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호의 저널리즘책무실] 김건희 녹취록 보도, 누가 판단해야 하나?

권태호 2022. 1. 26.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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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책무실]

권태호 | 저널리즘책무실장·논설위원

법원 판단은 존중하되, 보도 판단 기준은 언론 스스로 정해야 한다. 법원은 ‘불법 여부’를 판단하는 기관이고, 언론은 ‘보도의 공적 가치’를 판단한다. 언론은 사실과 상식을 나침반 삼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추가 취재를 통해 사실이 규명되어야 할 대목이 적지 않다. 그런데 대부분 양당 반응, 지지율 영향, 향후 전망 등의 보도만 넘친다. ‘걸크러시’ 등 인터넷 밈을 레거시 미디어들이 긁어 보도하는 걸 보는 건 부끄럽고 아프다.

지난 16일 <문화방송>(MBC) ‘스트레이트’ 보도로 세상에 알려진 ‘김건희 녹취록’은 저널리즘 관점에서도 많은 물음을 던진다.

<서울의 소리>의 취재 방식은 적절한가?

김건희씨와 <서울의 소리> 이명수 기자의 6개월간 대화 내용을 보면, 이명수 기자의 호칭이 시간이 지날수록 바뀐다. 7월 첫 통화의 “기자님”은 얼마 안 가, “이 기자”, “동생”, “우리 명수”로 변한다. 이명수 기자는 김건희씨가 자신을 신뢰하게끔 만들어 친구한테 얘기하듯 속내를 드러내게 했고, 모든 대화를 녹음했다. 김건희씨 입장에선 인간적 배신감을 느낄 수 있다. 취재원에 대한 이런 접근을 공익적 목적을 위한 ‘위장(ambush) 취재’로 인정할 수 있을까. 각자 의견이 다를 순 있겠지만, 아마 일반적인 언론사 보도책임자라면 이런 식의 취재를 승인할 것 같진 않다.

취재 과정에 문제가 있으면 보도하면 안 되나?

윤재옥 국민의힘 선거대책본부 부본부장은 <문화방송> 보도 다음날인 17일 “재판에서 독수독과(위법수집 증거 무효화) 원칙이 적용돼 증거 가치를 상실한다. 언론 보도에도 이 원칙이 적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수독과’는 사법적 판단이고, 언론 판단 기준은 공적 가치다. 법원에 가더라도 이명수 기자의 취재가 ‘독수’라는 판결이 내려질진 알 수 없다. 유명 인사라도, 공적 가치 없는 사생활을 흥밋거리로 보도하는 건 지양해야 한다. 그러나 공적 영향력이 큰 사람일수록, 사생활 영역은 좁아지고 공적 가치는 점점 커진다. 김건희씨 발언은 ‘형식’은 사적 대화이되, ‘내용’은 그렇게 보기 힘든 게 많다. 윤석열 후보에게 비판적인 언론 등을 향해 “청와대 가면 전부 다 감옥에 처넣어버릴 거다”, “내가 정권 잡으면 거긴 완전히 무사하지 못할 거야, 권력이라는 게 잡으면 우리가 안 시켜도 알아서 경찰들이 입건해요. 그게 무서운 거지”라고 했다.

지난 16일 오후 서울 상암동 문화방송(MBC) 사옥에 걸린 전광판에서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의 배우자 김건희씨의 ‘7시간 전화 통화’ 내용을 다루는 방송이 방영되고 있다. 연합뉴스

어디까지 보도할지 누가 판단해야 하나?

<서울의 소리>로부터 녹취록을 넘겨받은 <문화방송>이 보도를 준비하자, 김건희씨 쪽은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고, 서울서부지법은 ‘일부 인용’을 결정했고, <문화방송>은 이를 따랐다. 또 법원이 문제 삼을지도 모를 부분을 먼저 거뒀다. 그런데 이후 똑같은 녹취록을 놓고 <열린공감 티브이(TV)>와 <서울의 소리> 등에 대한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에서 서울중앙지법과 서울남부지법은 “기자 신분을 밝혔고, 발언이 조작되지 않았고, 국민적 관심을 받고 있는 공적 인물로, 공론 필요성이 있는 공공의 이해에 관한 사항”이란 이유로 ‘대부분 공개’를 결정했다. 어느 재판부냐에 따라 달라지는 법원에 저널리즘적 판단을 맡길 수 없는 이유다. 문제 발언은 ‘스트레이트’가 보도하지 않은 부분에 대부분 들어 있다.

<한겨레>는 17일 별도 입수한 ‘김건희 녹취록’을 보도하면서 “(<문화방송>에 내린) 법원 판단을 1차 보도 기준으로 삼아 제한적으로 전한다”고 밝혔다. 동의하지 않는다. 법원 판단은 존중하되, 기준은 언론이 정해야 한다. 사전 판단조차 법원에 의지하는 건 부적절해 보인다. 법원은 ‘법’을 판단하고, 언론은 ‘보도 가치’를 판단한다. 사실과 상식을 나침반 삼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그리고 독자들의 판단을 받는다.

대화록을 보여주기만 하면 되나?

많은 언론이 그렇게 했다. 공적 가치가 없는 잡담 수준, 허언증 의심이 들 정도의 근거 없는 주장들도 꽤 있었다. 그러나 무속 논란, “가만히 있었으면 조국, 정경심도 구속 안 되고, 넘어갈 수 있었거든,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여기서 지시하면 다 캠프를 조직하니까”, “내가 한동훈이한테 전달하라고 할게. 몰래 해야지”, 체코 여행 관련 출입국 기록 삭제 여부 등 추가 취재를 통해 사실이 규명되어야 할 대목이 많다. 이는 취재력이 영세한 <서울의 소리>가 아닌, 기성 언론들이 맡아야 할 부분인데, 대부분 언론이 양당 반응, 지지율 영향, 향후 전망 등만 쫓는다. ‘걸크러시’ 등 인터넷 밈을 레거시 미디어들이 긁어 보도하는 걸 보는 건 부끄럽고 아프다.

1971년 6월 <뉴욕 타임스>는 미국 정부가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 북베트남 공격 빌미로 삼았다는 내용의 정부 문서 ‘펜타곤 페이퍼’를 보도했다. 정부는 국가 보안을 이유로 <뉴욕 타임스>에 소송을 걸었다. ‘큰 물 먹은’ <워싱턴 포스트>는 인턴 기자를 <뉴욕 타임스>에 위장 침투 시키는 등 수단을 가리지 않고 애써 뒤늦게 ‘펜타곤 페이퍼’를 입수했다. 사내 변호사와 임원들은 보도를 반대했지만, 결단을 내렸다. 이를 담은 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더 포스트>다. ‘김건희 녹취록’ 보도와 ‘펜타곤 페이퍼’ 보도를 비교할 순 없다, 도저히. 다만, 한국엔 ‘뉴욕 타임스’보다 ‘워싱턴 포스트’들이 더 필요해 보인다.

영화 <더 포스트>(The Post) 스틸컷 장면. 영화에서 벤저민 브래들리(톰 행크스) <워싱턴 포스트> 편집국장이 간부들과 논의하고 있다. CGV아트하우스 제공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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