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 중인데 뒤에서 화약, 위험하다" 말해도, 대답은 '일이나 해'

신다은 2022. 1. 27.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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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재해처벌법][현장] 중대재해법 시행 _ 아직 변하지 않은 공사장들
터널 공사 '특수고용직' 건설 노동자들
현장 위험 알려도 관리자는 뭉개기 일쑤
개선 요구할 창구 없어 공사장서 집회
"위험 작업 중지 요구, 노동자 참여 필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이틀 앞둔 25일 오전 경기 수원의 한 공사장에서 노동부 소속 근로감독관(맨 왼쪽)이 현장점검을 하고 있다. 수원/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터널을 뚫고 있는데 바로 뒤에서 화약을 터트립니다. 숏크리트(호스를 통해 분사하는 콘크리트) 양생도 제대로 안 돼서 덜 마른 숏크리트가 떨어지고 그 탓에 차량 일부가 부서진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점을 터놓고 말할 곳이 마땅히 없고, 현장 관리자에게 어렵게 이야기해도 ‘일이나 하라’고 합니다.”

터널 폭파용 화약 장전 구멍을 뚫는 일을 하는 점보드릴 기사 박아무개(42)씨가 26일 <한겨레>에 전한 터널 폭파 현장의 분위기다. 박씨를 포함한 한국노총 점보드릴지회 기사들은 지난달부터 서울 관악구 난곡사거리 터널 공사 현장에서 집회를 열고 위험한 근무환경을 건설사가 아닌 ‘국민들’에게 알리고 있다. 특수고용직인 이들은 건설사에 의견을 전달할 창구가 없을 뿐더러, 어렵게 문제제기를 해도 하청 안전관리자 선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업주에게 종사자 의견을 듣고 위험 요인을 개선하도록 요구하는 중대재해처벌법이 27일 시행되지만, 노동자들은 여전히 위험을 알리기 위해 집회를 택하고 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원청 소속 노동자 뿐 아니라 하청 노동자와 특수고용직 노동자 사고까지, 사업주가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현장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업재해에 적용된다. 법 시행령 역시 고용형태와 무관하게 모든 종사자 의견을 듣는 절차를 마련할 것을 의무로 정했다. 이에 따라 원청은 기존 정규직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산업안전보건위원회’와 하청업체 경영진 및 하청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안전근로협의체’를 운영할 뿐 아니라, 이런 조직에 포함되지 않는 특수고용직 기사나 일용직 노동자의 의견을 듣는 창구도 별도로 마련해야 한다. 노동부는 건의함과 사내 온라인 시스템, 간담회 등을 제안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의견 수렴 창구가 미흡하고 “건설현장 안전관리자에게 말하면 된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지난 25일 돌아본 경기도 수원의 한 공사현장 역시 공사 규모가 50억원이 넘는 현장이었음에도 노동자들이 의견을 제시할 창구가 없었다. 문제제기는 현장 안전관리자를 통하도록 돼 있었고, 매일 아침 안전을 점검하는 툴박스미팅(TBM)도 별도로 운영되지 않았다.

현장 노동자들은 시설·예산 집행의 권한이 제한적인 현장 안전관리자에게 구두로 의견을 말하면 대부분 별다른 피드백을 받지 못한다고 입을 모은다. 안양근 건설노조 경기중서부 노동안전부장은 “안전관리자나 작업반장은 노동자 의견을 들으면 해결해 줘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기도 하고 생산 일정이 먼저기 때문에 잘 안 들으려고 한다”며 “그나마 노동조합이 하청과 원청 안전관리부서에 여러 번 문제제기를 해서 겨우 해결하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구두로 전달된 의견은 중대재해처벌법 수사를 할 때 사업주의 위험 요인 방치 근거로 남지도 않는다.

그나마 안전근로협의체를 통해 의견 제시를 할 수 있는 하청업체 노동자와 달리, 계약서상 개인사업자인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콘크리트 타설공 복아무개씨(51)는 “특수고용직 노동자인 우리가 안전 관련 문제제기를 하면 하청 건설사가 타설업체 대표한테 떠미는 경우가 많은데 정작 타설업체 대표는 우리를 노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건설사와의 안전근로협의체 참여는 물론 간담회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점보드릴 기사 이아무개(43)씨는 “2년 전 ‘작업 도중 발파를 하지 말아달라’고 현장 관리자에게 무전을 쳤다가 일자리를 잃었다”며 “고용불안이 큰 특수고용직이다 보니 개인 신분을 드러내어 의견을 전달하는 게 큰 부담이 된다”고 말했다.

안전에 대한 노동자 의견 청취는 위험성평가 등 사업장의 유해·위험 요인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노동부도 적극적인 노동자 의견 청취를 주문하며 “현장의 유해·위험 요인은 해당 작업을 하는 당사자인 노동자가 가장 잘 아는 경우가 많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그간 관행처럼 축적돼 온 소통 단절은 법 시행이 다가와도 크게 바뀌지 않고 있다. 손익찬 일과사람 변호사는 “산재 예방을 사업주에게만 맡겨둘 수 없고 정부 감독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단기간에 성과를 거둘 수 있는 부분은 노동자 참여”라며 “위험성평가와 작업중지, 산업안전보건위원회 운영 등 중처법이 정한 노동자 참여 제도를 내실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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