또의 당당한 존재감은 세계신화의 어느 영웅 못지않다. 『살아있는 한국신화』에서 그를 소개하면서 ‘바다와 대륙을 평정한 거침없는 영웅’이라 했는데 과장이 아니다.

궤네깃또의 영웅적 면모는 헤라클레스나 오딘보다는 토르에 가깝다. 거침없는 직진과 투박한 부딪침이 그러하며, 소 한 마리를 통째로 먹는 대식성이 그러하다. 궤네깃또는 동해바다를 거쳐 중국대륙에 다다른 뒤 머리가 둘셋 달린 장수와 넷 달린 장수를 차례로 무찔러 변란을 막고서 천하제일의 장수가 된다. 명백한 장군신 이미지다. 무신도에 나오는바 말에 올라탄 채 눈을 부릅뜨고서 칼을 쳐든 장군신의 형상이 꼭 어울린다. 그는 땅을 떼어주고 천금상 만호후를 봉하겠다는 중국 천자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고 떠나오거니와, 대륙을 완벽하게 압도한 모습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궤네깃또는 제주섬 고부니마루에서 솟아난 소천국과 강남천자국 백모래밭에서 솟아난 백주또 사이에서 여섯째 아들로 태어난 존재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에게 버림받는다. 그 수염을 잡아당기고 가슴을 두드렸기 때문이다. 타고난 반골성일 수도 있고, 아버지답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저항일 수도 있다. 궤네깃또는 무쇠석갑에 갇힌 채로 동해바다에 띄워지는데, 영웅의 일대기의 둘째 단계인 ‘버려짐과 죽을 위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로서는 버려짐이라기보다 큰세계로의 여행에 해당하는 과정이었다. 바다를 흘러다니던 중 동해용왕 막내딸이 석갑을 열었을 때 옥같은 모습으로 책을 한 상 가득 받고 앉아있었다 하니 그야말로 여유만만이다. 막내딸과 짝을 이룬 뒤 궤네깃또는 날마다 소와 돼지를 통째로 먹어치워서 용궁 창고를 거덜낼 지경에 이른다. 바다를 내 세상으로 삼아 풍요를 마음껏 누린 일이다. 그렇게 그는 바다를 평정한다.

바다와 대륙을 평정한 궤네깃또가 천자의 제안을 뿌리치고서 행한 일은 백만 군사를 거느리고 고향땅 제주로 돌아온 일이었다. 화려한 귀환! 그가 거제도 남해도 진도 완도를 거쳐 제주섬에 상륙하자 소천국과 백주또가 놀라서 달아나다가 죽어서 각기 알송당과 웃송당에 좌정한다. 일컬어 구시대의 종언. 궤네깃또는 부모를 제사한 뒤 백만 군사를 흩어 보내고 제주섬을 널리 둘러보다가 김녕리 궤네기를 마음에 드는 처소로 선택하고서 신으로 좌정한다. 해마다 큰 돼지 검은 돼지 흰 돼지를 제물로 받고서 마을을 보살펴준다. 평안하게, 그리고 풍요롭게.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지속될 일이다.

바다와 대륙을 휘저은 크나큰 행보의 결과가 작은 마을 수호신이고 돼지 한 마리 제물이라면 용두사미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다. 큰 나라 왕이 되고 만인의 신이 되는 것을 영예로 삼는 입장에서 보면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다분히 정치적이고 권력적인 사유다. 신화의 관점에서는 모든 곳이 세상의 중심이다. 특히 나 자신과 나의 갸륵한 동반자들이 있는 곳은. 제주섬 김녕마을 사람들에게는 그곳이 가장 크고 신성한 땅이다. 그곳을 지켜주는 궤네깃또는 가장 큰 과업을 맡고 있는 최고의 신이다.

궤네깃또 이야기에서 특별히 주목할 화소는 ‘한 상 가득한 책’이다. 소 돼지를 통째로 먹고 괴물 장수들을 제압하는 장군신 이미지와 안 맞아 보이는 요소다. 하지만 그 책은 이 신화 속 문화적 상징의 중핵을 이룬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대륙을 제압하고 바다를 평정하는 일은 자연에 맞선 투쟁적 삶을 표상한다. 척박한 땅 거친 바다 속에서 힘들게 삶을 일궈온 제주사람들의 내력이 거기 담겨 있다. 책은 그들의 또다른 도전이고 투쟁이라 할 수 있다. 버림받은 변방의 피지배자로서 겪는 차별과 소외를 공부와 지식으로 극복하겠다는 것. 궤네깃또가 책을 가득 안고서 큰세상으로 나아간 데는 제주사람들의 역사가 담겨 있다. 밤을 밝히며 글과 씨름해서 스스로를 지키고 세워온 분투의 역사. 그것이 제주의 역사를 넘어 한겨레의 문명사라고 하면 시골 구석에서 태어나 공부 하나로 길을 열어온 사람의 주관적 편견일까?

