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들도 안다..'서로 침 섞는 사이'가 뭘 뜻하는지

곽노필 2022. 1. 27. 10: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두터운 관계'와 '얇은 관계' 실험 결과
80%가 침 섞은 사람에게서 도움 기대
침 섞기를 친밀관계 징표로 추론하는듯
서로 침을 나누는 행위는 친밀도를 판단하는 주요한 잣대 가운데 하나다. MIT뉴스

타인에게 침을 튀기는 행위는 무례하고 혐오스런 행위로 취급된다. 그러나 연인이나 엄마-아이처럼 매우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선 상대방의 침을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이 없다. 침 속에는 오염물질이나 병원체 등이 있지만 별달리 의식하거나 개의치 않는다. 서로의 입에 키스하고, 숟가락을 같이 쓰고, 아이스크림을 함께 핥아먹을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서로의 침을 섞을 수 있느냐는 인간관계의 친밀 정도를 판단하는 지표 가운데 하나다.

생후 8개월된 어린 아이들도 침 섞기에 내재돼 있는 이런 사회적 관계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와 하버드대, 호주 뉴캐슬대 공동연구진은 아이들이 침 섞기에서 관계의 친밀성을 추론한다는 연구 결과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연구진은 이는 침 섞기가 자신과 가장 두터운 관계, 즉 자신을 보살피고 지켜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가려내는 잣대 역할을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밝혔다.

사회적 경험이 없는 아이들이 어떻게 그런 사람을 가려내는지는 그동안 과학자들에게 주어진 수수께끼 중 하나였다.

애슐리 토마스(Ashley Thomas) MIT 박사후 연구원은 오랜기간 축적된 인류학 연구에 그 단서가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세계의 인류학 연구들을 살펴본 결과 아주 친밀한 유대관계를 가진 사람들은 침을 비롯해 체액을 거리낌없이 나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아이들도 이를 알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직접 실험해보기로 했다.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 아이(왼쪽)는 친구(아래)와 언니(위) 중 누구와 빨대를 같이 쓸까? 사이언스

연구진은 화상회의 시스템 줌을 통해 통해 400명을 모은 뒤 아이들을 5~7살 그룹과 8~19개월 그룹으로 나눠 실험을 실시했다.

우선 5~7살 어린이 그룹에는 잔디밭에 서 있는 어린이가 등장하는 일련의 만화 장면들을 보여줬다. 만화 속에서 어떤 아이들은 빨대로 음료를 마시거나 아이스크림을 먹고, 어떤 아이들은 줄넘기를 하거나 다른 장남감을 갖고 놀았다.

그런 다음 연구진은 만화에 가족 구성원과 선생님 또는 친구를 등장시켰다. 만화 속 어린이의 침이 묻은 물건을 누구와 나눠야 하는지 묻자, 실험참가 어린이들의 74%는 비가족이 아닌 가족 구성원을 선택했다. 침이 묻지 않은 물건의 경우엔 가족과 비가족 간에 별 차이가 없었다.

아기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한 여성이 자신의 입 속에 있던 오렌지를 인형의 입에 넣어주고 있다. 사이언스

아이들이 침을 섞은 여성을 쳐다본 이유

생후 8~19개월의 좀 더 나이가 어린 아이 그룹에는 털북숭이 파란색 꼭두각시 인형과 여성이 등장하는 동영상을 보여줬다. 먼저 한 여성이 인형과 함께 공놀이를 했고, 이어 다른 여성이 자신의 입 속에 있던 오렌지를 꺼내 인형에게 한 입 베어물게 한 뒤 다시 자신의 입에 넣었다.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인형이 두 여성 사이에서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괴로워하는 장면이 등장했다.

연구진이 동영상을 본 아이들의 반응을 관찰한 결과, 아이들의 약 80%가 인형과 침을 섞은 여성을 쳐다봤다. 연구진은 아이들이 침을 섞은 여성을 쳐다본 것은 그 여성이 우는 인형을 위로해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으로 추정했다. 실험 장면은 줌을 통해 녹화됐기 때문에 연구진은 아이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다른 실험에선 한 여성이 보라색 인형에는 자신의 손가락을 번갈아 입에 넣고, 녹색 인형에는 손가락을 번갈아 이마에 대는 동영상을 틀어줬다. 동영상의 마지막 장면에서 여성이 두 인형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아이들은 손가락을 입에 넣었던 인형을 더 많이 쳐다봤다.

이번 연구는 침 섞기를 하는 사이인지 여부가 아이들이 자신의 사회적 관계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논문 제1저자인 토마스는 “다른 어떤 종보다 오랜 기간 어른들에게 의지해 사는 인간 아이들에게 ‘두터운 관계’와 ‘얇은 관계’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자신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좋은 방법일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로스앤젤레스캘리포니아대(UCLA)의 앨런 피스케(Alan Fiske) 교수(심리인류학)는 ‘사이언스’에 “아직 말을 배우기 전의 유아도 사회적 관계에 대해 타고난 이해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라고 논평했다. 피스케 교수는 그러나 침 섞기가 친밀한 사이를 파악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며 동침, 포옹, 성적인 접촉 같은 다른 행동을 통해서도 추론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스웨덴 웁살라아동·유아연구소의 크리스틴 포세트 박사는 ‘사이언스’ 논평에서 “낯선 사람과 침을 섞는다고 생각하면 아마 혐오감이 들겠지만 그 사람이 친밀한 누군가이면 그렇지 않을 것”이라며 “체액에 대한 혐오감은 오염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생겨난 진화적 압력일 수 있으나 아기를 돌보기 위해선 이런 접촉이 필요하기 때문에 두터운 관계의 사람에게는 예외를 두는 쪽으로 진화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는 미국 아기들을 대상으로 진행했다. 연구진은 향후 다른 문화권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도 진행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연구진은 또 뇌 영상 장치를 이용해 뇌의 어떤 부분이 침 섞기에 기반한 사회적 관계 평가에 관여하는지도 들여다볼 계획이다.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