지금으로부터 약 두 주일 전, 제주도 여행의 숙소 한 곳을 일부러 김녕리 들판의 한 민박집으로 잡았었다. 하루종일 비가 촉촉히 내린 다음 날, 해뜰 무렵에 궤네기 신당을 찾아갔다. 신당이라면 집을 떠올릴지 모르지만, 제주도 본향당은 나무나 바위, 굴 같은 자연물인 경우가 많다. 궤네깃당도 그렇다. 들판에 서 있는 한 그루 팽나무와 그 아래편의 바위 동굴이 곧 궤네깃또가 깃든 성소다. 거기 한 손에 칼을 들고 한 손에 책을 든, 토르의 망치와 오딘의 지혜를 함께 갖춘 위대한 신이 좌정해 있다.

궤네깃당에서 한참을 머물며 서성이다가 근처의 작은 오름에 올랐다. 모름지기 궤네깃또가 수시로 그곳을 오르리라. 한쪽을 보니 멀리 아침햇살 속 김녕마을 건너로 드넓은 바다가 은빛으로 반짝였다. 맞은편 쪽을 보니 푸른 들과 나무숲 너머로 한라 영산 하얀 봉우리가 우뚝했다. 하나의 큰 우주였다. 신령한.

토르와 궤네깃또와 나. 망치와 칼의 재발견

문학치료의 관점에서 내 안의 영웅서사를 돌아보면서 그 원형으로 시시포스에 대해 말했었다. 한라산을 거듭 오르며 얻은 깨달음이었다. 지금 다루고 있는 토르나 궤네깃또로 말하자면 나의 서사와 이질적 거리감이 큰 편이다. 궤네깃또의 책은 나름 나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낯선 도시로 던져져 열악한 환경에서 이어온 책과의 씨름은 힘든 투쟁이었다. 새 길을 열어준. 하지만 내가 든 것은 책뿐, 망치와 칼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몸을 던져 부딪쳐야 하는 진짜 싸움에서 나는 지레 기가 눌려 뒷걸음질칠 ‘예정된 패배자’였다. 그리하여 나는 토르를 말하고 궤네깃또를 말한다. 칼같은 예기와 천둥같은 행동력이 필요한 나. 책을 든 다른 한 손에 궤네깃또의 칼이나 토르의 망치를 들어야 한다. 내 삶의 영웅이 되기 위해서.

앞서 토르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가 ‘살리는 존재’라 했었다. 헤아려보면 망치의 쓰임이 원래 그러하다. 전쟁과 같은 특수 상황이 아니라면, 망치는 ‘건설’을 위한 도구다. 망치가 있어야 집이나 창고를 지을 수 있다. 내가 살 집을 직접 짓는 일을 머리로만 헤아리면서 엄두를 내지 못하는 나, 토르의 망치를 손에 들면 그 일이 가능할지 모른다. 칼은 또 어떤가. 흔히 전쟁이나 살육을 연상하지만, 현실 속에서 칼의 가장 큰 쓰임은 자르고 깎아서 만드는 일이다. 우리를 먹여살리는 음식 같은 것을. 내가 영 못하는, 언젠가 도전해야 할 일이다. 요리를 위한 칼은 오딘이나 궤네깃또의 칼과 위화감이 커보일 수 있으나, 나에게는 벽을 넘어선 도전이이라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 머무름 없이 움직여 나가가면서 바꾸어가는 것. 그렇게 살아있음을 새롭게 확인해 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펼쳐가야 할 영웅서사의 핵심이 아닐까?

굳이 이런 내용을 쓰는 이유는 사적인 관심사나 계획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신화 속의 수많은 영웅이 우리 자신의 서사 속에 의미있게 들어와 깃들 수 있음을 말하기 위함이다. 오딘과 토르가 궤네깃또나 바라못또와 실제로 만나서 합을 겨룰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우리의 서사 속에서는 만남과 융합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 곧 우리들의 자기서사가 될 수 있다. 지역적, 집단적 특수성과 시대적 차이를 지닌 수많은 영웅신화들은 서사적 접속과 연결을 통해 우리 모두의 영원한 자산이 될 수 있다. 제각기 서로 다른 관심과 방향으로. 도전을 통한 초극적 자기실현이라고 하는 하나의 같은 길로.

중요한 것은 모양새나 결과가 아니다. 움직여 부딪친다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하다. 어디인가 하면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인가 하면 나의 방식으로. 김녕 사람들에게 김녕마을이 세상의 중심인 것처럼, 나에게는 풀무골 작은 마을이 세상의 중심이다. 내가 들어앉아 있는 나의 방, 여기가 나의 궤네기다. 지금 내가 행하고 있는 일이, 이 미력한 글쓰기가 곧 영웅적 과업이다. 그렇게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새로운 도전을 끊임없이 시도하면서. 나의 한 생명이 허락할 때까지. 오딘과 토르와 궤네깃또가 그리했던 것처럼. 바리데기와 감은장아기, 자청비가 그리했던 것처럼.

신동흔 /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국문학치료학회장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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